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마부를 침소로 불렀다

2화

그날 밤 서연의 입에서 나온 말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짚어보자면, 그것은 이미 오래전, 그녀가 아직 열두 살이었을 무렵부터 조용히 쌓여온 결핍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청하 가문의 영주는 자신의 딸을 그저 가문의 부를 늘리는 도구로 여겼는데, 그 사실을 서연은 아주 어릴 때부터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으며, 그녀의 방문 앞에 늘어선 하녀들의 수와 그녀에게 주어지는 값비싼 옷감의 개수가 결코 애정의 증거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방문을 열면 언제나 새 옷감이 놓여 있었고, 그 옷감은 하나같이 값비싼 비단이었으나, 그것을 만지는 서연의 손끝에는 온기 대신 서늘함만이 스며들었으며, 그 서늘함이 어디서 오는지 그녀는 아주 어린 나이에도 이미 알고 있었다. '이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체면을 위한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서연은 화려한 옷감을 손끝으로 밀어내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그 충동을 겉으로 드러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이 가문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식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서연, 네가 이 가문을 살릴 유일한 방법이다." 아버지가 그녀에게 처음으로 그 말을 던진 것은 서연이 열다섯이 되던 해의 겨울이었고, 창밖으로 눈발이 흩날리던 그날, 아버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무미건조했으나 그 안에 담긴 무게는 서연의 어린 어깨를 짓누르기에 충분했으며, 그날 이후로 그녀의 방에는 이름도 낯선 노인의 초상화가 걸리게 되었는데, 그 초상화 속 사내는 서연보다 세 배는 더 나이가 많아 보이는,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위축시키는 성주였다. 초상화 속 사내의 눈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방 안을 감시하고 있었고, 밤마다 그 눈과 마주칠 때면 서연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려 숨어야만 했으며, 그럴 때마다 자신이 마치 산 채로 팔려가는 짐승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왜 나여야만 하는가…….' 서연은 그 초상화를 볼 때마다 속으로 되물었으나, 그 물음에 답을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어머니인 채경마저도 그저 냉담한 얼굴로 "이것이 여자의 도리다"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어머니, 저는……" "더 말하지 마라. 이 집안의 여자로 태어난 것이 죄라면, 그 죄를 감당하는 것도 우리의 몫이다." 채경의 대답은 언제나 그렇게 짧고 단단했으며, 그 단단함 뒤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서연은 오랫동안 알지 못했으나, 돌이켜보면 채경 역시 자신의 삶에서 그리 자유롭지 못한 여인이었으니, 그녀 역시 젊은 시절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이 가문의 안방에 앉혀진 여자에 불과했다는 것을, 서연은 훗날 하녀들의 수군거림 속에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연은 그 사실을 이해하기에는 아직 너무 어렸고, 그저 어머니의 무심함이 자신을 향한 애정의 부재로 느껴져 가슴 한구석이 늘 시리게 아려왔으며, 그 시린 감각은 밤마다 이불 속에서 홀로 삼켜야 하는 몫이었다. 혼약이 정식으로 체결된 것은 지난가을이었는데,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날 서연은 방문을 걸어 잠그고 하루 종일 나오지 않았고, 하녀들이 문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서연은 그 소리마저 듣지 않으려 이불에 얼굴을 파묻었으며, 그날 밤 처음으로 창밖을 서성이는 마구간지기의 그림자를 발견했으며, 그 그림자가 유난히 조용하고 성실하게 움직이던 것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그것이 도윤이었다. 달빛 아래 그의 그림자는 유난히 길게 늘어져 있었고, 그 그림자가 마구간 앞을 오가며 말들의 상태를 살피는 모습을 서연은 창틀에 턱을 괴고 오래도록 지켜보았는데, 그때는 그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시선이었을 뿐, 그 시선이 훗날 자신의 삶을 뒤흔들 씨앗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말수가 적고 늘 시선을 아래로 두는 그 남자를, 서연은 처음엔 그저 가문의 하인 중 하나로만 여겼으나, 그가 다친 망아지를 밤새 돌보며 쓰다듬는 손길을 우연히 목격한 순간부터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상한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그날 밤 서연은 잠을 이루지 못해 정원을 걷다가 마구간 쪽에서 희미한 등불 빛을 발견했고, 그 빛을 따라간 곳에는 도윤이 다리를 다친 망아지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상처를 살피고 있었으며, 그의 손이 망아지의 다리를 감싸 쥘 때마다 짐승은 놀랍도록 순하게 몸을 맡겼는데, 그 모습이 마치 오랜 시간 서로를 알아온 사이처럼 자연스러워서 서연은 숨을 죽이고 그 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조금만 참아. 곧 나을 거야." 도윤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으며, 그 목소리가 짐승을 향한 것임에도 서연의 가슴은 이상하게 뻐근해져왔고, 그 뻐근함의 이유를 그녀는 한동안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저 손이라면…….' 그때는 그 생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명확히 알지 못했으나, 시간이 흐르며 그 파문은 점점 또렷한 형체를 갖추어갔고, 서연은 그 후로도 몇 번이나 창가에 서서 그가 마구간을 오가는 모습을 훔쳐보았으며, 그럴 때마다 자신의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고는 황급히 커튼을 내리는 일이 반복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오늘 밤의 파격적인 명령으로 이어진 시작점이었다는 것을, 서연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혼약이란 것이 성사되면 결코 되돌릴 수 없다는 이 가문의 오랜 관습을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는데, 이 가문에서는 예로부터 정략으로 맺어진 혼약을 하늘의 뜻과 동일시하여, 그것을 파기하는 자는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죄인으로 취급받았고, 그런 자를 다시 받아주는 가문은 어디에도 없었으니, 그 관습은 여자들을 더욱 단단히 옭아매는 족쇄와 같았다. 그 관습에 단 하나의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신부가 이미 순결을 잃은 경우, 즉 성사되기 전 파혼의 명분이 성립되는 경우였는데, 그것은 성주 가문의 대를 잇는다는 혼인의 본질적 목적이 훼손되었을 때에만 허락되는, 지극히 냉정하고도 잔인한 예외 조항이었다. 그 잔인하고도 굴욕적인 예외를 떠올릴 때마다 서연의 손끝은 미세하게 떨려왔으나, 그녀에게는 그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노인의 아내로 살아가느니……' 서연은 몇 번이나 그 생각의 끝을 맺으려 했으나, 매번 그 문장은 끝을 맺지 못한 채 흐려지고 말았고,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달빛 아래 다친 망아지를 돌보던 도윤의 손과, 낮게 울리던 그의 목소리였으며, 그 기억이 반복될수록 서연의 안에서 하나의 결심이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며칠 전 아버지가 성주 가문의 사람들과 정식으로 날짜를 논의했다는 소식을 하녀에게서 전해 들은 그날 밤, 서연은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그 밤 그녀는 오래도록 창가에 앉아 마구간 쪽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불빛을 바라보다가,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걸치고 방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놀란 것은 오히려 서연 자신이었으니, 그 작은 소리조차도 오늘 밤 자신이 내려야 할 결심의 무게를 실감케 했고,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옷깃을 여미며 어둠이 내린 마당을 가로질러 마구간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반드시…… 오늘 밤이어야 한다.' 서연은 스스로에게 되뇌며 걸음을 재촉했으나, 마구간이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심장은 점점 더 크게 뛰기 시작했고, 도윤의 조용한 그림자가 문틈 사이로 어렴풋이 비치는 순간, 서연은 걸음을 멈추고 숨을 깊이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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