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10개의 세계, 못다한 소원

5화

밤 열한 시, 병원 문을 닫고 혼자 진료실에 앉아 있었다. 오늘 하루 종일 세 건을 연속으로 처리했다. 위장 이물질 제거 수술 하나, 골절 정복 하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어온 놈은 원인 불명의 발작 증세로 응급 처치까지 해야 했다. 몸은 만신창이였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정신은 이상하게 또렷했다. 카페인 때문인지, 아니면 오늘 벌어진 일들이 머릿속을 계속 헤집고 다녀서 잠이 안 오는 건지 모르겠다. 아마 후자겠지. 전자였으면 그냥 커피 끊으면 되는 문제니까. 책상 위에는 다 식은 아메리카노 한 잔이 놓여 있었다. 아까부터 마실까 말까 고민만 하다가 결국 손도 안 댔다. 지금 저걸 마시면 잠은 완전히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어이, 시스템." 혼잣말인지 부름인지 애매한 톤으로 말을 걸었다. 조용했다. 벽시계 초침 소리만 째깍째깍 울렸다. 형광등 하나가 미세하게 깜빡거렸다. 이 병원 전기세도 좀 아껴야 하는데, 저 형광등 바꿔야 하나,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쳤다가 사라졌다. "이 새끼 또 씹네." [시스템: 호출 감지. 대응합니다.] 뭐야, 씹은 거 맞잖아. 왜 이제야 반응해. 이 시스템은 항상 이런 식이다. 사람이 부르면 즉각 대답하는 법이 없다. 무슨 콜센터 상담원 대기시간 흉내라도 내는 건지. ARS 안내 멘트처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한마디만 붙이면 완벽할 텐데. "질문 있는데." "[진행하십시오.]" "내가 여기서 얻은 능력치, 다른 세계로 갈 때도 가져가는 거야?" 잠깐 정적이 흘렀다. 이 인간, 아니 이 시스템은 대답하기 전에 항상 이 뜸을 들이는데, 그게 사람 속을 뒤집어놓는다. 마치 배달앱에서 '조리 시작' 눌러놓고 삼십 분째 아무 알림도 안 오는 그 답답함과 똑같았다. "[대상자가 수동으로 훈련하여 개발한 능력치만 이월됩니다.]" "수동으로 훈련? 그게 뭔데." "[초기 지급된 전공 지식은 해당 세계에 종속됩니다. 대상자가 직접 반복 수행을 통해 습득한 기술은 별도로 저장됩니다.]" 아, 그러니까 이하준이 원래 알던 수의학 지식은 여기 두고 가야 하고, 내가 직접 노력해서 배운 것만 다음 세계로 들고 갈 수 있다는 소리네. [히브리서 12:11, 연단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으나] 연단은커녕 나는 그냥 남의 지식 빨아먹으면서 살고 있는데요. 근데 그게 다음 세계에서는 무용지물이 된다니, 이건 좀 억울했다. 억울하다는 감정이 이렇게 구체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대학 등록금 환불 안 해준다는 통지 받았을 때 느낌이랑 비슷했다. "그럼 지금까지 내가 얻은 건 하나도 못 가져간다는 거야?" "[힘 3, 민첩 2, 지능 4, 체력 3은 대상자 고유의 잠재치입니다. 이는 세계 이동 시에도 유지됩니다.]" "그럼 수의학 87은?" "[해당 수치는 이하준의 육체를 통한 접근권입니다. 이월 대상이 아닙니다.]" 허무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진료실에서 날리고 있는 그 화려한 실력은 전부 임대한 지식이라는 뜻이었다. 임대차 3법이 이세계에도 적용되나, 계약 끝나면 원상복구하고 나가야 하는구나. 보증금이라도 돌려받으면 다행이지, 이건 그것도 안 되잖아. [욥기 1:21, 내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사온즉 알 수 없이 죽을 것이라] 벌거벗고 왔다가 벌거벗고 간다는 소리네. 지식도 몸도 다 남의 거 빌려 쓰다가 반납. 그렇게 생각하니 오늘 손끝으로 느낀 그 정교한 봉합 감각도, 발작하는 개의 눈동자를 보고 즉각 판단해낸 그 순발력도 다 남의 껄로 산 결과물이었다는 게 새삼 씁쓸했다. 근데 이걸 씁쓸해할 시간에 하나라도 더 훈련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실용적인 계산도 동시에 굴러갔다. "그럼 내가 여기서 직접 뭔가 훈련하면, 그건 가져갈 수 있는 거지?" "[확인됩니다. 단, 반복 훈련의 강도와 기간에 비례하여 수치가 결정됩니다.]" 뭔가 게임 스킬 트리 같은 소리였다. 숙련도 게이지 채우면 스킬 레벨업, 딱 그 구조. 근데 나한테 남은 시간이 얼마나 있는지 그건 안 알려주네. "미완의 소원 완수까지 얼마나 걸려?" "[대상자의 판단과 개입 정도에 따라 유동적입니다.]" "그러니까 몰라?" "[모릅니다.]" 와, 인정하는 거 하나는 시원시원하네. 차라리 모른다고 딱 잘라 말하니까 콜센터보다는 양심적인 편인가 싶기도 했다. "그럼 하나만 더. 이 소원이라는 게, 이번 세계 한정인 거야, 아니면 계속 이어지는 거야?" "[해당 정보는 대상자의 접근 권한 밖입니다.]" 또 이런다. 