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재벌가의 씨받이

2화

어릴 적 우리 집은 늘 조용했다. 조용하다는 건 평화롭다는 뜻이 아니라, 누구도 함부로 소리를 낼 수 없었다는 뜻이었다. 아버지 노석준의 서재 앞을 지날 때면 나는 신발을 벗고 발끝으로 걸었고, 그가 부르기 전까지는 절대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계단을 오를 때도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벽에 손을 짚고 한 칸씩 조심스레 디뎠고, 물을 마시러 부엌에 갈 때도 컵을 내려놓는 소리조차 죄를 짓는 것처럼 느껴져서 두 손으로 감싸 살며시 놓았다. 그런 규칙을 누가 정해준 적도 없었는데, 나는 태어날 때부터 그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지켰다. 엄마는 내가 여덟 살 때 세상을 떠났다. 병원 냄새와 소독약 냄새가 뒤섞인 복도에서 아버지가 의사와 나누던 대화를 나는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형광등이 깜빡이던 그 복도, 차가운 리놀륨 바닥의 냉기가 양말을 뚫고 발바닥까지 올라오던 감각까지도. "그럼 앞으로 얼마나" 하고 묻던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슬픔보다 계산이 더 짙게 배어 있었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듣고서야 어린 마음에도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슬픔이란 원래 저런 식으로 말해지는 게 아니라는 걸, 그때는 설명할 수 없었지만 온몸으로 느꼈다. 장례식이 끝난 다음 날, 아버지는 나를 서재로 불러 앉히고는 말했다. "이제부터 넌 흐트러지면 안 돼." 그게 전부였다. 위로도, 안아줌도 없었다. 나는 그날 검은 상복을 입은 채로 서재 의자에 앉아 아버지의 말을 기다렸다. 혹시나 다른 말이 이어질까 싶어서. 하지만 그는 서류를 뒤적이며 고개조차 들지 않았고, 나는 그것으로 대화가 끝났음을 알고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왔다. 그 후로 나는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 위해 애썼다. 성적표를 받아 올 때마다 손끝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걸 참으며 서재 문을 두드렸고, 아버지는 성적표를 훑어보며 늘 같은 말을 했다. "이 정도로는 부족해." 한 번도 충분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전교 일 등을 해도, 대회에서 상을 받아도 돌아오는 말은 똑같았다. 나는 언젠가부터 성적표를 내밀기 전에 먼저 숫자를 세어보는 버릇이 생겼다. 몇 점이면 될까, 몇 등이면 아버지가 웃어줄까. 그 답은 끝내 찾지 못했다. 나는 점점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누군가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강태오와의 결혼이 결정되었을 때, 아버지가 "이보다 좋은 자리는 없다"고 말했을 때, 나는 반발하지 않았다. 오히려 안도했다. 처음으로 내가 아버지에게 쓸모 있는 존재가 된 것 같았으니까. 아버지는 그날 처음으로 내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손바닥의 온기가 낯설어서, 나는 그 순간을 몇 번이나 다시 떠올렸는지 모른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얼마나 서글픈 안도였는지, 그때는 몰랐다. *** 밤이 되면 강태오는 어김없이 내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배 속이 뒤틀리는 긴장을 느꼈다. 심장이 갓 잡은 활어처럼 펄떡였고, 이불을 쥔 손끝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처음 몇 번은 부부니까 당연한 거라고, 애정의 표현일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올 때 풍기는 옅은 담배 냄새와 겨울바람처럼 시리면서 묵직한 머스크 향을 맡으며, 나는 이것이 결혼이라는 이름의 자연스러운 절차라고 믿으려 애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그것이 애정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는 내 눈을 보지 않았다. 손길에는 조급함도, 다정함도 없었고, 오직 정해진 순서를 처리하는 덤덤한 기계 같은 손짓뿐이었다. 불을 끄고, 다가오고, 끝내고, 다시 등을 돌리는 그 순서는 마치 매뉴얼을 따르는 것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끝나면 그는 바로 몸을 돌려 눕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어둠 속에서 그의 넓은 등을 바라보며, 이 관계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그가 있었지만, 그 등은 내가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졌다. "애 언제 생길까요." 어느 날 무심코 던진 내 말에 그가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고개를 돌려 나를 응시하는 눈빛이 순간 서늘하게 식었다. 나는 그 시선에 옴짝달싹 못 하고 얼어붙었다. "때 되면 생기겠지." 그 짧은 대답 속에 담긴 냉소를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에게 이 결혼은 애초에 후계자를 위한 절차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내가 이 집에서 어떤 자리에 놓여 있는지를 분명히 깨달았다. 아내가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한 도구였다. 나는 매일 밤 같은 시간, 같은 방식으로 되풀이되는 그 무의미한 반복 속에서 서서히 무너져갔다. 아침이 되면 거울 속 내 얼굴이 조금씩 낯설어지는 걸 발견했다. 눈 밑이 거뭇하게 죽어가고, 입술은 핏기 없이 하얗게 말라갔다. 볼은 홀쭉해졌고, 눈동자에는 예전의 총기가 사라져 있었다. 마치 물 밖으로 던져진 물고기처럼, 나는 매일 조금씩 말라가고 있었다. 죽을 것 같아. 그런 나를 돌아봐 주는 사람은 없었다. 강태오는 아침이면 여느 때와 다름없이 넥타이를 매고 나갔고, 나는 침대에 남아 이불을 끌어안은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가 현관문을 닫는 소리, 차 시동을 거는 소리가 멀어지고 나면 집 안에는 오직 정적만이 남았다. 그 정적이 어릴 적 우리 집의 그것과 너무나 닮아 있어서, 나는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이 집에서 나는 대체 무엇으로 존재하고 있는 걸까. 아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지만, 어쩌면 나는 그저 씨받이만도 못한 무언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날 오후, 전화벨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하니 사촌 민지원이었다. 목소리가 어딘지 급하고 흔들려 있었다. "유리야, 큰일 났어. 현우씨 회사에" 하고 시작된 말끝이 뚝 끊겼다. 나는 수화기를 쥔 손끝이 순간 얼어붙는 걸 느끼며, 무슨 일이냐고 다급하게 되물었다. 지원의 숨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거칠게 들려왔고, 뭔가를 말하려다 삼키는 듯한 소리가 반복되었다. "지원아, 말해봐. 무슨 일인데."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으며 재촉했다. 하지만 지원은 쉽게 다음 말을 잇지 못했고, 그 침묵이 어떤 불길한 예감을 몰고 오는 듯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