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등에 닿는 서늘한 대리석 바닥, 그리고 코를 찌르는 피 냄새. 다행히 내 피는 아니었다.
카시아가 검을 놓친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다른 여덟 명도 마찬가지로 바닥에 쓰러져 있거나, 벽에 처박혀 신음하고 있었다.
내가 한 게 아니었다.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죽음의 위기 앞에서 유서린의 몸에 새겨진 어떤 힘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발동한 것 같았다.
기억이 뚝뚝 끊겨 있었다. 카시아의 검이 목을 향해 날아오던 순간까지는 선명한데, 그 다음은 암전. 그리고 지금 이 광경.
블랙아웃 치고는 결과물이 너무 화려했다.
“…….”
말이 나오지 않았다. 손끝을 내려다보니 손톱이 검은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마력이라는 걸까. 게임 속에서 마왕 유서린이 쓰던 스킬 이펙트와 똑같았다.
손을 쥐었다 펴봤다. 손가락 사이로 검은 안개 같은 게 스멀스멀 새어 나왔다.
이거 완전 필살기 이펙트인데.
게임 지식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다.
마왕 유서린. 마탑의 최상층 지배자. 십대 마장군을 부하로 두고 있으며, 그중 아홉이 지금 이 방에 있는 이들이었다. 원래 게임에서는 열 명이어야 하는데 하나가 빠졌다는 게 이상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당장 중요한 건 이거였다.
이 게임의 결말.
서지아라는 여주인공이 마탑을 정복하러 오는 서사. 그 여정 끝에서 마왕 유서린은 패배하고, 예속당한다.
예속이라는 단어가 게임 안에서는 결코 다정한 표현이 아니었다. 노예 목걸이 채워지고, 마력 봉인당하고, 서지아의 시중이나 들며 여생을 보내는 엔딩. 성인 게임답게 그 이후 장면들도 꽤 노골적으로 묘사됐던 걸로 기억한다.
CG 갤러리에서 그 장면을 스킵하지 않고 다 봤던 과거의 나 자신을 원망하고 싶었다. 그때는 그게 이렇게 현실이 될 줄 몰랐으니까.
내가 그 결말의 주인공이 된다는 뜻이었다.
“……미쳤네.”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서지아가 언제 오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게임 초반 설정상 '수년 내 도래'라고만 알려져 있었다. 몇 년인지는 몰라도, 확실한 건 그날이 오면 나는 죽거나 그보다 못한 꼴을 당한다는 거였다.
죽는 건 이미 한 번 해봤으니 그렇다 치자. 근데 그보다 못한 꼴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목에 이미지가 그려졌다. 반짝이는 목걸이, 사슬,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도로 지웠다. 아침부터 정신 건강에 해로운 상상은 그만두기로 했다.
카시아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눈빛에 두려움과 원망이 뒤섞여 있었다. 방금까지 살기등등하던 검사의 얼굴이 저렇게 하얗게 질릴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어떻게…한 겁니까.”
존댓말이 튀어나왔다. 방금까지 폭군이라 부르며 검을 겨누던 여자가.
“몰라.”
솔직하게 답했다. 진짜 몰랐으니까.
“모른다고요? 저희 아홉을, 순식간에…….”
카시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말을 잇지 못하고 끝을 흐렸다.
말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나도 방금 내 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하나도 모르니까. 상태창이라도 띄워주면 좋겠는데, 이 몸은 그런 배려심 있는 시스템도 없었다.
다른 마장군들도 하나둘 몸을 일으키며 나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의 살기는 사라지고, 대신 낯선 두려움이 자리를 채웠다. 벽에 기대 앉은 여자 하나는 아직도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방 안 공기가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십 분 전만 해도 나를 죽이겠다고 벼르던 아홉 명이, 지금은 내 눈치를 살피며 숨을 죽이고 있었다.
권력의 저울이라는 게 이렇게 순식간에 기울 수 있는 거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실이 웃겼다.
