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아내가 부른, 옛 여자

1화

호텔 27층, 커튼을 반쯤 걷어둔 창밖으로 강남의 불빛이 흩어지고 있었다. 나는 침대 헤드보드에 등을 붙인 채 숨을 고르고 있었고, 은채는 그 맞은편 안락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와인 잔을 든 손끝을 까딱이고 있었다. 조명은 낮았고, 방 안의 공기는 데워진 채로 가라앉아 있었다. 오늘 밤, 그녀가 원한 건 단순했다. 나를, 다른 사람의 손끝으로.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웃었다. 농담이겠거니 했다. 이런 걸 정말로 원하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은채는 웃지 않았고, 나는 그녀의 눈빛에서 이미 결정이 끝났다는 걸 읽었다. 그 눈빛은 언제나 그랬다. 부탁이 아니라 선언이었다. 이럴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이번엔 거절할 수 있을까. 이번엔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그녀가 원하면 나는 따랐다. 언제나 그래왔다. 그녀가 나를 그 지옥에서 건져 올린 순간부터, 내 몸은 더 이상 완전히 내 것이 아니었다. 그 지옥이라는 게 어떤 모양이었는지, 나는 굳이 다시 떠올리지 않으려 했다. 떠올리면 몸 어딘가가 다시 얼어붙는 기분이 들었으니까. 다만 확실한 건, 은채가 나를 거기서 꺼내준 그날 이후로 나는 그녀에게 진 빚을 갚는 사람처럼 살아왔다는 것이었다. 빚은 갚아도 줄지 않았다. 오히려 매번 이자가 붙는 것 같았다. 남자는 은채가 고른 사람이었다. 이름도 묻지 않았다. 묻는 순간 그 사람이 사람으로 느껴질 것 같았고, 그러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그저 그의 손이 내 어깨를 짚고, 은채의 시선이 방 안 어딘가에서 나를 관통하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그나마 나았다. 눈을 감으면 이곳이 어디인지, 이 손이 누구의 것인지 생각하지 않아도 됐다. 숨이 가빠질 때마다 은채의 숨소리가 함께 가빠지는 걸 들었고, 그것이야말로 이 모든 상황의 유일한 목적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를 만족시키는 것. 그것 하나면 됐다. 몸이 뜨거워지는 것도, 숨이 막히는 것도, 결국 그 하나의 목적을 위한 도구였다. 나는 도구였고, 도구는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다. 끝났을 때, 나는 침대 시트를 끌어당겨 몸을 덮으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장의 무늬가 흐릿하게 번져 보였다. 남자는 옷을 챙겨 조용히 방을 나갔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 소리가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겨우 다시 숨을 쉴 수 있었다. 은채는 아무 말 없이 다가와 내 이마에 입을 맞췄고, 그 입술은 차가웠지만 눈빛만은 뜨거웠다. 만족했어? 나는 묻지 않았다. 물을 필요가 없었다. 그녀의 손끝이 내 뺨을 쓸어내리는 방식만 봐도 알 수 있었으니까. 그 손끝은 늘 이런 순간에만 다정했다. "오늘도 예뻤어." 은채가 낮게 속삭였다. 예뻤다는 말. 이상하게도 그 말을 들으면 안심이 됐다. 잘 해냈다는 뜻이었고, 오늘 밤은 넘어갔다는 뜻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우리는 로비로 내려갔다. 늦은 밤이었지만 호텔 로비는 여전히 사람들로 붐볐고, 대리석 바닥에 반사된 샹들리에 불빛이 눈을 찔렀다. 은채는 발렛 티켓을 내밀며 직원과 몇 마디를 나눴고, 나는 그 옆에 서서 무심히 로비를 훑었다. 습관이었다. 낯선 공간에서 낯선 얼굴들을 눈에 담으며 안심하는 것. 아는 얼굴이 없다는 걸 확인하는 것. 그때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여자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긴 코트를 걸치고, 걸음걸이에 흐트러짐이 없는, 어딘가 익숙한 실루엣이었다. 나는 처음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얼굴이라 생각했다. 저런 실루엣의 여자는 어디에나 있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고개를 돌려 로비를 훑는 순간,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숨이 멎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없는데. 