4화
‹ ›오후 세 시, 사무실 안은 늦가을 햇살이 블라인드 사이로 비스듬히 스며들어 책상 위에 가느다란 그늘을 그리고 있었다. 나는 결재 서류를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문 앞에 선 그를 올려다보았다. 강진하. 노크도 없이 들어온 그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이 서늘했지만, 눈빛 안쪽에서 무언가 다른 기운이 일렁이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할 얘기가 있으면 회의실에서 하시죠, 강 상무님." 나는 애써 사무적인 어조로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그는 대답 대신 사무실 문을 등 뒤로 조용히 닫았다.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딸깍, 하는 짧은 마찰음 하나가 방 안의 공기를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꿔놓은 것 같았다.
"여기가 더 편할 것 같은데요." 그가 낮게 말하며 다가왔고, 그 거리감이 좁아질수록 나는 뒤로 물러나다가 결국 책상 모서리에 등을 부딪혔다. 차가운 나무 모서리가 허리를 파고드는 감각에 나는 짧게 숨을 삼켰다. 도망칠 곳이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손끝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강진하 씨." 나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경계했지만, 그 부름이 오히려 그를 더 가까이 오게 만든 것 같았다. 그는 내 이름을 부르는 방식과는 다르게,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걸 즐기는 사람처럼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우리 형 얘기 좀 해도 됩니까." 그가 물었고, 그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형이라는 말 하나에 삼 년이라는 시간이 통째로 되돌아오는 기분이었다. "형이 삼 년 전에 이혼했다는 거, 알고 계세요?"
"…… 몰랐습니다." 나는 짧게 대답했지만, 목소리가 이미 떨리고 있었다. 몰랐다는 말이 얼마나 얄궂은지, 나 자신도 알고 있었다. 삼 년 전이라면, 내가 그를 떠난 바로 그 무렵이었다.
"이혼하고 나서 형은 이 년 넘게 어디 있는지도 몰랐어요. 우리 가족 아무도 못 찾았죠." 그가 말을 이어가며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시선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나는 그 냉정함이 오히려 더 잔인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얼마 전에, 형이 다시 나타났어요. 그리고 제일 처음 물은 게 뭔지 아세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고, 그 침묵이 그에게는 이미 답이 된 모양이었다. 그의 눈매가 우묵하게 그늘졌다. 그 얼굴에서 승준의 어떤 흔적을 발견하고, 나는 숨을 삼켰다.
"당신 이름이었어요." 그가 낮게 내뱉었고, 그 말이 심장을 관통하는 감각을 나는 도저히 감출 수 없었다. 가슴 안쪽이 순식간에 버석거리며 부서지는 것 같았다. 삼 년이라는 시간을 지나서도, 여전히 그 이름 하나로 나를 흔들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왜 이런 얘기를, 저한테……" 나는 겨우 말을 이었지만, 그는 대답 대신 내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이 뺨을 스치는 순간, 나는 그 온도가 낯설면서도 어딘가 익숙하다는 생각을 했고, 그 생각 자체가 소름 끼치도록 싫었다.
"당신이 형을 버렸다는 거, 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때 형이 얼마나 망가졌는지도." 그의 손끝이 내 턱을 들어 올렸고, 나는 그 손을 뿌리치지 못한 채 그대로 서 있었다. 뿌리쳐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몸이 명령을 듣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잘 살고 있는 당신을 보니까, 이상하게 화가 나요."
"이런 식으로……" 나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의 눈빛에서 분노와 조롱이 뒤섞인 무언가를 읽어냈지만, 그것을 막을 방법이 내겐 없었다.
그가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쳐온 순간, 나는 저항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손끝조차 움직이지 못했다. 그 키스는 다정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억눌러온 분노와 갈증이 뒤섞인 것처럼 거칠었으며, 나는 그 안에서 승준의 흔적과 진하의 낯선 온도가 동시에 느껴지는 것에 스스로도 소름이 끼쳤다. 형제라는 것이, 어쩌면 이런 순간에도 잔인하게 겹쳐질 수 있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숨이 막혔다. 그의 손이 내 허리를 감싸는 순간, 책상 모서리가 등을 더 세게 눌렀고, 나는 그 통증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붙박여 있었다.
"……그만." 나는 겨우 그를 밀어내며 말했지만,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밀어낸다는 말이 무색하게, 내 손은 그의 셔츠 자락을 겨우 붙잡고 있었을 뿐이었다.
"왜요." 그가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고, 그 눈빛에는 후회 같은 것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싫으셨어요?"
싫었다고 말해야 했다. 그런데 그 말이 입안에서 맴돌다 사라졌다. 그 사실이 더 참담했다.
"이런 식으로 관계를 만들 생각이면, 사업 파트너 관계는 여기서 끝내는 게 맞습니다." 나는 최대한 냉정하게 말했지만, 손끝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목소리를 가다듬는 것조차 힘겨웠다.
"끝낼 수 없다는 거, 잘 아실 텐데요." 그가 뒤로 물러나며 옷깃을 정리했고, 그 태연함이 오히려 나를 더 참담하게 만들었다. 방금 전까지 나를 몰아붙였던 사람이, 몇 초 만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표정을 갈아입는 걸 보며, 나는 이 사람이 얼마나 위험한 사람인지 새삼 깨달았다. "청강 지분 삼십 퍼센트, 그거 하루아침에 없어지는 게 아니니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흐트러진 옷매를 정리하는 그를 바라보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가 셔츠 소매를 정돈하며 걸음을 옮기는 동안, 나는 그 뒷모습에서마저 승준을 떠올리고 있었다. 등신 같았다, 이 순간까지도.
그가 사무실을 나서기 전, 문가에서 다시 한 번 돌아보며 말했다. "참, 이번 주말에 형이 서울로 온다더군요. 오랜만에, 셋이서 얼굴 한번 보시겠어요?"
그 말을 던지는 그의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것이 다정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오히려 나를 시험하려는, 혹은 벌하려는 미소였다.
나는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가 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만을 들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고, 그 잔향이 사라진 뒤에도 나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심장이 여전히 미친 듯이 뛰고 있었고, 나는 손바닥으로 입술을 가만히 짚으며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손끝에서 그의 온도가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아서, 나는 몇 번이나 입술을 문질렀다. 지워지지 않았다.
한심했다, 이런 순간에도 승준이라는 이름 앞에서 다리가 굳어버리는 나 자신이. 그리고 그보다 더 한심한 건, 이번 주말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다른 방식으로 뛰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두려움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스스로도 구분할 수 없는 그 박동을, 나는 창밖으로 지는 늦가을 햇살을 바라보며 애써 외면하려 했다. 그러나 창에 비친 내 얼굴은, 이미 예전의 그 얼굴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