뭐 하나 물으면 절반은 대답, 절반은 접근 권한 밖. 이거 무슨 국정원 정보공개 청구 결과 통지서 받는 기분이었다. "그럼 접근 권한은 어떻게 올려." "[해당 정보는 대상자의 접근 권한 밖입니다.]" 앵무새냐. "그리고 오드아이는 왜 생긴 거야. 계속 신경 쓰이는데." 이건 진짜 며칠 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던 거였다. 거울 볼 때마다 한쪽 눈은 낯선 파란색, 다른 쪽은 낯선 금빛으로 물들어 있는 걸 보면 기분이 묘했다. 남의 몸에 세 든 주제에 그 몸에서까지 흔적을 남기고 있다는 게, 뭐랄까, 월세 살면서 벽에 못질하고 도배까지 새로 한 느낌이었다. "[영혼 이동의 잔상입니다. 관찰자의 인지 능력에 따라 발견 여부가 결정됩니다.]" "조민석은 이미 발견한 것 같던데." 어제 진료실에서 마주쳤을 때, 조민석이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던 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 짧은 순간의 시선, 그게 그냥 착각이었으면 좋겠는데. "[해당 관찰자의 인지 위험도가 상승했습니다. 대응은 대상자의 몫입니다.]" 또 저 소리다. 뭐만 물으면 결국 니가 알아서 해라, 로 끝나는 이 무책임한 대답 패턴. 관공서 민원 전화 응대 매뉴얼을 이렇게 짤인가. "고객님 문의사항은 저희가 처리해드릴 수 없고, 고객님이 직접 해결하셔야 합니다." 딱 그 톤이었다. "강태현도 눈치챈 것 같은데. 이건 어떻게 해야 돼?" 강태현 얘기를 꺼내는데 목소리가 살짝 낮아졌다. 그 남자, 눈치가 빠른 건지 원래부터 사람 얼굴을 뚫어지게 보는 습관이 있는 건지, 지난주부터 자꾸 내 눈을 오래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처음엔 그냥 잘생긴 얼굴 감상하는 건가 싶어서 넘겼는데, 요즘은 그런 낭만적인 해석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다. 이번엔 아예 대답이 없었다. "야." "..." "어이, 시스템 아저씨." 정말로 침묵이었다. 형광등 깜빡이는 소리만 치직, 치직, 울렸다. [전도서 3:7,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지금은 니가 잠잠할 때가 아니라 대답할 때인데? 아무리 불러도 반응이 없었다. 진짜 나갔나. 아니면 저쪽도 나름의 서버 다운 시간이 있는 건가. 새벽 두 시부터 네 시까지는 점검 시간이라 이용 불가, 뭐 그런 식으로. 혼자 실없이 웅얼거리며 책상에 늘어져 있으려는데, 그때 진료실 문 쪽에서 미세한 소리가 들렸다. 달칵. 누가 병원 뒷문을 여는 소리였다. 몸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기 시작했다. 이 시간에 누가 왔지. 조민석은 오늘 쉬는 날이고, 다른 직원들도 이미 다 퇴근했는데. 병원 셔터도 내가 직접 내렸고, 뒷문 열쇠는 나랑 조민석 둘만 가지고 있는데. 나는 조용히 일어나 소리가 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슬리퍼 끄는 소리조차 크게 들릴까 봐 걸음을 최대한 죽였다. 진료실 문을 살짝 밀고 나가니 복도는 어두웠다. 대기실 쪽 창문으로 가로등 불빛만 희미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약품 보관실 쪽에서 불빛이 희미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저 방은 원래 조명을 켤 일이 거의 없는 곳이다. 재고 확인할 때나 잠깐 들어가는 정도. 그런데 지금 저 안에서 손전등 같은 흐릿한 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숨을 죽이고 조심스레 다가갔다. 복도 바닥이 낡아서 발을 조금만 잘못 디디면 삐걱대는 소리가 났다. 그걸 피해서, 벽에 붙어서, 발끝으로만 걸었다. 문틈으로 살짝 안을 들여다봤다. 조민석이었다. 쉬는 날인데 병원에, 그것도 이 시간에, 그것도 약품 보관실에 몰래 들어와 있었다. 표정이 평소의 그 넉살 좋은 얼굴이 아니었다.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초조하게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손에는 어제 내가 뺏은 것과 똑같은 종류의 병이 들려 있었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 인간, 어제 실패한 걸 오늘 밤 다시 시도하려는 건가. 머릿속이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어제 그 사건을 조용히 덮은 게 잘못이었나. 아니면 오늘 이렇게 다시 마주친 게 오히려 다행인 건가. 판단이 서질 않았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그의 다음 행동을 지켜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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