십 년도 더 지난 얼굴이었지만, 그 눈빛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사람을 재는 듯한, 위에서 내려다보는 그 시선. 등줄기를 타고 오래된 냉기가 스멀스멀 올라왔고, 나는 그 자리에서 발이 붙은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십일 년 전, 그 시선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작아졌었다. 무슨 짓을 해도 부족했고, 무슨 말을 해도 틀렸었다. 그 시선 아래에서 보낸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재료 중 하나라는 걸, 나는 부정할 수 없었다. "준호야?" 은채가 내 팔을 붙잡으며 물었다. "왜 그래, 안색이." "아니야. 아무것도." 나는 억지로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목소리가 미묘하게 갈라졌다는 걸 나조차 느낄 수 있었다. 은채는 미간에 잔물결을 그리며 나를 살폈다. 그 눈빛은 방금 전 침대 위에서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탐색. 은채는 늘 이런 식으로 나를 읽었다. 내가 감추려는 것이 있으면, 그 감춤의 모양까지 파악하려 했다. "진짜 아무것도 아니야?" 은채가 다시 물었다. "그냥 좀 어지러워서." 나는 눈을 몇 번 깜빡이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웃음이 제대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행히 그 순간 발렛이 차를 가져왔다는 안내가 들려왔고, 은채는 신경을 그쪽으로 돌렸다. 나는 그 틈에 다시 로비 쪽을 돌아보았다. 여자는 이미 로비 저편, 프런트 앞에서 직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옆얼굴만 보였는데도 확신이 들었다. 저 콧대의 각도, 저 턱을 살짝 치켜드는 습관, 말할 때 입꼬리가 한쪽만 올라가는 방식까지도. 강태희. 그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내 안의 뭔가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 이름과 함께 떠오르는 것들은 죄다 어둡고 좁은 방들이었다. 문이 잠기는 소리, 발소리, 나를 부르는 방식. 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어왔다가, 로비의 불빛 아래에서 순식간에 흩어졌다. 여기는 그때가 아니었다. 여기는 지금이었다. 그런데도 다리가 떨렸다. 차에 올라타서도 나는 계속 창밖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로비의 불빛이 점점 멀어지는데도, 그 여자의 실루엣만은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잔상이 눈두덩 안쪽에 새겨진 것처럼, 눈을 감아도 그 옆얼굴이 떠올랐다. 살아있었구나. 당연한 생각인데도 이상하게 낯설었다. 십 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그 이름을 죽은 사람의 것처럼 취급했다. 다시는 마주칠 일 없는, 봉인된 과거의 조각처럼. 그런데 그 조각이 방금 내 눈앞에서 걸어 나왔다. 여긴 왜. 우연일까. 우연이 아니라면. 은채는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며 나를 살짝 곁눈질했다. 신호를 기다리는 짧은 순간에도 그녀의 시선은 내게서 완전히 떠나지 않았다. "오늘 되게 이상해. 무슨 일 있어?" "아니." 나는 짧게 답했다. "그냥, 좀 피곤해서."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처음으로 은채에게 뭔가를 숨기기 시작했다. 그것이 얼마나 큰 균열의 시작이 될지, 그날 밤의 나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차가 도로로 접어들며 속도를 올렸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가로등 불빛들이 규칙적으로 얼굴을 밝혔다가 지워졌다. 은채는 라디오를 켰고, 낯선 음악이 흘렀지만 나는 그 가사도, 멜로디도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의 장면만이 반복해서 재생되고 있었다. 프런트 앞에 선 강태희의 옆얼굴. 턱을 치켜드는 습관. 나를 재던 그 시선. 이 도시에, 이 호텔에, 왜 그녀가 있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봤을까. 그 질문이 목구멍 안쪽에서 뜨겁게 맴돌았지만, 나는 끝내 소리 내어 묻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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