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아내가 부른, 옛 여자

2화

차가 강변북로에 오를 때까지도 나는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강물 위로 흩어지는 가로등 불빛이 자꾸만 흔들려 보였다. 눈이 흔들리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저 불빛이 흔들리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은채는 라디오 볼륨을 살짝 낮추며 다시 물었다. "진짜 아무 일 없었어? 로비에서 갑자기 얼음처럼 굳던데." 그 순간 내 손끝이 무릎 위에서 살짝 떨렸다. 나는 그것을 숨기려고 손을 깍지 껴 쥐었다. "아는 사람 같아서." 나는 최대한 무심하게 흘렸다. "근데 아니었어. 착각이었나 봐." "착각?" 은채가 고개를 살짝 돌려 나를 봤다. "너 그런 거 잘 안 헷갈리잖아." "오늘은 좀 그랬나 봐." 내 목소리가 너무 빨리 나왔다는 걸 스스로도 느꼈다. 은채는 잠시 나를 응시하다가, 다시 정면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더 파고들지 않았다. 그녀는 원래 필요 이상의 것을 묻지 않는 사람이었고, 나는 그 성격에 몇 번이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연애 초기에도, 결혼을 결심할 때도, 그녀는 내 과거를 캐묻는 대신 지금의 나를 보고 판단해주었다. 그게 고마워서 몇 번이나 다짐했었다. 이 사람에게는 절대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그날만큼은 그 무심함이 고맙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에게 물어야 했다. 왜 나는 진실을 말하지 않았는가. 집으로 돌아와 씻고 침대에 누웠을 때, 나는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았다. 천장의 무늬가 어둠 속에서 흐릿하게 떠올랐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강태희. 그 이름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관자놀이가 뻐근해졌다. 십일 년 전, 나는 열여덟이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어머니의 도피, 그 뒤를 이은 방황 속에서 나는 약에 손을 댔고, 그 빚을 갚기 위해 유흥업소에 발을 들였다. 얼굴 좀 봐줄 만하다는 이유로 나는 이내 그 바닥에서 이름을 얻었다. 처음엔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거기서는 내가 필요한 존재였으니까. 그리고 그곳에서 강태희를 만났다. 그녀는 나보다 다섯 살 많았고, 이미 사업체를 몇 개나 굴리던 여자였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녀는 다른 손님들과 달랐다. 시선이 집요하지 않았고, 말투에 여유가 있었다. 처음엔 그저 손님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는 나를 고정으로 잡았고, 여덟 달 동안 나는 그녀의 소유물처럼 지냈다. 그녀는 지배적이었지만, 잔인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내 몸을 원했지만 내 존엄을 짓밟진 않았다. 그 차이가 그 바닥에서는 드물다는 걸,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 오히려 어느 날은 나를 붙잡고 이렇게 말한 적도 있었다. "이 짓, 계속할 생각이야? 내가 도와줄 수 있어. 여기서 나갈 방법." 그녀의 눈은 그날따라 흔들림이 없었다. 마치 이미 답을 다 준비해놓고 나를 시험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때 나는 거절했다. 왜였는지는 지금도 명확히 설명할 수 없다. 아마도 그녀의 도움을 받는 것이 또 다른 종속이 될 거라는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혹은 그저, 나 자신이 그 정도의 삶밖에 안 된다고 스스로 못박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내 거절에 화를 내지 않았다. 다만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그래, 알겠어" 하고는 다시는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더 무서웠다. 마치 내 대답을 이미 예상했던 사람처럼. 그렇게 몇 달이 더 지난 뒤, 나는 은채를 만났다. 그녀는 대학생 자원봉사자로 내가 있던 시설에 왔었고, 나는 그녀의 눈빛에서 처음으로 나를 동정하지 않는 시선을 발견했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볼 때 늘 안타까움이나 경멸, 혹은 호기심을 담고 있었다. 은채는 그냥 나를 봤다. 사람으로. 은채는 나를 구했다. 그 이후로 태희와의 관계는 완전히 끝이 났고, 나는 그 시절을 봉인한 채 살아왔다. 이름도 바꾸고, 관계도 정리하고, 심지어 그 동네를 지날 때조차 창밖을 보지 않는 습관을 들였다. 십일 년이면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 시절의 나는 이미 죽고 없다고, 지금의 나만 존재한다고 스스로를 세뇌했다. 그런데 오늘, 그 봉인이 로비 한복판에서 스치듯 벗겨졌다. 강태희는 변하지 않았다. 옷차림도, 눈빛도, 그녀 특유의 여유로운 걸음걸이까지도. 십일 년이라는 시간이 그녀에게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한 것 같았다. 반면 나는 그 짧은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 로비의 조명이 유독 밝게 느껴졌고, 사람들의 목소리가 갑자기 멀어지는 듯했다. 왜 지금이지? 왜 하필 오늘, 이 호텔에서?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정확한 시점이었다. 결혼한 지 삼 년째, 은채와 함께였던 그 순간. 만약 그녀가 정말 우연히 그곳에 있었던 거라면, 세상은 나에게 지독한 농담을 던진 셈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결코 우연을 마주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그 눈은 나를 알아봤고, 동시에 뭔가를 계산하고 있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천장을 노려보다가 결심했다. 이건 우연일 뿐이다. 다시는 마주칠 일 없을 거다. 그리고 은채에게는 절대 말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 생에서 나는 절대로 그 시절을 다시 꺼내지 않을 것이다. 이번 생에서 나는 절대로 은채가 그 시절을 알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 생에서 나는 절대로 강태희라는 이름을 다시 입 밖에 내지 않을 것이다. 몇 번이나 되뇌었다. 마치 그 말을 반복하면 정말로 이루어질 것처럼.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쉽게 끝날 일이 아니라는 것을. 강태희라는 사람은, 내가 아는 한, 무언가를 이유 없이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가 그 로비에 있었던 것도, 그녀가 나를 그렇게 오래 바라봤던 것도, 모두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옆에서 은채가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었다. 그 숨소리를 들으며 나는 다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지만, 마음속 어딘가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다짐이 얼마나 허무한 것이었는지, 나는 사흘 뒤에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흘 동안,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평온한 얼굴로 은채와 식사를 하고, 집안일을 나누고, 함께 저녁 시간을 보내며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이어갔다. 마치 그날 로비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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