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복실이는 입원실 두 번째 칸에 자리를 잡았다.
감압관을 뺀 자리에 붕대를 감고, 링거 줄을 매달고, 세상 편한 얼굴로 늘어져 있었다.
개들은 참 좋겠다. 위가 뒤집어져도 저렇게 잘 수 있으니까.
나는 진료 기록을 정리하다가 문득 손을 멈췄다.
[시스템: 대상자의 첫 번째 처치가 성공적으로 완료되었습니다.]
[미완의 소원 조건 진행률: 12%]
12퍼센트. 배달앱 리뷰 이벤트도 이것보단 진행이 빠르겠다.
100개 채우면 아이스크림 하나 준다는 그 이벤트 말이다. 근데 나는 뭘 채우면 뭘 받는 건지도 모른다.
미완의 소원이라니, 이름부터 사기업 약관 같다. 조건은 안 알려주고 진행률만 던져주는 거, 이거 완전 통신사 요금제 아닌가.
차트를 넘기며 복실이 심박수를 다시 확인했다. 정상. 호흡도 정상. 수술 부위 출혈도 없다.
다행이다, 진짜로.
근데 이 다행이 오래갈 것 같지가 않았다.
"저기, 원장님."
조민석이 서랍 앞에서 나를 불렀다.
목소리는 부드러운데 눈은 웃지 않았다.
"약품 재고 정리하다가 유효기간 지난 게 몇 개 있어서요. 제가 처리할게요."
"그래요."
나는 대충 대답하고 다시 서류를 봤다.
근데 뭔가 이상했다.
유효기간 지난 약을 왜 저렇게 오래 들여다보지?
버릴 거면 그냥 버리면 되잖아.
마치 어떤 라벨이 다른 라벨로 바뀌길 기도하는 사람처럼, 조민석은 병 두 개를 나란히 세워놓고 한참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럴 리가.
설마 저 사람이 지금 뭘 하려는 거지?
나는 시선만 슬쩍 서랍 쪽으로 돌렸다. 조민석의 손가락이 병목을 잡고 살짝 돌리는 게 보였다. 라벨 방향을 맞추는 손짓이었다.
저건 유효기간 확인하는 자세가 아니다. 저건... 뭐랄까, 편의점에서 원 플러스 원 상품 위치 바꿔놓는 손짓이다.
근데 그게 왜 이렇게 소름 끼치지.
촤르르륵.
서랍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조민석의 손이 익숙하게 어떤 병을 집어 들었다.
라벨을 보니 '염화칼륨 주사액'이었다.
수의학 지식이 자동으로 튀어나왔다. 고농도 염화칼륨은 심정지를 유발하는 물질이다. 안락사에나 쓰는, 절대 함부로 주입해서는 안 되는 약.
심장 세포의 전기적 신호를 완전히 뭉개버리는 성분. 정맥으로 빠르게 들어가면 몇 분 안에 리듬이 멈춘다. 수의대 다닐 때 교수가 "이거 잘못 만지면 사람도 죽어" 하고 겁줬던 그 약이었다.
그런데 그 병이 지금, 다른 병의 라벨 옆에 서 있었다.
입원실 두 번째 칸 위에 걸린 이름표를 보니, 그 다른 병은 복실이에게 놓을 예정인 항생제였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요한복음 8:44,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라]
아니, 아직 안 죽였어. 죽이기 직전이지.
타이밍 참 예술적이다.
성경도 꼭 이런 타이밍에 끼어드는 거 보면, 위에서도 이 상황을 재밌게 구경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조민석 씨."
내 목소리에 조민석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거 왜 그렇게 들고 있어요."
"아, 이거요? 폐기하려고요."
조민석이 웃으며 병을 다시 서랍에 넣으려 했다.
손짓이 너무 빨랐다. 폐기할 사람이 이렇게 서두를 필요가 있나.
나는 그 손목을 붙잡았다.
"복실이 항생제 라벨이랑 똑같은 자리에 놓여 있던데. 헷갈리기 딱 좋은 배치네요."
"...우연이죠."
"우연이면 다행이고."
