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헬스장 여신이 여왕님이라니

4화

며칠 후, 두 사람은 여느 때처럼 하은의 방에 있었다. 시험이 끝난 주말, 오랜만의 여유였다. 창밖으로는 늦은 오후의 햇살이 비스듬히 스며들었고, 방 안은 적당히 따뜻했다. 커튼 사이로 스며든 빛이 침대 위에 얇은 줄무늬를 그렸다.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 영화를 보던 중, 하은이 슬쩍 발을 도윤의 다리 위에 올렸다. 별다른 말은 없었다. 그저 자연스러운 몸짓이었다. 도윤은 그 발을 받아 주무르기 시작했다. 처음보다 훨씬 익숙한 손길이었다. 손끝이 복사뼈를 지나 발등을 타고 흘렀다. 그날 이후 이런 식의 요청은 몇 번 더 있었다. 발을 만지는 것, 발가락 사이사이를 정성스레 문지르는 것. 그리고 매번, 도윤은 이상하게도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렸다. 하은이 발을 슬쩍 올릴 때마다, 그의 손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영화 속 대사가 흐릿하게 배경음처럼 흘러갔다. 둘 다 화면을 보고 있었지만, 실은 서로의 손끝과 발끝에 더 집중하고 있었다. 영화가 끝나자 하은은 몸을 일으켜 도윤을 마주 보았다. 리모컨으로 화면을 끄자, 방 안이 조용해졌다. 창밖에서 들리던 바람 소리만 은은하게 남았다. — 도윤아, 궁금한 게 있는데. — 뭔데? — 만약 내가... 좀 더 강하게 명령하듯 말해도, 괜찮을까? 도윤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잠시 침묵했다. 방 안의 공기가 팽팽해졌다. 창밖에서 지나가던 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 강하게... 어떻게? 하은은 조심스레 말을 골랐다. 게시판에서 읽었던 문장들, 낯설고도 매혹적이었던 표현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그 말들을 그대로 꺼낼 자신이 없었다. 손끝으로 이불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벌었다. — 예를 들면... 내가 뭘 하라고 하면, 바로 하는 거. 질문 없이. 도윤은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손끝이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그의 목울대가 한 번 크게 움직였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속으로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입 밖으로 나온 대답은 정직했다. — 괜찮을 것 같아. 아니, 좋을 것 같아. 하은은 그 말에 안도했다. 동시에 심장 어딘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처음으로 자신의 욕망을 입 밖에 내어본 셈이었다. 손바닥에 땀이 살짝 배어났다. — 정말이지? 나중에 딴말하면 안 돼. — 안 해. 도윤의 대답은 짧았지만 단호했다. 그 단호함이 오히려 그녀를 더 믿게 만들었다. — 그럼... 오늘은 내가 말하는 대로만 해줘.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가 살짝 잠겼다. — 응. 하은은 잠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다리를 도윤의 무릎 위로 올렸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애써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 발부터. 짧은 명령이었다. 도윤은 즉시 몸을 낮췄다. 손끝이 하은의 발목을 감싸 쥐는 순간, 그의 표정에 어떤 종류의 해방감이 스쳤다. 부끄러움을 넘어선 안도였다. 그의 두 손은 조심스럽게, 그러나 확실하게 발목을 감쌌다. 하은은 그 표정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 남자는 지금, 명령받는 것 자체에서 안정을 찾고 있었다. 눈을 살짝 내리깐 채, 손끝으로 발가락 하나하나를 정성스레 문지르는 모습이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신기하다.' 하은의 속내는 복잡했다. 놀라움과 흥미, 그리고 알 수 없는 흥분이 뒤섞였다. 동시에 한 가지 걱정도 스쳤다. 이게 정말 도윤이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지나치게 밀어붙이는 것은 아닌지. — 좀 더 세게. 그녀가 덧붙였다. 도윤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숨소리가 아까보다 조금 빨라진 듯했다. — 도윤아. 이거, 진짜 괜찮은 거지? 나 때문에 억지로 하는 거 아니지? 도윤은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눈빛이 진지했다. — 억지 아니야. 진짜 좋아. 오히려... 네가 이렇게 나올 때, 나 자신이 편안해지는 것 같아. — 편안해진다고? — 응. 뭘 해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냥... 네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되니까. 하은은 그 말을 오래 곱씹었다. 진심이 담긴 목소리였다. 그녀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도윤의 뺨을 감쌌다. — 그럼, 우리 천천히 알아가자. 무리하지 않고. 도윤은 그 손에 얼굴을 기댔다. 따뜻했다. 눈을 살짝 감은 채, 오래도록 그 온기를 느끼려는 듯했다. — 응. 천천히.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그 자세로 말없이 있었다. 방 안의 공기는 아까와 달리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그날 밤, 하은은 잠들지 못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몇 번이나 뒤척였다. 머릿속에는 이미 더 많은 질문과 상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발 마사지에서 그친다면, 이 관계는 그저 소소한 취향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그 이상을 원하고 있었다. 낮에 있었던 일들이 자꾸 눈앞에 재생되었다. 도윤의 손끝이 떨리던 순간, 그의 표정에 스쳤던 해방감, 그리고 그가 뱉었던 말들. '편안해지는 것 같아.' 그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조금 더. 조금 더 확실하게.' 몇 번이나 휴대폰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검색창에 뭔가를 입력하려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결국 그녀는 눈을 감았지만, 쉽게 잠들지 못했다. 다음 날, 하은은 대학 도서관 구석 자리에서 노트북을 켰다. 사람이 드문 시간이었다. 형광등 불빛 아래, 전공서적 사이에 몰래 숨겨둔 창 하나가 열려 있었다. 화면 속에는 며칠 전 저장해둔 링크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녀는 그중 하나를 클릭했다. 낯선 용어들, 구체적인 방법론, 그리고 경험담들이 화면을 채웠다. 손끝으로 스크롤을 내리며 하나씩 읽어 내려갔다. 처음 보는 단어들이 많았지만,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았다. 이미 자신이 어렴풋이 느꼈던 감정들이 그 안에 언어로 정리되어 있었다. 그중 한 문장이 유독 눈에 박혔다. [처음엔 작은 것부터. 상대가 스스로 원한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하은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스쳤다. 이미 자신은 그 방식을 무의식중에 따르고 있었다. 발을 만지게 하고, 조금씩 명령을 늘려가고. 그것이 정확히 이 문장이 말하는 방향이었다. 그녀는 다른 페이지로 넘어갔다. 조금 더 구체적인 방법들, 신뢰를 쌓는 단계, 그리고 서로의 경계를 존중하는 방식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그녀는 몇몇 문장을 메모장에 옮겨 적었다. 손끝이 키보드 위에서 빠르게 움직였다. 문득 시계를 보니 다음 수업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녀는 서둘러 창을 닫고 화면을 끄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캠퍼스를 걷는 학생들의 모습이 유리창에 흐릿하게 비쳤다. 도윤과의 다음 만남이 벌써 기대되었다. 이번엔 좀 더 구체적인 계획이 있었다. 그녀는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속으로 몇 번이나 그 계획을 되짚었다. 조금 더 대담하게. 조금 더 확실하게. 그리고 이번에는, 그가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지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 가방을 어깨에 메고 도서관을 나서는 그녀의 걸음이 평소보다 조금 빨랐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