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헬스장 여신이 여왕님이라니

1화

삐걱거리는 러닝머신 소리가 헬스장 안을 채우고 있었다. 저녁 아홉 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시간이었다. 웨이트 존에서는 원판 부딪치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고, 그 사이로 낮은 음악이 흘렀다. 김도윤은 벤치프레스 바를 내려놓고 숨을 몰아쉬었다. 후우—. 어깨가 뻐근했다. 팔뚝에 남은 펌핑감이 아릿하게 퍼졌다. 대학에 입학한 지 반년, 여전히 몸은 마음처럼 붙지 않았다. 매일 오는데도 거울 속 몸은 그대로인 것 같아서, 도윤은 가끔 이 짓이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수건으로 목덜미를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거울 너머로 누군가의 실루엣이 스쳤다. 도윤은 무심코 시선을 들었다가 멈췄다. '서하은?' 고등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얼굴이었다. 안경을 벗고 머리를 묶은 모습이 낯설었지만, 특유의 곧은 눈매는 그대로였다. 하은은 러닝머신 위에서 가볍게 뛰고 있었다. 숨이 조금 가빴는지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이어폰을 낀 귀, 흘러내린 잔머리 몇 가닥이 뛰는 리듬에 따라 흔들렸다. 도윤은 물병을 든 채 다가갈까 망설였다. 손끝이 살짝 떨렸다. '말 걸어도 되나.' 고민이 길어질수록 발이 무거워졌다. 삼 년 만이었다. 졸업식 이후로 연락 한번 없던 사이였다. 이름만 부르면 되는 일인데, 왜 이렇게 목이 마른지 알 수 없었다. 도윤은 물병을 한 번 더 들이켰다. 심장이 이상하게 빠르게 뛰었다. 운동 때문인지, 다른 이유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때 하은이 먼저 러닝머신을 멈추고 그를 발견했다. — 김도윤? 목소리가 반가움으로 살짝 높아졌다. 도윤은 어색하게 손을 들었다. — 어, 서하은. 오랜만이다.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살폈다. 하은의 눈이 도윤의 몸을 한 번 훑고 지나갔다. 그 시선에 도윤은 이유 없이 목덜미가 뜨거워졌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마치 신체 검사를 받는 기분이었다. — 여기 다녀? 몰랐네. — 이번 학기부터. 너는? — 나도 이번 학기부터. 의대 본과 들어가고 나서 살이 좀 붙어서. 하은이 웃으며 자신의 옆구리를 살짝 짚었다. 자조 섞인 웃음이었다. 도윤은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우물거렸다. 뭐라고 하면 좋을지, 위로를 해야 할지 그냥 웃어넘겨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 잘 어울리는데, 뭐. 말이 툭 튀어나왔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즉흥적인 대답이었다. 하은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 ...진심이야? — 응. 예전보다 지금이 더 편안해 보여. 하은은 잠시 그를 응시했다. 그러다 픽 웃었다. — 너 되게 솔직해졌네. 예전엔 말도 잘 못 걸던 애가. 도윤은 얼굴이 붉어지는 걸 감추려 물병을 들이켰다. 미지근한 물이 목으로 넘어갔다. 하은은 그런 그를 재밌다는 듯 바라보다가, 다시 러닝머신 버튼을 눌렀다. — 나 십 분만 더 뛸게. 기다릴래? — 어, 그래. 도윤은 근처 벤치에 앉아 스트레칭을 하는 척했다. 하지만 시선은 자꾸 옆으로 향했다. 하은의 발걸음, 흔들리는 어깨, 가끔 흘러내리는 잔머리를 넘기는 손짓까지. 십 분이 그렇게 길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헬스장에서 자주 마주쳤다. 처음엔 인사만 나누던 사이가 점점 운동 루틴을 맞추는 사이로 바뀌었다. 도윤은 부러 시간을 맞춰 헬스장에 갔다. 하은도 마찬가지였는지, 어느 순간부터는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시간대에 마주쳤다. — 스쿼트 자세 이상해. 무릎 안으로 말리잖아. 하은이 팔짱을 끼고 지적했다. 의대생답게 근육과 관절을 논하는 말투는 확신에 차 있었다. 도윤은 순순히 자세를 고쳤다. — 이렇게? — 그래, 그거. 잘하네. 짧은 칭찬이었지만 도윤의 가슴 어딘가가 간지러웠다. 왜인지 그 말 한마디에 하루가 통째로 괜찮아지는 기분이었다. 하은은 늘 그런 식이었다. 지적은 냉정했지만, 칭찬은 인색하지 않았다. 그 균형이 도윤에게는 이상하게 편안했다. — 너 원래 이렇게 잘 챙겨줘? — 아니. 너한테만. 하은이 무심하게 던진 말에 도윤은 순간 말을 잃었다. 하은은 별일 아니라는 듯 다음 동작으로 넘어갔지만, 도윤은 그 문장을 며칠 동안 곱씹었다. 몇 주가 지나자 둘은 운동 후 근처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이가 되었다. 