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일요일만 당신 겁니다

3화

소민은 화장실 문을 닫아걸고 세면대 앞에 선 채로, 손에 쥔 명함을 다시 한 번 눈앞으로 들어 올렸다. 차가운 조명 아래에서 명함의 흰 바탕이 유난히 선명하게 빛났고, 그 위에 새겨진 글자들은 마치 도장을 찍듯 또렷했다. [도현그룹 이사 강도현.] 이사라는 두 글자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소민의 숨이 짧게 멈췄고,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명함의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종이의 질감마저 예사롭지 않았다. 두껍고 매끈한 재질이 손끝에 닿을 때마다, 이 명함 한 장의 값이 자신이 오늘 하루 받을 페이보다 비쌀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도현그룹이라면, 소민도 뉴스에서 몇 번 스치듯 들어본 이름이었다. 유통과 물류, 최근에는 게임 산업까지 손을 뻗친 대기업이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그 정점에 이렇게 이른 나이의 남자가 서 있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휴대폰을 꺼내 이름을 검색하자, 화면 가득 그의 사진과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에 계열사 세 곳을 흑자로 돌려세운 냉철한 경영자, 언론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는 비밀스러운 후계자, 사석에서는 극단적으로 통제적인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는 기사 한 줄까지. 사진 속 그는 늘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서늘한 눈매와, 흠 하나 없이 재단된 수트 위로 곧게 뻗은 어깨선이, 마치 그 자체로 하나의 경고문처럼 소민의 눈에 박혔다. 기사 하단에는 그가 협상 테이블에서 상대를 몰아붙였다는 후일담이 짧게 덧붙어 있었고, 소민은 그 문장을 두 번 읽고 나서야 휴대폰 화면을 어두워지도록 내버려 두었다. 소민의 손끝이 화면을 넘기는 동안, 마음속 어딘가에서 조용히 경계심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이런 사람이 나한테 무슨 볼일이 있어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던 소민은, 흐트러진 앞머리를 대충 정리하고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이대로 화장실에 오래 머물러 있는 것도 이상하게 보일 것 같았고, 그렇다고 저 자리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워지지도 않았다. *** 라운지로 돌아온 소민은 이미 자리를 지키고 있던 도현과 다시 눈을 마주쳤는데, 그의 시선은 그녀가 화장실에서 무엇을 확인하고 왔는지 이미 짐작하고 있다는 듯 여유로웠다. 창밖으로 비치는 도시의 불빛이 그의 등 뒤에서 흐릿하게 번지고 있었고, 그 빛을 배경으로 앉은 도현의 실루엣은 라운지 안의 다른 어떤 손님보다도 짙은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검색해 보셨나 봅니다." 도현이 담담하게 말을 건네자, 소민은 애써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확인은 해야 하니까요." "제안 내용을 먼저 듣고 판단하시죠." 도현이 커피잔을 손끝으로 가볍게 돌리며 말했고, 그 손끝의 여유로움이 소민에게는 낯설고도 불편했다. 소민은 맞은편 자리에 다시 앉으며, 테이블 위에 놓인 자신의 잔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아까까지 뜨겁던 커피는 이미 미지근해져 있었고, 그 온도의 차이가 지금 이 자리의 분위기와 묘하게 닮아 있었다. "저는 판교에 있는 피닉스게임즈 인수와 관련해서 이 주 정도 이곳에 머물 예정입니다. 그 기간 동안, 저녁 시간을 함께 보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가 사무적인 어조로 조건을 나열하는 동안, 소민은 그 말속에서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마치 회의 자료를 읽어 내려가는 듯한 말투였고, 소민은 그 담담함이 오히려 더 낯설게 느껴졌다. "저녁 시간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지." 소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업계에서 오래 일하다 보면 말의 표면과 이면이 다른 경우를 수없이 겪게 되었고, 그래서 소민은 상대의 진짜 의도를 확인하는 일을 절대 건너뛰지 않았다. "동석, 식사, 대화. 그 이상은 요구하지 않습니다." 도현이 짧게 답했다. 