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폭군 마왕의 도주극

5화

마탑 최상층, 원형으로 배치된 회의실. 십대 마장군을 위한 자리가 정확히 열 개, 빙 둘러 놓여 있었다. 그중 하나는 언제나 비어 있었다. 열 번째 자리.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한데, 앉는 사람은 없다. 누구도 그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았고, 나도 굳이 캐묻지 않았다. 괜히 건드려서 좋을 게 없는 떡밥이라는 감이 왔으니까. 이세계 로판 세계관에서 이런 건 대체로 복선이다. 나중에 뒤통수 치는 용도로. 오늘은 그 회의실에 처음으로 아홉 명 전원이 모이는 날이었다. 정기 마장군 회의라고 했다. 나는 참석하지 않으려 했다. 마왕 코스프레도 벅찬데 굳이 마장군들 얼굴 도장까지 찍어가며 존재감을 늘릴 이유가 없었으니까. 근데 카시아가 직접 내 방까지 찾아와서 못을 박았다. “오늘은 40층 정찰 총괄 보고가 있습니다. 마왕님이 직접 들으셔야 할 사안입니다.”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물러설 기색이 전혀 없는 톤. 이럴 때 카시아는 꼭 실제 부모님 같다. 잔소리도 정확히 이 타이밍에 들어온다. 결국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 관찰자로 남을 생각이었다. 그냥 듣고, 고개만 끄덕이고, 빨리 끝내고 나가는 게 오늘의 유일한 목표였다. 회의실 문이 하나씩 열릴 때마다 마장군들이 들어와 자리를 채웠다. 화염 계열로 보이는 붉은 눈의 여자, 조용히 인사만 하고 앉는 백발의 노인, 서로 낮게 인사를 주고받는 두 명. 전부 나보다 이 세계에서 훨씬 오래 산 사람들이었다. 그 사이에 앉아 있는 내가 어색하게 느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어온 이가 있었다. 키가 큰 여자였다. 등에 접힌 매의 날개, 날카로운 눈매. 걸음걸이부터 다른 여덟 명과 달랐다. 거침없고, 자신감이 넘쳤다. “여진 장군, 늦었습니다.” 카시아가 낮게 지적했다. 목소리에 살짝 날이 서 있었다. “늦은 게 아니라 순찰을 마무리하고 온 거지.” 여진이라는 이름의 여자가 태연하게 답하며 빈자리에 앉았다. 미안한 기색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당당했다. “정찰 결과가 늦게 도착한 거지, 내가 늦은 게 아니야. 구분 좀 해줘, 카시아.” “……그 말장난은 매번 다르게 하시네요.” 카시아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익숙한 다툼인 듯했다. 그러다 여진의 시선이 잠시 나를 향했다. 짧고, 평가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저게 그 마왕이야?” 여진이 옆자리 마장군에게 낮게 물었다. 나한테 다 들리는 목소리였다. 일부러 그런 건지, 원래 목청이 좋은 건지 구분이 안 됐다. “조용히 해, 여진.” “왜, 궁금해서 그런 건데. 요즘 이상해졌다고 다들 그러던데.” 이상해졌다는 말이 여기서도 나왔다. 다은도 비슷한 말을 했었는데. 대체 원래 유서린이 어떤 인간이었길래, 다들 이렇게 변화를 신경 쓰는 걸까. 궁금하긴 한데, 물어볼 곳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원작 설정집에도 안 나오는 부분이라서. “보고 시작하겠습니다.” 카시아가 회의를 진행시켰다. 40층 정찰 결과, 국경 지역의 마족 밀렵꾼 동향, 인접국과의 긴장 상태 등이 차례로 보고됐다. 나는 대부분의 내용을 흘려들었다. 관찰자로 남기로 했으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타이밍만 놓치지 않으면 됐다. 밀렵꾼 숫자가 몇 명 늘었다느니, 인접국 사절단이 뭔가 트집을 잡았다느니. 솔직히 말해서 회사 주간 회의랑 다를 게 없었다. 안건 리스트만 다를 뿐이지. 그런데 여진의 보고 차례가 되자,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40층 서쪽 경계에서 미확인 마력 반응이 감지됐습니다.” 미확인 마력.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게임 시나리오상, 서지아가 도래하기 전에 항상 이런 식의 사전 징후가 나타난다는 설정이 있었다.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이건 그냥 흘려들을 안건이 아니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반응이었습니까.” 카시아가 물었다. 목소리에서 이미 긴장이 묻어났다. “인간 종족 특유의 파장이었어. 근데 강도가 좀 이상하게 높았지.” 여진이 미간을 좁히며 말을 이었다. “보통 인간이 접근하면 이 정도까진 안 뜨거든. 뭔가 특이한 개체거나, 아예 다른 게 끼어 있거나.” 여진이 시선을 나에게로 돌렸다. “마왕은 뭐 아는 거 없어?”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순간 말이 막혔다. “……없어.” 짧게 답했다.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여기서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인간 종족의 미확인 마력, 강도가 이상하게 높은 파장. 그게 서지아일 확률이 높다는 걸, 나는 게임 지식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물으면 답할 말이 없었다. ‘제가 게임으로 이 세계를 미리 봤거든요’ 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흠.” 여진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나를 훑어봤다. 뭔가 의심하는 눈빛이었다. “마왕이 요즘 좀 다르다는 소문이 사실인가 보네.” “무슨 소문.” “원래는 이런 보고에 관심도 없었잖아. 근데 지금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는데.” 순간 내 표정을 다잡았다. 여진의 관찰력이 생각보다 예리했다. ……젠장. 나는 포커페이스가 진짜 안 되는 인간인가 보다. 전생에서도 상사한테 매번 표정 읽혔었는데. “……신경 쓰지 마.” 애써 무심하게 답했지만, 여진의 눈빛은 여전히 나를 향해 있었다. 뭔가 다음 말을 고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카시아가 눈치껏 화제를 돌렸다.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다행히 회의는 별다른 파열음 없이 마무리됐다. 나는 속으로 안도했다. 회의가 끝나고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떴다. 나도 서둘러 회의실을 나서려는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마왕.” 여진이었다. 어느새 내 옆까지 다가와 있었다. 발소리가 거의 안 났다. 전투형 마장군 특유의 움직임인가 싶었다. “……뭐.” “다음에 시간 좀 내봐. 궁금한 게 좀 있어서.” 뭐가 궁금한지 묻고 싶었지만, 여진은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훌쩍 자리를 떴다. 날개를 살짝 접었다 펴는 동작이 새 같아서, 나는 잠깐 그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봤다. 관찰자로 남으려던 계획이 벌써부터 어긋나고 있었다. 회의실을 나와 복도를 걷다가, 나는 우연히 다은과 마주쳤다. 식자재를 나르던 다은이 나를 보고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팔에 걸친 바구니가 무거워 보였다. “마, 마왕님. 회의 끝나셨나요?” “어.” 짧게 답하고 지나치려는데, 다은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바구니를 든 채로 발이 안 떨어지는 눈치였다. “……저기, 마왕님.” “뭐야.” 다은이 주위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요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요. 마왕님, 혹시…….” 말을 끝맺지 못하고 다은이 멈췄다. 복도 저편에서 발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둘 다 동시에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봤다.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이는, 방금 헤어졌던 여진이었다. 날개를 살짝 늘어뜨린 채, 걸음걸이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여진의 시선이 나와 다은 사이를 빠르게 오갔다. 그 눈빛에 뭔가 흥미로운 걸 발견한 듯한 기색이 스쳤다. “……어, 방해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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