나는 병을 뺏어서 라벨을 확인했다. 염화칼륨, 농도 표기까지 진짜였다.
15% 농도. 이거 5cc만 정맥으로 밀어 넣어도 성인 남자 심장도 멈춘다. 강아지한테는 두 방울이면 충분했을 거다.
이걸 항생제인 척 놓았으면 복실이는 그대로 심정지였을 거다.
원작이었다면, 그러니까 이하준이 진짜로 이 사건을 감당했다면, 이 약이 정말로 들어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리고 책임은 전부 원장인 이하준한테 갔겠지.
의사면허 취소, 어쩌면 형사처벌까지.
뉴스에 대문짝만하게 실릴 거다. '유명 유튜버 반려견, 동물병원 의료사고로 사망'. 그 밑에 원장 얼굴 모자이크도 없이 박힐 거고.
OMG 이거 실화냐.
머릿속으로 그 기사 헤드라인까지 그려지고 나니까 손이 다 떨렸다. 병을 쥔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됐다.
진짜 죽을 뻔했네. 개도, 이 몸의 원래 주인도.
"강태현 씨가 SNS에 병원 이름 태그하면요."
조민석이 갑자기 딴소리를 했다.
"조회수가 폭발할 텐데, 그럼 원장님만 다 가져가는 거잖아요."
아, 이제야 그림이 그려졌다.
유명인 반려견 살리면 병원이 뜬다. 근데 그 공로를 조수는 하나도 못 챙긴다. 그러니까 사고를 만들어서 원장을 끌어내리고, 자기가 새 원장 자리에 앉겠다는 계산.
논리는 이해가 갔다. 근데 방법이 살인미수라는 게 문제였다.
회사에서 승진 안 시켜준다고 사장 커피에 뭐 타는 것도 아니고, 이건 스케일이 다르잖아.
"의료사고로 개를 죽여서 원장 자리를 뺏겠다는 거예요?"
"아니 그게, 그렇게 극단적으로 말하면..."
"극단적이 아니라 사실이잖아요."
나는 병을 손에 꽉 쥐었다.
"이거 신고하면 조민석 씨 인생 끝나는 거 알죠?"
조민석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빠졌다.
표정이 지워지는 속도가 마치 물걸레로 화이트보드 지우는 것처럼 깔끔했다.
"원장님도 사실 좀 이상하잖아요."
갑자기 반격이 날아왔다.
"눈도 그렇고. 어제까지랑 말투도 다르고. 사람이 하루아침에 이렇게 바뀔 수가 있어요?"
뜨끔했다. 이 새끼 그동안 눈치는 챙기고 있었네.
오드아이는 조명 각도 때문에 잘 안 보이길 바랐는데, 조수라는 놈이 매일 코앞에서 나를 보는데 안 걸릴 리가 있나.
생각해보니 어제 회진 돌 때도 얘가 내 눈을 유심히 봤던 것 같다. 그때는 그냥 눈 마주친 거라고 넘겼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관찰이었던 거다.
[시스템: 관찰자에게 이질적 특징이 인지되었습니다. 위험도 소폭 상승.]
건조하다 진짜. 위험도 상승했다고 통보만 하고 대책은 안 주는 이 무책임한 태도.
너는 그냥 상태창이잖아. 뭐라도 해결책을 좀 던져줘야 하는 거 아니냐.
답이 없다. 역시나.
"눈은 원래 이랬어요. 렌즈 뺀 거예요."
거짓말이 술술 나오는 게 스스로도 놀라웠다.
이 몸에 들어온 지 며칠 됐다고 벌써 임기응변이 이렇게 늘었나. 이러다 나중엔 거짓말 전문 변호사 부업도 뛸 수 있을 것 같다.
조민석은 반신반의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닌, 딱 중고나라 직거래 나갈 때 상대방 얼굴 표정이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저, 복실이 상태 좀 보러 왔는데요."
강태현이었다. 아직 안 갔구나. 병원 로비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손에는 편의점 커피 두 잔이 들려 있었다.
타이밍이 최악이거나 최고였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염화칼륨 병을 자연스럽게 가운 주머니에 숨겼다.
