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향한 곳은 언제나처럼 부엌이었다. 식탁 위에 낯선 상자 하나가 놓여 있는 걸 발견한 건 물을 마시려고 냉장고 문을 열던 순간이었다. 짙은 남색 벨벳으로 감싸인, 손바닥만 한 크기의 상자였다. 매끈한 벨벳 표면이 아침 햇살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는데, 그 존재감이 이 삭막한 부엌에는 어울리지 않게 낯설었다.
나는 냉장고 문을 도로 닫고, 조심스럽게 다가가 상자를 두 손으로 감싸 들었다. 생각보다 무게가 있었다. 뚜껑을 여는 손끝이 살짝 떨렸다. 딸깍,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리고, 그 안에서 은은한 광택을 내는 은세공 도구 세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밀한 조각용 니퍼와 여러 굵기의 줄, 손잡이가 나무로 된 소형 토치, 그리고 은판을 두드리는 데 쓰는 자그마한 망치까지—보석 디자인을 취미로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탐낼 만한 물건들이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각각의 도구는 얇은 천으로 하나씩 감싸여 있었고, 그 천을 걷어낼 때마다 도구의 표면이 반짝, 하고 빛을 반사했다.
"이게 뭐예요." 마침 주방으로 들어온 강태오에게 묻자, 그는 커피포트로 다가가 커피를 따르며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셔츠 소매를 접어 올린 팔뚝이 아침 햇살에 그늘을 만들었다.
"취미로 한다며. 제대로 된 걸로 해야지." 그가 커피잔을 든 채 무심하게 대답했다. 마치 지나가는 말로 날씨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건조한 어조였다.
나는 상자를 손에 든 채, 심장이 이상하게 뛰는 걸 느꼈다. 도구 하나하나를 손끝으로 만져보다가, 문득 어릴 적 생일마다 아버지에게서 받았던 것이 얼마 안 되는 현금뿐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취미가 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물어봐준 적조차 없었던 사람. 이런 세심한 선물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에게서도, 그 누구에게서도.
손끝으로 니퍼의 매끈한 손잡이를 쓸어보며 나는 콧잔등이 시큰거리는 걸 참았다. 목이 메어오는 걸 억지로 삼키며 겨우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그는 대답 없이 커피를 마시며 식탁 위에 놓인 신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신문을 펼치는 종이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 무심함이 서운하게 느껴지려는 찰나, 나는 그 뒤에 숨겨진 어떤 관심을 발견한 것만 같아 마음이 부풀었다. 도구 세트를 산다는 건, 적어도 내가 뭘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그가 지켜보고 있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날부터 나는 작업실 구석에 틀어박혀 새로운 도구들로 반지를 하나 만들기 시작했다. 은판을 자그마한 망치로 두드려 얇게 펴고, 원하는 모양대로 니퍼로 잘라내고, 줄로 거친 표면을 다듬는 그 과정 하나하나가 손끝에 고스란히 감각으로 남았다. 토치로 은을 살짝 달구어 붙일 때는 숨을 죽이고 온도를 가늠했다. 손등에 땀이 배어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몰두했다. 은판을 두드리고, 조각하고, 다듬는 그 과정 속에서 나는 오랜만에 살아 있다는 감각을 느꼈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른 채 창밖이 어두워질 때까지 앉아 있던 날도 있었다.
***
며칠 후, 그는 저녁 자리에서 지나가듯 말했다. 스테이크를 자르던 그의 손이 잠시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다음 주에 소은이 결혼식 있어."
숟가락을 든 손이 멈췄다. 국물이 숟가락 끝에서 그대로 식탁에 떨어질 뻔했다. "소은이가 누구예요." 물었을 때, 그는 잠시 나를 응시하더니 대답 없이 시선을 돌렸다. 포크로 접시 위의 채소를 괜히 이리저리 옮기는 손짓이 눈에 들어왔다. 그 짧은 정적 속에서 나는 뭔가 잘못된 걸 건드렸다는 걸 직감했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조심스러웠다. "학교 후배야."