나는 이 몸의 힘이 무섭다는 걸 처음으로 실감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 힘이 결국은 서지아 앞에서 무용지물이 된다는 사실도 함께 떠올랐다.
게임 시나리오는 절대적이었다. 아무리 강한 마왕이라도, 주인공 앞에서는 패배하도록 설계돼 있었다. 그게 이 게임의 룰이었다.
룰을 깰 방법이 있을까.
생각해봤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게임을 플레이한 사람이지, 만든 사람이 아니었다. 시나리오 뒤에 숨겨진 치트키 같은 게 있는지도 몰랐다.
패치 노트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아니면 공략집이라도.
이 세계에 위키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있어도 내가 그걸 뒤질 처지도 아니고.
“……전부 나가.”
내 입에서 나온 말에 아홉 명이 동시에 굳었다.
정적이 흘렀다. 누구도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죽이지 않는다는 겁니까.”
카시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지금은.”
짧게 답했다. 사실은 죽일 능력도, 의지도 없었지만 그렇게 말하는 게 그럴듯해 보였다.
허세라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마왕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이상, 뭐라도 마왕스러운 대사를 던져야 할 것 같았으니까.
여자들이 하나씩 눈치를 보며 방을 빠져나갔다. 발소리가 조심스러웠다. 방금까지 검을 들고 있던 사람들이라기엔 너무 얌전한 걸음이었다.
마지막으로 나간 카시아가 문턱에서 잠깐 멈춰 섰다.
“……왜 우리를 그동안 그렇게 대했습니까.”
질문이 날아왔다. 나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이 몸의 진짜 주인이 뭘 어떻게 했는지 나도 모르니까.
카시아는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였지만, 내가 계속 침묵하자 결국 고개를 숙이고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고 방에 혼자 남았다.
그제야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나는 그대로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창밖으로 마탑의 풍경이 펼쳐졌다. 검은 첨탑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고, 그 아래로 마족들의 도시가 개미굴처럼 얽혀 있었다. 저 멀리 붉은 지붕들 사이로 마족들이 오가는 모습이 개미처럼 작게 보였다.
이 모든 걸 다스리는 게 나라니.
웃음이 나왔다.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전생에는 편의점 삼각김밥 하나 사 먹으려고 지갑 사정을 걱정하던 백수였는데, 지금은 마족 제국의 정점에 서 있다.
근데 그 정점에서 기다리는 게 예속과 굴욕이라니, 이건 무슨 하드모드도 아니고 헬모드 그 자체 아닌가.
다이아몬드 수저를 물려받았는데 알고 보니 시한부 인생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중고차 사놓고 보니 침수차였다는 느낌도 살짝 곁들여서.
마력이 넘치고, 마장군을 부하로 두고, 마탑의 정점에 있어도 결국 몇 년 뒤엔 예속될 운명이라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일단 살아야 했다. 서지아가 오기 전에, 이 예속 결말을 피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근데 방법이 있을까.
시나리오를 거부하는 마왕. 그런 루트가 게임에 있었나 곱씹어봤지만 기억나는 게 없었다. 애초에 그런 선택지 자체가 없었던 것 같다.
멀티 엔딩도 아니고, 완전 고정 스토리였던 게임이니까.
창문 너머로 보이는 마탑의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처음으로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도망칠 수 있을까.
도망친다 해도 어디로. 이 세계 자체가 게임 속 세계관인데, 서지아라는 존재가 등장하는 순간 이야기는 어떻게든 흘러갈 거였다. 내가 숨는다고 시나리오가 멈춰줄 리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맞서 싸워서, 원래 결말을 뒤집는 것.
말은 쉬웠다. 근데 그게 가능한 일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똑똑.
“마, 마왕님. 아침 식사 준비되었습니다.”
낯선, 그러나 유난히 조심스러운 여자 목소리였다.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방금 전 아홉 명의 마장군들이 보였던 그 두려움과는 조금 다른, 묘하게 긴장된 결이었다.
나는 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