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재벌가의 씨받이

4화

"그렇게 애가 갖고 싶으면." 그가 내 어깨에서 손을 떼며 말을 이었다. "당신 몸이나 잘 챙겨." 순간 나는 숨이 턱 막히는 걸 느꼈다. 방금까지 흐느끼던 나를 다독이는 듯했던 그 손길이, 사실은 오직 하나의 목적을 향한 관리였다는 걸 그 한마디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깨에 남아 있던 온기가 순식간에 식어버리는 게 느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 손이 나를 위로하는 손이라고 믿었던 내가 바보 같았다. 눈물이 뺨에서 마르는 느낌과 동시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걸 느꼈다. 목덜미부터 시작된 서늘한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대리모구나. 자식을 위한 도구. 아내라는 이름을 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한 존재. "지금 그게……"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손끝이 파르르 떨렸고, 나는 그 떨림을 감추려 두 손을 맞잡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등을 돌려 책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넓은 어깨가 서류 더미 앞으로 향하는 걸 보면서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것 같았지만, 그 앞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현우씨 회사는 다시 살펴볼게." 그가 던진 마지막 말은 나에게 주는 위로가 아니라, 나를 다루는 방식의 일부였다는 걸 나는 그 서늘한 뒷모습에서 읽어냈다. 서류를 넘기는 손끝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방금 전 내가 흘린 눈물 따위는 그에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 문을 닫는 손이 떨렸다. 문 너머로 들리는 그의 숨소리조차 없었다. 그저 서류 넘기는 소리만이 방 안을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로등 불빛이 유리창에 부딪혀 지나갈 때마다 내 얼굴이 겹쳐 보였고, 그 얼굴은 낯설 만큼 텅 비어 있었다. 신뢰와 공포가 뒤섞인 기묘한 감정이 가슴 한복판에 웅덩이처럼 고여 있었다. 그가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줬다는 사실과, 그것이 결국 나를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대했다는 사실이 동시에 존재했다. 어느 쪽이 진실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집에 도착해 침대에 누웠을 때도 그 말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당신 몸이나 잘 챙겨. 그 말을 몇 번이고 되새기다가, 나는 결국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눈을 감았다.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 며칠 뒤, 강일홀딩스 창립 기념 행사가 열렸다. 나는 원치 않았지만 아내로서 참석해야 했고, 드레스룸에서 몇 시간을 들여 준비했다. 헤어 담당자가 머리카락 한 올까지 매만지고, 메이크업 담당자가 얼굴에 몇 겹의 화장품을 덧입히는 동안 나는 거울 속 낯선 여자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저 사람이 정말 나인가 싶을 정도로 완벽하게 꾸며진 얼굴이었다. 로비에 들어섰을 때 낯선 시선들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사교계 특유의 웃음 뒤에 숨은 평가하는 눈빛들, 노석준 회장의 딸이자 강태오의 아내라는 타이틀만으로 나를 재는 눈들이었다. 나는 그 시선들 사이를 지나가며 등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마치 진열장 안에 놓인 물건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한쪽 구석에서 나는 몇몇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를 우연히 들었다. "저 여자가 그 노석준 딸이라며. 후계자 낳으라고 데려온 거라던데." 낮게 웃는 소리와 함께 이어진 그 말에 나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끼며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발걸음이 빨라졌고, 손에 쥔 클러치백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등 뒤에서 계속 이어지는 웃음소리가 마치 나를 향한 손가락질처럼 느껴졌다. 그때 누군가 내 팔을 가볍게 잡았다. 강태오였다. "이쪽으로." 그가 나를 이끌며 사람들 사이를 벗어나 테라스로 향했다. 그의 손이 내 팔을 감싸는 느낌이 생각보다 단단했다. 밤바람이 차갑게 뺨을 스쳤고, 나는 그의 손이 여전히 내 팔을 붙잡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테라스에는 사람이 없었고, 저 아래로 도시의 불빛이 흩어져 있었다. "저 사람들 말, 신경 쓰지 마." 그가 낮게 말했다. 처음으로 들어보는 종류의 배려였다. "왜 그렇게 신경 써줘요." 내가 묻자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내 아내니까"라고 짧게 대답했다. 그 짧은 대답 속에 담긴 뜻을 나는 몇 번이고 곱씹었다. 그 말이 진심인지 예의상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가슴이 뛰는 걸 느끼며 얼른 시선을 돌렸다. 콧잔등이 시큰거렸다. 바람이 다시 불어와 그의 향이 스쳤다. 겨울바람처럼 시리면서도 묵직한 머스크 향. 그 향을 맡을 때마다 나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놓이는 기분이 들었다. 위협적이라고만 생각했던 그 사람에게서 어느 순간부터는 안전함을 느끼고 있다는 게, 스스로도 우스웠다. "들어가자." 그가 먼저 몸을 돌리며 말했다. 나는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뒤따라 걸었다. 그날 밤, 그는 처음으로 나를 위해 잔을 채워주었다. 술잔을 건네는 손끝이 스치듯 내 손가락에 닿았고, 나는 그 짧은 접촉에 괜히 심장이 크게 뛰었다. 사람들 앞에서 그는 자연스럽게 내 허리에 손을 얹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손짓이었다. 누군가 우리를 향해 다가와 인사를 건네면 그는 짧게 대답하면서도 내 허리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두 분이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누군가의 말에 나는 어색하게 웃었고, 그는 별다른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 무심한 반응조차도 나에게는 뭔가 다르게 느껴졌다. 작은 몸짓들이었지만, 나는 그것들이 쌓여 어떤 착각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걸 느꼈다. 어쩌면 이 사람도 나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어쩌면 처음의 그 냉담함은 그저 서로에게 적응하는 시간이었던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이 우습기도 했지만, 나는 그 작은 온기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누군가에게 존중받는 감각이었으니까. 사람들 앞에서 흘러가는 대화 속에서도 나는 그의 손이 내 허리에 있다는 사실만을 계속 의식했다. 다른 어떤 말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행사가 끝나갈 무렵, 나는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이 낯설었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완벽하게 꾸며진 얼굴로 웃고 있는 여자. 그 여자가 정말 나인지, 아니면 그저 강태오의 아내라는 역할을 연기하고 있는 배우인지 나조차 헷갈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는 평소와 다르게 먼저 말을 걸었다. "요즘 뭐 하고 지내." 그 질문이 너무 뜻밖이라 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몇 초간의 침묵 끝에 그가 다시 나를 흘깃 보았을 때에야 나는 그 질문이 진짜였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내 취미 이야기를 꺼냈다. "보석 디자인 좀 해요. 그냥 취미로."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이런 사소한 이야기를 그에게 하는 게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흘깃 나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한마디뿐이었다. 더 이상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고, 차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불빛들이 그의 옆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반응이 별거 아닌 것 같았지만, 나는 그날 밤 오래도록 그 짧은 관심의 온도를 곱씹으며 잠들지 못했다. 어쩌면 정말로 이 사람과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작은 기대가 마음 한구석에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 기대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