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밤이 이슥해질 무렵, 청하 가문의 별채에는 유독 정적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고, 낮 동안 저잣거리를 오가던 하인들의 발소리조차 뜸해진 그 시각에, 마구간지기 하나가 은밀히 서연의 처소로 불려 올라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규수의 처소에 사내가 발을 들이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고, 더군다나 그 사내가 말을 돌보는 신분에 지나지 않는 도윤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누구든 경악할 만한 일이었으나, 이 늦은 밤 서연을 시중드는 늙은 유모조차 별채 근처에 얼씬거리지 않았던 것을 보면 이 부름이 결코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은밀히 준비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촛불 두어 개만이 밝혀진 방 안에서, 서연은 평소와 다른 낯빛으로 창가에 등을 대고 서 있었는데, 붉은 머리카락이 촛불에 물들어 마치 타오르는 불씨처럼 어깨 위로 흘러내리고 있었고, 그 아래로 드러난 목덜미는 창백하다 못해 푸른빛마저 감도는 듯하여 마치 밤의 냉기가 그녀의 살갗에까지 스며든 것처럼 보였다.
평소라면 단정하게 틀어 올렸을 머리를 오늘은 풀어 내린 채였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윤은 알 수 없었으나,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부터 이미 심상치 않은 기운이 방 안 가득 서려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아가씨."
도윤이 문턱에서 고개를 숙인 채 낮게 물었고, 그의 목소리에는 이 늦은 시각에 불려온 것에 대한 의문이 그대로 배어 있었으며, 동시에 자신이 왜 다른 종복도 아닌 마구간지기인 자신이 불려왔는지에 대한 당혹감도 함께 섞여 있었다.
낮 동안 마구간에서 말들의 먹이를 챙기고 여물통을 씻어내던 그의 손에는 아직도 마초 냄새가 배어 있었고, 그 손으로 규수의 처소를 밟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신분의 경계를 허무는 일이라는 것을 그는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서연은 대답 없이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의 앞으로 다가섰는데, 그 걸음걸이가 평소의 조심스럽던 것과는 확연히 달라 도윤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서고 말았고, 등 뒤로 문틀이 닿는 것을 느끼며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저런 눈으로……'
도윤은 속으로 의문을 삼켰으나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고, 서연의 눈동자에는 평소 그가 알던 얌전하고 조신한 규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으며, 오히려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절박함과 결연함이 뒤섞인 빛이 어른거리고 있었는데, 그것이 도윤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서연은 그의 그런 망설임을 눈치챈 듯 입술 끝을 살짝 끌어올리며 낮게 말했다.
"오늘 밤, 나를 안아줘."
짧고 단호한 말이었으나 그 안에 담긴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고, 도윤은 순간 숨을 삼키며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닌지 되짚어야 했으며, 귓가에 맴도는 그 말이 마치 다른 세상의 언어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아가씨,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감추려 애썼으나 완전히 숨기지는 못했고, 도윤의 손끝이 옷자락을 움켜쥐며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내 말을 못 들었다면 다시 하지. 오늘 밤, 나를 여자로 만들어 달라는 말이야."
서연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고, 오히려 그 침착함이 도윤의 가슴을 더 세게 내려치는 듯했는데, 그는 자신이 지금 서 있는 이 방이 청하 가문의 규수의 처소라는 사실을, 그리고 자신은 그저 말을 돌보는 신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되새길 수밖에 없었다.
'내가 감히…… 아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머릿속으로는 몇 번이고 그 명을 거절해야 한다고 되뇌었으나, 정작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고, 그런 자신의 모습이 도윤에게는 더욱 낯설고 두렵게 느껴졌다.
달칵.
등불이 흔들리며 그 그림자가 벽에 길게 늘어졌고, 서연은 그 짧은 소리에도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도윤을 응시했으며, 그 시선은 마치 이미 모든 것을 각오한 사람의 것처럼 흐트러짐이 없었다.
"어째서…… 어째서 저에게 이런 명을 내리십니까."
도윤이 겨우 짜낸 말이었으나, 서연은 그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께로 이끌었고, 그 순간 도윤은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낯선 온기에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리는 것을 느꼈으며, 자신의 심장이 손끝보다 더 크게 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연의 손은 차가웠으나, 그 안에서 전해지는 떨림만은 뜨겁게 느껴졌고, 그것이 두려움에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에서 오는 것인지 도윤은 가늠할 수 없었다.
'이건…… 안 된다. 절대 안 될 일이다.'
마음속으로는 몇 번이고 되뇌었으나 정작 그의 손은 서연의 손을 뿌리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고, 서연은 그런 그의 동요를 지켜보며 오히려 더 대담하게 그의 눈을 마주보았으며, 그 대담함 뒤에 숨은 절박함을 도윤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내일 이 시간이면 나는 다른 사람의 것이 되어야 해. 그러니…… 오늘 밤만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하게 해줘."
그 말속에 담긴 절박함이 무엇인지 도윤은 알 수 없었으나, 서연의 눈동자에 서린 그 결연함만은 분명히 읽을 수 있었고, 그것이 그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다른 사람의 것이 된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가씨.'
묻고 싶은 말은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었고, 도윤은 그저 서연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으로 자신의 물음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얼굴에서 읽히는 것은 슬픔인지 분노인지 아니면 그 모든 것이 뒤섞인 감정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문득 며칠 전, 안채에서 흘러나온 어른들의 나지막한 대화 소리가 도윤의 귓가에 스치듯 떠올랐고, 그때는 그저 흘려들었던 그 이야기가 지금 이 순간과 겹쳐지며 어떤 불길한 예감으로 변해가고 있었으나, 정확히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을 더듬을 여유조차 없었다.
창밖에서 밤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 소리마저도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더욱 무겁게 짓누르는 듯했으며, 서연의 손끝이 도윤의 손을 더욱 세게 움켜쥐는 것이 느껴졌다.
"대답해줘, 도윤."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애원에 가까웠고, 도윤은 그 순간 자신이 이 방을 나가지 못할 것임을, 그리고 이 밤이 끝난 후 자신의 삶이 결코 이전과 같을 수 없을 것임을 예감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