자그마한 프랜차이즈 카페였다. 창가 자리를 좋아하는 하은과, 그 옆에 앉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도윤. 대화는 자연스럽게 늘어났다.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 전공 이야기, 서로의 콤플렉스까지. — 나 사실 살찐 거 신경 많이 써. 사람들 시선이... 하은이 커피잔을 매만지며 낮게 말했다.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손가락이 잔 표면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도윤은 잠시 침묵했다. 무슨 말을 해야 위로가 될지, 혹은 위로가 아니라 진심을 말해야 하는 건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러다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 나는 좋은데. 하은이 고개를 들었다. — 그냥 하는 말 아니고? — 진짜야. 너 지금이 훨씬... 편해 보이고, 좋아. 말끝이 흐려졌지만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하은은 그 눈빛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카페 안의 소음이 잠시 멀어지는 듯했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 커피 머신 소리, 낮게 흐르는 음악. 그 모든 것이 배경으로 밀려나고, 두 사람 사이의 정적만 남았다. '이 사람, 거짓말 못 하는 얼굴이네.' 하은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살짝 웃었다. 그 웃음이 이전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조소가 아니라, 조금은 부드러운 종류의 웃음이었다. 그날 밤, 도윤은 침대에 누워 몇 번이나 휴대폰을 들었다 놨다 했다. 문장을 썼다가 지우고, 다시 썼다가 지웠다. 결국 짧고 서툰 문장을 보냈다. 진심이 담긴, 그러나 어딘가 어설픈 고백이었다. [나 너 좋아하는 것 같아.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상하게 자꾸 생각나.] 보내고 나서 도윤은 이불을 뒤집어썼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답이 오지 않는 몇 시간이 몇 년처럼 느껴졌다. 결국 잠들지 못한 채 새벽을 맞았다. 하은의 답은 다음 날 아침에 왔다. [좋아. 나도 너 좋아하는 것 같아.] 도윤은 그 문장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글자 하나하나가 눈에 박히는 것 같았다. 손이 떨렸다. 웃음이 자꾸 새어 나왔다. 그렇게 두 사람은 연인이 되었다. 빠르다면 빠른 전개였지만, 누구도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결핍된 무언가를 채워주는 존재였으니까. 연애 초반, 도윤은 매일이 꿈같았다. 하은과 손을 잡고 캠퍼스를 걷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강의실로 향하는 길, 벤치에 앉아 함께 먹는 편의점 김밥, 시험 기간에 서로의 노트를 빌려 보는 시간까지 모든 것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가끔, 하은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게 그를 훑을 때마다 도윤은 알 수 없는 긴장을 느꼈다. 마치 몸의 어느 부위를 재는 것 같은, 그런 시선이었다. 처음엔 착각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반복될수록 확신이 들었다. 마치 평가받는 기분이었다. 나쁘지 않은, 오히려 조금은 설레는 종류의 평가였다. — 왜 그렇게 봐? 한 번은 도윤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하은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옅게 웃었다. — 그냥. 좋아서.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온도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도윤은 더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으니까. 그날 이후로도 하은은 종종 그를 그렇게 바라보곤 했다. 그리고 도윤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시선 속에 담긴 무언가를 더 알고 싶어졌다. 그것이 순수한 애정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도윤은 아직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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