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다음 날 점심시간, 서준과 태오는 학교 뒤편 계단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계단은 늘 텅 비어 있었다.
급식실에서 멀고 그늘이 져서 아무도 오지 않는 곳이었다.
서준이 일부러 골라둔 자리였다.
서준의 손에는 아직 다 못 먹은 삼각김밥 하나가 들려 있었다.
유일하게 허락받은 간식이었다.
누나들 중 누군가가 며칠 전 영양성분표를 들이대며 허락한 것이었다.
"조건을 정확히 정하자."
"뭘."
"대상은 세 명. 한서은, 오유리, 윤하늘."
서준이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셌다.
태오는 옆에서 스마트폰 게임을 하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화면 속 캐릭터가 요란한 이펙트를 뿜으며 쓰러졌다.
"야, 듣고 있어?"
"듣고 있어. 세 명. 그다음."
"보상은 유혹 한 번당 튀김 한 접시."
"그건 이미 정했잖아."
"확인하는 거야."
서준의 눈이 진지했다.
계약서를 쓰는 사람처럼 냉정한 표정이었다.
학교 앞 튀김집 이름까지 미리 적어두었을 정도였다.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데."
"실패라니?"
"유혹이 안 통하면."
태오가 게임을 멈추고 처음으로 서준을 마주보았다.
액정 화면 위로 캐릭터가 계속 죽어나가고 있었다.
"그럴 리 없어."
"왜 그렇게 확신해."
"네 얼굴 봤잖아."
서준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칭찬인지 조롱인지 헷갈리는 말이었다.
'이게 지금 놀리는 거야, 아니면 진심인 거야.'
속으로 따져봤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진짜야?"
"뭐가."
"내 얼굴이 그렇게 먹힌다고?"
"먹히긴 하는데 성격이 문제지."
"성격이 왜."
태오가 어깨를 으쓱했다.
더 설명할 필요 없다는 표정이었다.
서준은 반박하려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페널티도 정하자. 실패하면……"
"실패하면 튀김값 두 배로 갚아."
"콜."
둘은 다시 손을 맞부딪혔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계약이 성립되는 순간이었다.
서준은 가방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어젯밤 침대에 엎드려 몰래 작성한 것이었다.
불을 끄고 스마트폰 조명만 켠 채, 문 쪽에 귀를 세워두고 쓴 종이였다.
누나들 중 누구라도 방문을 두드리면 바로 이불 속에 숨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조항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1. 대상은 한서은, 오유리, 윤하늘 3인.
2. 유혹 성공 1회당 튀김 1접시.
3. 실패 시 튀김값 2배 상환.
4. 작전 수행에 필요한 자유시간 주 3회 보장.
태오가 종이를 낚아채듯 가져가 읽었다.
네 번째 조항에서 그의 눈썹이 올라갔다.
"이거 뭐야."
"뭐가."
"자유시간 주 3회."
서준의 시선이 슬쩍 옆으로 돌아갔다.
작은따옴표 속 생각이 스쳤다.
'들켰다.'
"그게 왜."
"이거 언제 넣었어?"
"필요하니까 넣었어."
태오가 종이를 흔들며 웃었다.
장난기 가득한 웃음이었다.
"이서준, 너 그냥 밖에 나가고 싶어서 이거 끼워 넣은 거지."
"아니야."
"눈빛이 흔들리는데."
"안 흔들려."
서준의 눈동자가 사실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부정할수록 더 의심스러워지는 상황이었다.
그는 삼각김밥 포장지를 괜히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솔직히 말해봐."
"……."
"이서준."
"……."
"눈 안 마주치는 거 다 티 나."
서준은 결국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궜다.
어깨가 축 늘어졌다.
겁먹은 토끼처럼 잔뜩 움츠러든 모습이었다.
"누나들 감시가 너무 심해. 숨 막혀 죽을 것 같아."
"그래서 이 거래에 낑겨 넣은 거야?"
"낑겨 넣은 게 아니라 정당한 조항이야."
"낑겨 넣은 거지."
"정당한 조항이라고."
"낑겨 넣은 거잖아."
서준이 뭐라 더 반박하려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더 우겨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았다.
태오가 낄낄거리며 종이에 서명을 했다.
서준도 마지못해 서명을 추가했다.
종이 아래쪽에 이름 두 개가 삐뚤빼뚤하게 나란히 적혔다.
"근데 진짜 어떻게 나갈 거야."
"그게 문제야."
서준의 표정이 다시 진지해졌다.
"수아 누나가 요즘 눈치가 빨라졌어. 어젯밤에도 하필 그때 방문을 두드리더라고."
"위험했겠네."
"위험했지."
서준은 아직도 어젯밤의 기억이 생생했다.
불빛 새는 걸 막으려고 이불로 몸을 다 덮고 종이를 쓰던 참이었는데, 갑자기 문 밖에서 수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준아, 자?"
그 한마디에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숨이 턱 막혀서 대답도 제대로 못 하고, 종이를 베개 밑에 쑤셔넣은 뒤에야 겨우 "네, 자요!"라고 외쳤었다.
목소리가 너무 크게 나와서 오히려 더 의심스러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들켰으면 어떻게 됐을까."
"덤벨."
"덤벨?"
"덤벨로 맞았겠지."
태오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준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다.
중학교 때 몰래 게임기를 숨겼다가 수아에게 걸려서 정말로 덤벨로 어깨를 맞은 적이 있었다.
그때의 통증이 아직도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방구석에 놓여 있던 삼 킬로짜리 덤벨이, 그날 이후로 서준에게는 무기로 각인되어 버렸다.
"그 덤벨 아직도 그 자리에 있지?"
"있어."
"수아 누나 방 앞에?"
"어. 문 열면 바로 보여."
태오가 잠시 침묵하다가 헛기침을 했다.
농담이라기엔 너무 현실적인 이야기였다.
"어쨌든 이 계약, 우리끼리만 아는 거야."
"당연하지."
"누나들이 알면 끝장이야."
"끝장 그 이상이야. 아마 우리 둘 다 방에 감금될걸."
"감금은 좀……"
"덤벨도 두 개씩 나올걸."
서준이 종이를 다시 접어 가방 깊숙이 넣었다.
가방 안쪽, 필통과 노트 사이 가장 안 보이는 틈에 밀어넣었다.
누나들이 가방 검사를 할 때도 거기까지는 손을 넣지 않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근데 진짜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
"세 명 다 성공하면 튀김 세 접시야?"
"당연하지."
"한 번에 다 먹을 수 있어?"
"먹어야지. 계약이잖아."
태오가 씩 웃었다.
서준도 따라 웃었다.
잠깐이지만 계단 위의 공기가 가벼워졌다.
그때 계단 위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뭘 그렇게 숨겨."
서준의 손이 얼어붙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소리가 몸속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고개를 들자 리안이 그 자리에 서서 팔짱을 낀 채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표정에서 어떤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오래전부터 거기 서 있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