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도윤의 자취방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좁은 원룸, 책상 위에 쌓인 전공서적들, 벽에 걸린 낡은 시계. 시험이 끝난 직후라 방 안에는 묘한 해방감이 감돌았다. 배달 온 음식 봉투가 테이블 위에 어수선하게 펼쳐져 있었고, 두 사람은 그 앞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하은은 젓가락으로 떡볶이를 집으려다 멈췄다. 손끝이 살짝 굳었다.
— 도윤아.
그 목소리에 도윤이 고개를 돌렸다.
— 왜.
하은은 대답 대신 젓가락을 그릇 위에 내려놓았다. 딸깍, 하는 작은 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갈랐다.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던 예능 프로그램의 웃음소리가 갑자기 아득하게 멀어졌다.
— 요즘 나, 좀... 이상한 것 같아.
도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입가에는 아직 국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 어떻게?
하은은 시선을 잠시 무릎으로 떨어뜨렸다. 말을 고르는 시간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방 안의 형광등이 조금 깜빡이는 것 같기도 했다.
— 요즘 자꾸 너를 시험해보고 싶어져. 네가 어디까지... 받아줄 수 있는지.
도윤은 젓가락을 든 채 그대로 멈췄다. 손목이 미세하게 굳는 게 보였다. 눈빛이 흔들렸다.
— 시험한다는 게, 지난번 같은 거?
— 응.
하은은 짧게 대답한 뒤, 숨을 한 번 들이켰다.
— 발 마사지 시킨 거, 명령하듯 말한 거. 그거 다 사실은... 어디서 읽고 따라 해본 거야.
방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텔레비전 소리마저 갑자기 낮아진 것 같았다. 도윤의 젓가락이 그릇 가장자리에 조용히 부딪혔다. 챙, 하는 얕은 소리가 났다.
도윤의 표정에는 당황과 함께 묘한 안도가 뒤섞여 있었다.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 그랬어...?
— 응. 나도 처음엔 그냥 궁금해서 찾아본 거였는데.
하은은 손가락으로 테이블 모서리를 문질렀다. 긴장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 근데 자꾸 생각나더라. 네가 그때 어떤 표정이었는지.
도윤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적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하은은 그 침묵이 두려웠지만, 동시에 이제는 물러설 수 없다는 걸 알았다.
— 무섭지 않았어?
하은이 조심스레 물었다.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도윤은 그릇을 내려놓았다. 손을 무릎 위에 올린 채, 시선을 벽 어딘가에 고정했다.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 아니. 오히려...
말을 잇지 못하고 도윤은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 너가 나한테 그렇게 대할 때, 뭔가 채워지는 느낌이었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하은은 그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심장이 갑자기 세게 뛰기 시작했다. 확신이 점점 단단해지고 있었다.
— 채워지는 느낌...?
— 응. 설명하기 어려운데. 뭔가... 내가 결정 안 해도 되는 느낌? 네가 정해주면 그냥 따라가면 되는, 그런 편안함.
도윤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부끄러운 듯 손끝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하은은 그 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방 안의 조명이 도윤의 얼굴 위로 부드럽게 떨어졌다. 낮에 검색했던 글들, 게시판의 댓글들, 낯선 용어들이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갔다. 그것들이 지금 이 순간, 눈앞의 도윤과 겹쳐지고 있었다.
— 나도 이상하게 들릴 텐데.
하은은 목소리를 낮췄다.
— 그런 너를 볼 때 좋아. 아니, 좋다는 말로는 부족한 것 같아.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오래 마주 보았다.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공기 중에 떠돌았다. 텔레비전 화면이 계속 깜빡였지만 누구도 그쪽을 보지 않았다.
하은은 손을 뻗어 도윤의 손을 잡았다. 손끝이 차가웠다. 도윤의 손은 그보다 조금 더 뜨거웠다.
— 우리, 이걸 좀 더 진지하게 이야기해볼까. 급하게 말고, 하나씩.
도윤은 그 손을 꽉 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서로의 체온이 스며들었다.
— 그래. 나도... 알고 싶어. 내가 왜 이런지, 그리고 네가 원하는 게 뭔지.
— 나도 아직 잘 모르겠어. 그냥...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 그래도 같이 찾아보면 되지 않을까.
하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대화가 두 사람의 관계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이끌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하지만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설렜다.
— 그럼 다음 주말, 시간 비워둬. 그때 이야기하자. 제대로.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에 긴장이 섞여 있었다.
— 응.
— 급한 거 아니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말고.
— 알겠어.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하은은 그것을 느꼈다. 도윤의 손을 쥔 힘이 조금 더 세졌다는 것도.
두 사람은 그날 밤 늦게까지 서로의 손을 놓지 않았다. 배달 음식은 이미 차갑게 식었고, 텔레비전은 어느새 다른 채널로 넘어가 있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대화는 계속됐다. 어디서부터 이런 마음이 생겼는지, 언제부터 서로를 다르게 보게 됐는지, 두서없는 이야기들이 오갔다. 그 어느 것도 명확한 결론에 이르지는 않았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이 관계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새벽이 가까워질 무렵, 하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윤이 현관까지 배웅했다.
— 조심히 가.
— 응. 주말에 연락할게.
도윤은 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하은의 손을 다시 한번 잡았다.
— 오늘 얘기해줘서... 고마워.
하은은 웃었다. 짧게, 그러나 진심을 담아.
— 나도. 말해줘서 고마워.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하은은 버스 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밤바람이 창틀 사이로 스며들어 뺨을 스쳤다. 버스 안은 텅 비어 있었고, 엔진 소리만이 나른하게 울렸다.
휴대폰 화면에는 아직 열려 있는 창이 있었다. 오늘 낮에 검색해두었던, 조금 더 본격적인 관계 설정에 대한 게시글이었다. 스크롤을 내리다 멈췄던 자리, 눈으로 훑었던 문장들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다.
제목 하나가 유독 눈에 밟혔다.
[규칙을 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은은 그 문장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손끝으로 화면을 몇 번 쓸어내렸다. 다음 주말, 자신이 도윤에게 어떤 말을 꺼낼지, 어떤 규칙을 제안할지 벌써부터 머릿속에서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안전 신호, 한계선, 사후 관리— 낯선 단어들이 하나씩 조각처럼 맞춰졌다.
그리고 동시에, 마음 한구석에서 낯선 불안도 함께 자라났다.
'이게 정말 우리 둘 다에게 맞는 방향일까.'
'혹시 내가 도윤이를 이상한 방향으로 끌고 가는 건 아닐까.'
생각이 자꾸만 갈래를 쳤다. 도윤의 눈빛, 그 안에 섞여 있던 안도와 불안. 그것이 정확히 어떤 감정이었는지 하은은 아직 다 이해하지 못했다.
버스가 정류장에 멈췄다. 하은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밖으로 보이는 캠퍼스 불빛이 흐릿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늦은 밤의 공기는 차갑고 건조했다.
정류장에서 자취방까지 걸어가는 길, 하은은 몇 번이나 휴대폰을 꺼냈다가 다시 넣었다. 도윤에게 문자를 보내려다 말고, 그 문장을 지웠다 썼다 반복했다. 결국 아무것도 보내지 못한 채 방문 앞에 섰다.
다음 주말이 벌써부터 멀게, 그리고 동시에 너무 가깝게 느껴졌다. 하은은 문을 열기 전,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어두운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저 위 어딘가, 앞으로 정해질 규칙들이 자신과 도윤을 어떤 곳으로 데려갈지, 아직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