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그날 오후, 소민은 오현석과 함께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점심시간이 지난 애매한 시각이라 카페 안은 한산했고, 창가 자리에는 오후의 햇살이 비스듬히 내려앉아 테이블 위 유리컵을 투명하게 반짝이게 만들었다. 낮은 재즈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소민은 아이스커피 잔의 물방울을 손끝으로 닦아내며 방금 전 강도현과 나눴던 대화를 천천히 풀어 놓았고, 오현석은 팔을 테이블 위에 걸친 채 그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미간을 좁히고 귀를 기울였다.
"그러니까, 이사라는 사람이 즉석에서 거래를 제안했다는 거지." 오현석이 팔짱을 낀 채로 정리하듯 되묻자, 소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명함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명함의 매끈한 표면이 카페 조명 아래에서 은은하게 빛났고, 그 위에 새겨진 강도현이라는 이름 세 글자가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조건도, 금액도 다 자기가 정해놓고 나한테는 승인만 받으려는 것 같더라고요." 소민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하자, 오현석은 명함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도윤 씨 형이라는 게 실감이 안 나네. 완전히 다른 종족 같은데." 그가 가볍게 말을 던졌지만, 소민은 그 말속에서 진짜 걱정이 섞여 있다는 걸 느꼈다.
"어떤 사람이었는데. 눈빛이나, 말투 같은 거." 오현석이 다시 물었고, 소민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차가운데... 계산적이라기보다는, 이미 다 계산이 끝난 사람 같았어요. 나한테 뭘 물어보는 게 아니라, 확인만 하려는 것처럼." 소민의 대답에 오현석의 표정이 살짝 굳었고, 그는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말을 아꼈다.
"그런 사람들 특징이 그거야. 상대방 대답이 정해져 있다고 믿는 거." 오현석이 낮게 중얼거리듯 말하자, 소민은 그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불편하면 안 해도 돼. 일요일 저녁 나랑 있기로 한 거, 그거 우선이니까." 오현석이 소민의 손을 가볍게 감싸 쥐며 말했고, 그 손의 온기가 소민의 마음을 조금 가라앉혀 주었다.
그의 손바닥은 늘 그렇듯 따뜻했고, 소민은 그 온도에 기대듯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런데, 오히려 그게 더 신경 쓰여요. 우리 일요일 약속을 그 사람도 알고 있었거든요." 소민이 낮게 대답하자, 오현석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그 정도까지 알아봤다고?" 그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고, 소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명함을 다시 손에 쥐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알고 있다는 걸 굳이 티 냈어요. 그게 더 이상하잖아요." 소민의 목소리에 옅은 불안이 스쳤고, 오현석은 그 불안을 감지한 듯 테이블 위에 놓인 소민의 손을 다시 한 번 꾹 잡았다.
"우리 사이에 낄 사람 없어. 걱정하지 마." 그가 단호하게 말했지만, 소민은 왜인지 그 말이 완전히 마음에 자리 잡지 못한다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카페를 나서면서도 소민은 명함을 가방 깊숙이 넣지 않고 코트 주머니에 넣었는데, 그건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조심스러움 때문이었다.
***
그날 저녁, 소민의 휴대폰이 낯선 번호로 울렸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 저녁을 준비하던 중이었고, 가스레인지 위 냄비에서 국물이 끓어오르는 소리와 함께 휴대폰 진동이 부엌 식탁 위에서 요란하게 울렸다. 소민은 손을 닦고 화면을 확인했는데,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강도현 이사님 비서, 박기준입니다. 편하신 시간에 통화 가능하실지요.] 짧은 문자였지만, 그 정중함 이면에는 거절을 상정하지 않은 확신이 배어 있었다.
소민은 문자를 몇 번이나 다시 읽으며 잠시 망설였다. 가스레인지 불을 줄이고, 냄비 뚜껑을 닫은 뒤, 소민은 거실로 자리를 옮겨 소파에 앉았다.
