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문 실장, 잠깐 들어와 봐."
내선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대표이사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낮았다. 그 미묘한 온도 차이만으로도 나는 이미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걸 짐작했다. 서류를 정리하다 손을 멈추고,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을 잠깐 들여다보았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얼굴이었는데, 유난히 낯설게 느껴졌다.
집무실로 들어섰을 때, 나는 책상 위에 놓인 서류의 표지에서 청강그룹의 로고를 발견하고 손끝이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익숙한 로고였다. 몇 번이고 계약서와 보도자료에서 보았던 그 문양이, 오늘은 유난히 크고 위압적으로 보였다.
"이게 뭡니까." 나는 서류를 집어 들며 물었지만, 그 안의 내용을 읽어가면서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첫 줄부터 눈에 들어온 건 신사업 라인, 전담 디자이너 지정 요청, 그리고 그 아래 선명하게 박힌 이름 세 글자였다. 문소영.
"청강 쪽에서, 이번 신사업 라인의 전담 디자이너로 문 실장을 지정해달라는 공문이 왔어." 대표이사는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고, 그 표정이 이미 이 결정이 회사 차원의 거절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그는 안경을 벗어 손수건으로 닦으며 말을 이었다. "이런 경우는 나도 처음이야. 이름을 특정해서 요청이 오는 경우는."
"저는 이미 다른 프로젝트들이 있는데요." 나는 최대한 사무적으로 반박했지만, 목소리가 흔들리는 것을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다. 손에 쥔 서류 모서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청강이 로제타 지분의 삼십 퍼센트를 쥐고 있어. 이번 신사업 라인, 그쪽 강진하 상무가 직접 총괄한다더군. 그리고 그쪽에서 콕 집어 문 실장을 요청했으니, 우리로선……" 대표이사가 말을 흐리며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그 침묵 속에서 이미 결론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읽었다.
"거절할 수 있는 카드가 없다는 말씀이시죠." 내가 대신 문장을 끝맺었다.
"미안하네." 그는 정말로 미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 미안함이 상황을 바꿔주지는 않았다. "일단 이번 라인만 맡아주면, 다른 프로젝트는 내가 조율해볼게."
나는 대답 대신 서류를 접어 옆구리에 끼웠다. 더 할 말이 없었다. 아니, 할 말은 많았지만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집무실을 나오면서, 나는 손마디가 하얗게 도드라지는 것을 느끼면서 서류를 구겨질 정도로 세게 움켜쥐었다. 복도를 걷는 동안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강진하, 라는 이름이 이제는 단순한 재회의 대상이 아니라 내 일상 전체를 흔드는 권력이 되어가고 있었다. 열여섯 살의 겨울, 그 이름 앞에서 무력했던 나와, 지금 서른여섯의 나이로 또다시 같은 이름 앞에 서 있는 나 사이에, 얼마나 되는 시간이 지났던가. 그런데도 결국 제자리인가, 하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버석거렸다.
자리로 돌아와 앉았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모니터 화면의 도면들이 흐릿하게 겹쳐 보였다. 나는 결국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날 오후,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 나 이거 좀 이상해."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회사 이름, 청강그룹, 강진하라는 이름을 말하는 동안 목소리가 자꾸 갈라졌다. 형은 잠시 침묵한 뒤 낮게 물었다.
"강씨 집안 쪽에서 청강그룹 경영권 승계 문제로 시끄럽다는 얘기 들었어. 진희가 큰누나로서 승계 서열 1위였는데, 최근에 진하가 신사업 성과로 그 서열을 뒤흔들고 있다더라." 형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나는 그 안에서 심각한 경고를 읽어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나는 물었지만, 이미 어렴풋이 짐작이 가고 있었다. 짐작이 가면서도 애써 모른 척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진하가 널 전담으로 데려간다는 건, 로제타랑의 사업 연대를 자기 성과로 만들겠다는 거야. 그리고 그 사업의 얼굴이, 하필 네가 된다는 거지." 형이 덧붙였다. "조심해, 소영아. 그 집안 내부 싸움에 네가 끼어드는 거니까."