그의 대답은 지나치게 명료해서, 오히려 그 뒤에 숨겨진 것이 있는지 의심하게 만들었다. "제가 하는 일이 뭔지는 이미 알고 계신 것 같네요." 소민이 짧게 확인하자, 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니 제안하는 겁니다." 그 말에 소민의 속이 살짝 뒤틀렸다. 자신의 직업을 이미 파악하고 접근했다는 사실이, 이 모든 대화가 처음부터 그의 계산 안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박기준이라는 중년의 남자가 어느 틈에 도현 옆에 서 있었는데, 그는 이미 태블릿 하나를 손에 들고 계약 조건들을 정리해 놓은 듯했다. 박기준은 검은 슈트를 입고 있었지만 도현과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감을 눌러 담고 있었다. 그의 태도에는 상급자를 보좌하는 사람 특유의 절제된 조심스러움이 배어 있었고, 그것이 오히려 도현이라는 인물의 위치를 더 선명하게 부각시켰다. "금액과 조건은 이쪽에서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박기준이 낮고 사무적인 목소리로 덧붙이자, 소민은 그 신속함에 오히려 씁쓸한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을 참았다. 이 사람들에게 자신은 이미 오래전부터 검토가 끝난 하나의 항목이었을 뿐이라는 사실이, 소민의 자존심을 미묘하게 긁고 지나갔다. 태블릿 화면에 떠 있는 숫자들이 소민의 시야 끝에 잠깐 걸렸는데, 그 액수는 그녀가 한 달을 뛰어야 겨우 벌어들일 만한 금액이었다. '하루에 저 돈을 준다는 거야, 지금.' 소민은 애써 그 숫자에서 시선을 떼어냈다. 돈에 흔들리지 않으려는 게 아니라, 흔들리는 모습을 이 두 남자 앞에서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는 이미 일요일까지 다른 스케줄이 있어요." 소민이 명확하게 선을 그으며 말하자, 도현의 눈매가 살짝 좁아졌다. 그 짧은 표정 변화가 라운지의 온도를 한 단계 더 낮추는 것처럼 느껴졌고, 소민은 자신이 뭔가 그의 예상 범위를 벗어난 말을 했다는 걸 직감했다. "현석 씨와의 약속 말씀입니까." 그가 묻는 순간, 소민은 그 정보력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새삼 실감하며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름 하나까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사실은, 이 남자가 자신에 대해 얼마나 많은 것을 이미 조사해 두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맞아요." 소민이 짧게 인정하자, 도현은 잠시 침묵한 채 그녀의 얼굴을 살폈고, 그 침묵이 라운지 안의 공기를 더 무겁게 눌렀다. 몇 초에 불과한 정적이었지만, 소민에게는 그 시간이 유난히 길게 늘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의 시선은 무언가를 평가하는 듯했고, 소민은 그 눈빛 아래에서 자신이 하나의 변수로 재계산되고 있다는 불쾌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럼 그 이후로 조정하면 되겠군요." 그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소민은 그 말속에 숨은 통제욕을 놓치지 않았다. 타인의 일정을 마치 자신의 계획표 안에 끼워 넣는 것처럼 다루는 그 태도가, 소민에게는 낯선 종류의 압박으로 다가왔다. "조정이라는 게, 제 스케줄을 이사님 편의에 맞추라는 뜻인가요." 소민이 되묻자, 도현은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웃음이라기보다는, 상대의 반응을 흥미롭게 관찰하는 사람의 표정에 더 가까웠다. "불편하시다면 다른 방식을 제안하시죠." 그가 말했다. 그 말은 배려처럼 들렸지만, 소민은 그 안에 선택권을 쥔 쪽이 여전히 자신이 아니라 그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소민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하자, 도현은 명함을 다시 그녀의 손끝으로 밀어 놓았다. 명함이 테이블을 가로질러 미끄러지는 그 짧은 순간, 소민의 손끝과 도현의 손끝이 거의 닿을 듯 가까워졌고, 소민은 반사적으로 손을 조금 뒤로 물렸다. "길게 끌 필요는 없을 겁니다." 그의 마지막 말이 소민의 뒤통수에 남았고, 라운지를 빠져나오는 소민의 걸음은 평소보다 조금 더 빨라져 있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걸, 소민은 문이 닫히고 나서야 알아차렸다. 손안에 여전히 쥐어져 있는 명함의 서늘한 감촉이, 좀 전까지 앉아 있던 그 남자의 눈빛만큼이나 오래 남아 사라지지 않았다. '생각할 시간이라니.' 소민은 스스로 내뱉은 그 말이 얼마나 무의미한 유예였는지, 로비를 가로질러 밤거리로 나서는 그 순간까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