통화 버튼을 누르기 전, 소민의 손끝이 잠시 허공에서 머뭇거렸다. 이 전화를 받는 순간부터 뭔가가 시작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소민이 통화 버튼을 누르자, 박기준의 사무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사님께서 일요일 저녁으로 조정해달라는 요청을 확인하셨습니다. 다만 저녁 이후 시간에 대해서는 조금 더 유동적으로 협의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협의라는 게, 정확히 뭘 의미하는 거죠." 소민이 담담하게 되묻자, 박기준은 잠시 뜸을 들인 뒤 대답했다. "저녁 이후의 시간까지 함께해 주시길 원하십니다. 물론 그에 맞는 조건도 별도로 책정될 겁니다."
소민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저녁 이후라는 게 구체적으로 몇 시부터 몇 시까지인지, 무엇을 함께한다는 것인지, 아무것도 명시되지 않은 채 그저 '유동적'이라는 단어로 뭉뚱그려진 그 제안이 오히려 더 불편했다.
"몇 시까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소민이 다시 물었고, 박기준은 이번에도 곧바로 답하지 않고 잠시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그건 이사님께서 그날 상황에 맞춰 조정하고 싶어 하십니다. 다만 대략적인 시간대는 저녁 여덟 시부터 시작해서, 필요에 따라 연장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필요에 따라 연장될 수 있다.' 소민은 그 문장을 속으로 되뇌며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겨우 참았다.
소민은 창밖으로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를 바라보며, 잠시 말을 아꼈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고, 그 풍경을 바라보는 소민의 눈빛에는 알 수 없는 무게가 서려 있었다.
오현석과의 약속은 이미 저녁 식사로 한정된 것이었고, 그 이후의 시간이라면 사실 특별히 겹칠 일이 없었다. 하지만 소민의 마음에 걸리는 것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이 관계가 어디까지 확장될지 가늠할 수 없다는 불안함이었다.
'이 사람은 처음부터 나한테 선택권을 준 적이 없어.' 소민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이 거래를 완전히 거절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해야 했다.
"좋아요, 그렇게 하죠. 대신 조건은 명확하게 서면으로 정리해 주세요." 소민이 마침내 답을 내놓자, 박기준의 목소리에 옅은 안도가 스쳤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만 더요." 소민이 덧붙였다. "그날 저녁 여덟 시 이후에, 정확히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하게 되는지, 사전에 알려주셨으면 해요. 아무것도 모른 채로 움직이고 싶지는 않거든요."
"확인 후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박기준의 대답은 여전히 사무적이었지만, 그 안에는 이 요청이 이미 예상됐다는 듯한 여유가 묻어 있었고, 소민은 그 여유가 오히려 더 신경에 거슬렸다.
전화를 끊은 소민은 명함을 서랍 속에 밀어 넣으며 짧게 숨을 내쉬었다.
부엌에서는 아까 줄여둔 냄비의 국물이 여전히 은근하게 끓고 있었고, 그 소리만이 거실의 정적을 채우고 있었다.
일요일 저녁이라는 조건을 제시한 것은 분명 그녀 자신이었지만, 그 조건이 도현의 손에서 얼마나 다르게 재단될지, 소민은 그 답을 아직 알지 못했다.
소민은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처음 명함을 받았을 때만 해도 이 정도로 깊이 얽힐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이미 저녁 여덟 시 이후의 시간까지 협상 테이블에 오른 상태였다.
다만 창밖의 도시 불빛을 바라보며, 소민은 이 거래가 단순한 저녁 시간의 매매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을 지울 수 없었고, 그 예감의 무게가 그녀의 어깨를 조용히 짓눌렀다.
그리고 그 순간, 휴대폰이 다시 짧게 울렸다. 발신자는 박기준이었고, 화면에 뜬 문자 미리보기 첫 줄만으로도 소민의 손끝이 다시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