그 말투가 이상하게 걸렸다. 단순한 후배 이야기라면 그렇게 신중하게 말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이름 하나를 꺼내는 데 저렇게 뜸을 들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원래 필요한 말만 하고, 필요 없는 말은 아예 입 밖에 내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더 묻고 싶었지만, 그의 표정이 이미 대화를 닫아버린 걸 보고 입을 다물었다. 포크를 쥔 그의 손가락 관절이 미세하게 힘이 들어가 있는 게 보였다.
"결혼식 가시는 거예요?" 그래도 한마디는 더 물어야 했다. 이상하게 목이 탔다.
"응." 짧은 대답. 더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저녁 식사는 그렇게 어색한 침묵 속에 끝났다. 그릇을 치우는 내 손이 평소보다 느렸다. 식기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만이 넓은 다이닝룸을 채웠다.
그날 밤, 그는 서재에서 늦게까지 나오지 않았다. 침실 시계가 열두 시를 넘긴 걸 확인하고도 서재 쪽에서는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침실에서 뒤척이다 결국 물을 마시러 부엌으로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를 죽이려 애쓰며, 맨발로 카펫을 밟는 감각에 신경을 집중했다.
부엌으로 향하던 길, 서재 문틈으로 흘러나오는 낮은 목소리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문은 완전히 닫히지 않은 채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정도의 틈이 벌어져 있었고, 그 틈으로 노란 불빛과 함께 그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통화 중인 그의 음성이었다.
"괜찮아. 그날 잠깐 얼굴만 보고 올게." 부드러운 어조였다. 내게는 한 번도 들려준 적 없는 종류의 다정함이었다. 낮게 깔린 목소리 끝에 웃음기가 묻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서, 손끝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물잔을 든 손가락 마디마디가 뻣뻣하게 굳어가는 것 같았다. 심장이 옥죄어오고,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문 너머에서 다시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걱정하지 마. 다 정리됐어." 무엇이 정리됐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기운이 올라왔다.
저 목소리의 상대가 누구인지 나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방금 저녁 식사 자리에서 나온 이름과 무관하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확신처럼 굳어졌다. 소은이라는 이름, 그 이름을 말할 때의 조심스러움, 그리고 지금 이 다정한 통화 목소리. 조각들이 하나씩 맞춰지는 것 같았는데, 완성된 그림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미치도록 알고 싶었다.
부엌으로 돌아와 정수기 앞에 서서 물잔을 채우는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물이 잔 밖으로 조금 흘러 손등을 적셨다. 차가운 감각이 오히려 정신을 붙잡아주었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그가 건넨 작은 선물 하나에 마음이 부풀었던 내가, 지금은 그 선물의 의미가 순식간에 의심스러워지는 걸 느꼈다.
어쩌면 그 온기라는 것도, 나를 다루기 쉽게 만들기 위한 또 다른 방식의 관리였던 게 아닐까. 도구 세트를 건네며 어깨를 으쓱였던 무심한 태도. 그것이 진짜 관심이 아니라, 곁에 잘 붙어 있게 만들기 위한 계산이었다면. 손안에 쥐고 있는 물잔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물잔을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 잠긴 정원의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흐릿하게 걸린 달빛이 정원 바닥에 얼룩진 그림자를 만들었다. 아버지가 이 결혼을 정리해준 대가로 무엇을 받았는지, 강태오가 나와 결혼한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방금 들은 저 통화 속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그 모든 물음들이 한꺼번에 밀려와 나를 짓눌렀다.
숨을 크게 들이쉬어보려 했지만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왔다. 이 집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나는 벌써 이 남자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에 이렇게까지 흔들리고 있는 걸까.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에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서재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급히 물잔을 들고 계단으로 향했지만, 이미 늦었다. 발소리가 복도를 따라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 오르는 것 같았다.
그가 복도 끝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눈빛으로. 조금 전까지 다정하게 흘러나오던 그 목소리의 주인과 지금 나를 응시하는 이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그의 얼굴엔 아무런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안 자고 뭐 해." 그가 물었다. 짧고 건조한 물음이었지만, 나는 그 안에 숨겨진 것이 무엇인지 가늠할 수 없어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