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마부를 침소로 불렀다

4화

도윤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단호했고, 서연의 손을 슬며시 밀어내며 그는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안 됩니다." 그 짧은 두 마디에 담긴 무게가 방 안의 공기를 순식간에 얼어붙게 만들었고, 서연은 그의 손이 자신의 손을 떼어내는 그 순간을 마치 시간이 더디게 흐르는 것처럼 느꼈는데, 손끝이 멀어지던 그 짧은 거리감마저 그녀에게는 견디기 힘든 상실감으로 다가왔다. "제가 감히 아가씨의 몸에 손을 댈 수는 없습니다. 이건…… 이건 저에게도, 아가씨에게도 파멸을 부를 일입니다." 도윤은 말을 마치고도 고개를 들지 못했는데, 그것은 서연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자신의 결심이 무너질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 두려움은 단순한 신분의 격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향한 마음이 이미 오래전부터 위험한 방향으로 자라나고 있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두려움이기도 했다. 그 말에 서연은 잠시 멈칫했으나, 곧 다시 그의 팔을 붙잡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파멸이라니, 웃기지도 않는 소리야." 그녀의 손끝이 도윤의 소매 자락을 움켜쥐었고, 그 힘이 어찌나 강했는지 손톱이 옷감을 파고들 정도였는데, 도윤은 그 떨림을 통해 그녀가 지금 얼마나 벼랑 끝에 서 있는지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지금 여기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나는 내일부터 그 늙은이의 침소에 들어야 해. 그게 파멸이 아니면 뭐지?" 서연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는 억눌린 분노와 공포가 뒤섞여 있었고, 그녀는 이 말을 하는 순간에도 스스로 자신이 얼마나 초라해 보이는지를 알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멈출 수 없었다. '그 늙은이……' 도윤은 그녀가 말한 그 인물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지난달 초 아가씨의 아버지가 도박으로 진 빚을 갚기 위해 그 저택의 노대감에게 딸을 팔아넘기다시피 혼약을 맺었다는 소문이 하인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돌았고, 도윤 역시 그날 서연의 방 앞을 지키고 서 있다가 안에서 흘러나오는 그녀의 울음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그때는 그저 문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는데, 지금 그녀가 눈앞에서 이렇게 손을 붙잡고 애원하는 것을 보니 그날의 무력감이 다시금 가슴 한구석을 짓눌러 왔다. 도윤은 그녀의 절박함을 읽어냈으나, 그 절박함을 이용해 자신의 신분으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선을 넘는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도망쳐야 한다. 지금이라도……' 속으로는 그렇게 되뇌었으나, 정작 그의 발은 문 쪽으로 움직이지 않았고, 서연의 눈에 어린 물기를 본 순간 그 다짐마저 흔들리고 말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원래 맑은 가을 호수처럼 잔잔했으나, 지금은 그 위로 얇은 물막이 일렁이며 촛불의 흔들림을 그대로 되비추고 있었고, 도윤은 그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자신의 심장이 이유 없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부탁이야…… 부탁이야, 도윤." 서연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갈라졌고, 그 갈라짐 속에 담긴 진짜 두려움을 도윤은 외면할 수 없었는데, 그것은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살고자 하는 절규였기 때문이었다. "아가씨……" 도윤이 낮게 그녀의 이름 대신 호칭을 부르며 뒷걸음질 치려 했으나, 서연은 그의 손을 더욱 세게 붙잡으며 놓아주지 않았고,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겨우 한 걸음,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매달리는 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알아.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 이 저택 안에서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너 하나뿐이야." 그녀의 말은 애원이었지만, 동시에 도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어떤 갈망을 정확히 건드리는 말이기도 했다. 오랜 세월 그녀의 곁을 지키며 그저 그림자처럼 존재해야 했던 자신에게, 처음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 불리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도윤은 쉽게 설명할 수 없었다. 오랜 침묵이 흐른 뒤, 도윤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연을 바라보았고, 그 눈빛에는 이전까지 그가 보여주지 않았던 낯선 열기가 번져 있었다. "……아가씨가 이 밤을 후회하지 않으실 자신이 있다면, 저도 더는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도윤은 서연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그 손길은 지금까지의 조심스러움과는 전혀 다른, 억눌려 있던 무언가가 터져 나온 듯한 힘으로 그녀를 끌어당겼다. 서연은 그 순간 자신이 평소 알던 도윤이 아니라, 전혀 다른 얼굴을 가진 사람과 마주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 낙차가 두려움과 동시에 이상한 안도감을 불러일으켰다. '이 사람이…… 정말 도윤인가.' 늘 눈을 내리깔고 그녀의 지시에 조용히 따르기만 했던 그 하인이, 지금은 그녀를 붙잡은 손에 힘을 준 채 똑바로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 눈빛 속에는 두려움도 있었으나, 그보다 더 짙게 자리한 것은 어떤 결연함이었고, 서연은 그것을 보며 자신이 지금 얼마나 위태로운 선택을 하고 있는지를 새삼 깨달았으나 물러설 수는 없었다. 촛불이 흔들리며 두 사람의 그림자가 벽 위에서 하나로 겹쳐졌고, 방 안의 공기는 순식간에 무겁고 뜨겁게 가라앉았다. 바깥에서는 늦가을의 바람이 창호지를 가볍게 흔들었으나, 방 안의 두 사람에게는 그 소리조차 닿지 않는 듯했다. 탁, 탁. 촛불이 낮게 타들어가는 소리가 정적 속에서 유난히 크게 울렸고, 서연은 그 소리에 맞춰 자신의 심장이 뛰는 것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도윤의 손끝이 서연의 뺨을 스치는 순간, 그녀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고, 그 짧은 접촉만으로도 온몸의 감각이 일제히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그의 손끝은 거칠었으나 조심스러웠고, 마치 깨질 듯한 무언가를 다루는 사람처럼 아주 천천히, 아주 신중하게 그녀의 얼굴선을 따라 움직였는데, 서연은 그 손길에서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낯선 온기를 느끼며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후회하지 않을 거야." 서연이 겨우 내뱉은 말에 도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녀를 침상 쪽으로 이끌었고, 두 사람 사이에 남아 있던 마지막 거리감마저 그렇게 허물어져 갔다. 그 짧은 걸음 사이, 서연은 문득 지난날 도윤이 그녀에게 처음으로 우산을 씌워주었던 어느 장맛비 오는 날을 떠올렸는데, 그때 그는 자신의 몸이 젖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그녀의 어깨 위로만 우산을 기울였고, 그 사소한 배려가 지금 이 순간까지 이어져 온 것이라 생각하니 가슴 한편이 뻐근하게 저려왔다. 그 대가가 무엇일지는 그 순간 누구도 알 수 없었으나, 도윤의 눈빛 속에는 이미 어떤 각오 같은 것이 스며 있었고, 그것이 단순한 하룻밤의 일탈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문밖에서 낮은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사각, 사각. 누군가의 발이 마룻바닥을 조심스럽게 밟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고, 도윤은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온몸이 얼어붙는 것을 느끼며 서연을 향해 뻗었던 손을 순간적으로 멈추었는데, 서연 역시 그 낯선 발소리의 정체를 깨닫는 순간 얼굴빛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