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폭군 마왕의 도주극

3화

쪼르륵. 트레이가 탁자 위에 놓이는 소리부터 심상치 않았다. 식사를 가져온 이는 아까 그 마장군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여자였다. 낮은 계급의 하녀복을 입고, 잔뜩 움츠린 어깨로 트레이를 든 채 문 앞에 서 있었다. 밀색 머리를 단정히 묶은, 아직 어린 티가 남은 얼굴이었다. 열여덟, 아니 열아홉쯤 됐을까.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들어와.” 말을 걸었을 뿐인데 여자가 화들짝 놀랐다. 어깨가 움찔 튀어 오르더니 트레이 위 잔이 살짝 흔들렸다. 마치 처음 말을 걸어본 사람처럼, 아니 처음 말을 걸어본 사람에게 반응하듯이. 트레이를 놓고 나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여자는 내 얼굴을 단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시선은 항상 바닥이나 탁자 모서리 어딘가에 머물러 있었다. 마왕이라는 존재가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대상이라는 뜻이겠지. 하녀가 나가고 나서야 나는 트레이 위 음식을 내려다봤다. 고기 요리, 붉은 과일, 그리고 향이 진한 술이 담긴 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걸 보니 갓 만든 음식이었다. 이게 마왕의 아침이라니. 전생에는 편의점 삼각김밥이 최고급 만찬이었는데. 참 웃기는 낙차다. 술을 옆으로 밀어두고 고기를 조금 뜯었다. 맛은 나쁘지 않았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씹는 내내 입안이 텁텁했다. 아까 아홉 명의 눈빛이 계속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두려움과 원망. 그게 이 몸의 진짜 주인이 쌓아온 결과였다. 나는 그걸 물려받았다. 물려받고 싶지 않았는데. 며칠이 지났다. 나는 마탑 안에서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아홉 마장군은 여전히 나를 경계했고, 나 역시 그들과 거리를 두었다. 서로가 서로를 건드리지 않는 팽팽한 정적이 지속됐다. 정무회의라고 이름 붙은 자리에 몇 번 참석해봤지만, 아홉 명이 서로 눈치를 보며 형식적인 보고만 늘어놓는 걸 지켜보는 게 전부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뭘 물어봐야 할지도 몰랐고, 물어본다고 해도 그들이 순순히 답해줄 것 같지도 않았다. 책상 위에는 매일 보고서가 쌓였다. 국경 어디에서 소규모 충돌이 있었다느니, 세금 징수율이 어떻다느니, 하는 내용들이었다. 읽어도 이해가 안 되는 단어들이 태반이었다. 나는 그냥 대충 결재만 했다. 그 며칠 사이 나는 결정을 내렸다. 포기하기로. 뭘 해도 결말은 정해져 있다면, 굳이 애써 발버둥칠 이유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게임 시나리오라는 게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라는 걸, 나는 게임을 플레이했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주인공은 항상 승리한다. 그게 이 장르의 룰이었다. 내가 아무리 발악을 해도, 결국 어딘가에서 나타날 주인공이 나를 베고 세상을 구할 거다. 로판이든 판타지든, 마왕이라는 자리는 결국 그런 역할이니까. 그러니 그냥, 남은 시간 동안 편하게 지내다가 결말을 받아들이는 게 낫지 않을까. 어차피 바뀌지 않을 미래라면, 발버둥치는 것 자체가 시간낭비 아닐까. 그런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흘려보냈다. 마장군들이 올리는 보고서에는 대충 결재만 했다. 정무회의는 대부분 불참했다. 아홉 명이 알아서 국정을 운영하는 걸 지켜보기만 했다. 그렇게 방관자로 지내는 게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적어도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식사는 계속 그 밀색 머리 하녀가 가져왔다. 매번 같은 패턴이었다. 문을 두드리고, 겁먹은 목소리로 식사를 알리고, 들어와서 트레이를 내려놓고, 눈도 못 마주친 채 도망치듯 나갔다. 나는 그때마다 그냥 지켜봤다. 이름을 물어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어느 날 밤, 창밖으로 보이는 마탑 아래 도시의 불빛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포기라는 게, 정말로 이렇게 쉬운 선택이었나. 박준서였을 때도 비슷한 선택을 자주 했었다. 취업을 포기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포기하고, 결국 삶의 많은 것들을 포기한 채 방구석에 틀어박혀 게임만 했었다. 그때도 논리는 비슷했다. 어차피 노력해도 안 될 거, 남들 눈치 보며 애쓰느니 그냥 마음 편하게 사는 게 낫다고. 자기 위로랍시고 그런 말을 되뇌면서 하루하루를 흘려보냈다. 그리고 그 삶의 결말은,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먹다가 갑작스레 맞은 죽음이었다. 그 죽음 앞에서 나는 후회했었나?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냥 눈앞이 캄캄해졌고, 그다음은 이 몸으로 눈을 뜬 게 전부였다. 죽는 순간의 기억조차 흐릿한 걸 보면, 어쩌면 그렇게 특별할 것도 없는 죽음이었는지도 모른다. 근데 지금, 또 포기를 선택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후회 없이 죽을 수 있을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창문을 열자 밤바람이 들어왔다. 서늘한 공기가 뺨을 스쳤다. 마탑 아래 도시의 불빛이 마치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저 멀리 어딘가에서 종소리 비슷한 게 은은하게 울렸다. 저 아래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니 마족들이 살고 있을까. 저들 중 몇이나 내가 마왕이라는 걸 알까. 알아봐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이 자꾸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 전생에서도 그랬다.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으면, 생각은 항상 밑으로, 밑으로만 가라앉았다. 밖으로 나가면 뭔가 달라질 거라는 걸 알면서도, 나가는 게 무서워서 그냥 눌러앉아 있었다. 그때 문득, 아까 그 하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트레이를 놓고 도망치듯 나가던, 겁먹은 표정. 손끝이 떨리던 것도, 눈을 마주치지 못하던 것도 다시 떠올랐다. 이름이 뭐였더라. 물어보지도 않았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며칠 동안 얼굴을 마주했는데, 나는 그 애의 이름조차 궁금해하지 않았다. 방관자로 지내겠다고 결심한 순간부터, 나는 이 세계의 모든 것에 무심해지기로 한 거였다. 포기하고 방관자로 지내겠다고 결심했는데, 그러기엔 이 몸에 딸린 것들이 너무 많았다. 목숨, 부하들, 그리고 이름도 모르는 하녀까지. 포기가 정말 쉬운 선택이 맞나. 머릿속에서 자꾸 같은 질문이 맴돌았다. 결말이 정해져 있다는 확신도, 사실은 확신이 아니라 그냥 도망치기 위한 핑계였는지도 모른다. 그날 밤, 나는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창밖의 불빛을 몇 번이고 다시 바라보다가, 결국 어느 순간 스르르 눈을 감았던 것 같다. 다음 날 아침,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똑똑. “마, 마왕님. 식사 가져왔습니다.” 같은 목소리였다. 며칠째 듣던 그 떨리는 음성. 나는 조금 다른 선택을 해보기로 했다. “들어와서, 이름이 뭔지 말해봐.” 문이 살짝 열리며 그 하녀가 다시 얼굴을 내밀었다.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트레이를 든 손이 살짝 흔들렸다. “……다, 다은입니다.” 다은. 짧은 이름이었지만, 그 순간 나는 왠지 이 이름을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감이 맞았다는 걸, 나는 아주 나중에서야 깨닫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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