"내가 끼어드는 게 아니라, 끌려 들어가는 거잖아." 나는 낮게 반박했다.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그래, 그게 더 문제야." 형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선택할 수 없는 자리에 놓인다는 거니까."
전화를 끊고 나서도 나는 한참 동안 창밖을 바라보았다. 늦가을의 낮은 해가 빌딩 사이로 붉게 걸려 있었고, 그 빛이 사무실 바닥에 길게 늘어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 겨울과 지금이 얼마나 다르면서도 얼마나 닮아 있는지를 생각했다. 그때도 나는 강씨 집안이라는 존재에 밀려 내 선택을 잃었고, 지금도 같은 이름 앞에서 또 한 번 선택권을 빼앗기고 있었다.
책상 위 서류를 다시 펼쳐보았다. 신사업 라인의 개요, 예산 규모, 참여 인력 명단. 낯선 이름들 사이에서 유독 익숙한 이름, 강진하, 총괄 상무. 그 세 글자를 손끝으로 몇 번이나 문질렀다. 지워지지 않았다. 당연했다. 종이 위의 글자는, 사람의 마음처럼 쉽게 지워지는 게 아니었으니까.
퇴근 시간이 지나도 나는 자리를 뜨지 못했다. 사무실에는 나 혼자였고, 형광등 불빛만이 정적을 채우고 있었다. 창밖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고,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지쳐 보였다.
그리고 그날 저녁, 예고도 없이 사무실 문이 열렸다.
"퇴근 안 하십니까." 강진하가 문틀에 몸을 기댄 채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그 서늘한 눈빛에는 이제 어떤 격식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놓은 채, 마치 이 공간이 처음부터 자기 것인 양 자연스럽게 서 있었다.
"강 상무님이 여기 계실 거라고는 생각 못 했네요." 나는 애써 태연하게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심장이 이미 불규칙하게 뛰고 있었다. 손끝이 차가워지는 걸 감추려 책상 위 서류를 괜히 정리하는 척했다.
"전담 디자이너 지정받으셨죠." 그가 사무실 안으로 걸어 들어오며 물었고, 그 질문은 확인이 아니라 통보처럼 들렸다. 구두 소리가 조용한 사무실 바닥에 낮게 울렸다.
"강 상무님이 하신 거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나는 그를 정면으로 마주 보며 대답했다. 목소리에 힘을 실었지만, 그가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그 힘이 조금씩 흩어지는 걸 느꼈다.
"알면서 왜 그렇게 놀란 얼굴을 하고 계세요." 그가 내 앞까지 다가와 서며 낮게 웃었고, 그 웃음소리에는 어딘가 위험한 그늘이 섞여 있었다. "이제부터 자주 뵙게 될 텐데, 그 표정으로는 곤란하죠."
"제가 어떤 표정을 짓든, 그게 상무님이 상관하실 일은 아니죠." 나는 그를 피하지 않고 되받았다. 하지만 목소리 끝이 살짝 흔들렸다는 걸, 그도 눈치챘을 것이다.
"그런가요." 그는 짧게 대답하며 나를 훑어보았다. 시선이 얼굴에서 내려와 손끝에 잠깐 머물렀다가 다시 올라왔다. 그 짧은 시선 하나에도 나는 발끝이 저려오는 걸 느꼈다.
"용건이 그것뿐이면, 저는 이만 퇴근하겠습니다." 나는 가방을 챙기며 그를 지나치려 했다.
그가 팔을 뻗어 문가를 가로막았다. 넓은 어깨가 문틀을 채우듯 서 있었다.
"용건은 아직 안 끝났는데요."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내일부터 시작할 프로젝트 브리핑 일정을, 지금 여기서 정하고 가려고 온 겁니다."
나는 그 순간, 이 재회가 단순한 우연도 단순한 업무 관계도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이 남자가 이미 나를 자신의 손 안에 두겠다고 결심했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서늘했지만, 그 서늘함 아래 무언가 타오르고 있다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무엇보다도 나를 두렵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