손목 스냅이 생각보다 매끄러웠다. 나 원래 이런 것도 잘했나.
"복실이 잘 자고 있어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아 다행이다..."
강태현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입원실 유리창에 얼굴을 붙였다.
숨을 쉴 때마다 유리창에 김이 서렸다가 사라졌다가 했다. 저 사람 진짜 이 개 없으면 죽는 사람처럼 보인다.
조민석은 그 틈에 슬쩍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조민석 씨."
내가 부르니 그가 얼음처럼 멈췄다.
"오늘 재고 정리는 제가 마무리할게요. 조민석 씨는 그냥 퇴근하세요."
"...네."
대답은 짧았지만 뒤통수에 꽂히는 시선은 길었다.
저 눈빛, 아무리 봐도 포기한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다음 수를 계산하는 표정에 가까웠다. 체스 두다가 한 판 진 사람이 "다음 판은 다르게 가야지" 하고 말판 다시 세팅하는 그런 눈.
조민석이 가운을 벗고 로비 쪽으로 사라지는 걸 지켜보면서, 나는 주머니 속 병의 무게를 다시 느꼈다.
작은 유리병 하나가 이렇게 무거울 수 있나. 이건 그냥 약병이 아니라 시한폭탄이었다.
강태현이 유리창 너머로 복실이를 보며 눈물을 훔쳤다.
"진짜 감사해요, 원장님. 저 애 없으면 저도 못 살아요."
그 말에 살짝 뭉클해질 뻔했다.
농담이다.
지금 내 주머니엔 살인미수 증거물이 들어 있고, 조수는 나를 의심하고 있고, 시스템은 위험도가 올라갔다고 통보만 하고 사라졌다.
뭉클할 여유가 어디 있냐.
강태현이 내민 커피 한 잔을 받아 들었다. 손이 떨려서 컵을 놓칠까 봐 두 손으로 꽉 쥐었다.
"원장님 손 왜 떠세요?"
"아, 저혈당이라."
또 거짓말. 이제 거짓말 자격증 따도 될 것 같다.
나는 주머니 속 병을 다시 한번 만지며 생각했다.
이건 그냥 오늘 하루의 위기가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될 문제라는 걸.
조민석은 오늘 실패했지만, 다음엔 더 조심스럽게 움직일 거다.
어쩌면 다음번엔 내가 눈치채지 못하는 방식으로, 훨씬 더 은밀하게.
그리고 나는, 이 몸의 원래 주인이 겪었을지도 모를 그 결말을 이미 봐버렸다.
강태현이 돌아간 뒤, 나는 텅 빈 진료실에 혼자 남아 그 병을 조명 아래 비춰봤다. 투명한 액체가 아무 죄도 없다는 듯 얌전하게 담겨 있었다.
이 작은 병 하나가 사람 인생 세 개를 동시에 끝낼 수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복실이 목숨, 이하준의 면허, 그리고 아마도 조민석 자신의 인생까지.
[시스템: 대상자의 개입으로 원본 타임라인의 사건이 변형되었습니다.]
[변형된 사건에 대한 후속 알림은 제공되지 않습니다.]
와, 진짜 끝까지 도움이 안 되네.
변형됐다고 알려줄 거면 어떻게 변형됐는지, 다음에 뭐가 기다리고 있는지도 좀 알려주지.
이런 식으로 사람 애태우면서 정보만 흘리는 거, 이거 완전 드라마 예고편 편집자가 시스템 뒤에 숨어 있는 거 아니냐.
병을 서랍 깊숙한 곳, 조민석이 절대 손댈 수 없는 잠금 칸에 넣고 열쇠를 채웠다.
철컥.
자물쇠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이걸로 오늘의 위기는 넘겼다. 근데 내일은? 다음 주는?
조민석이 저렇게 순순히 물러날 리가 없다는 걸, 나는 이미 저 눈빛에서 확인했다.
저 사람은 오늘 실패한 게 아니라, 오늘 배운 거다. 내가 어디까지 알아차리는지, 어디서부터 조심해야 하는지.
창밖으로 조민석의 뒷모습이 주차장 쪽으로 사라지는 게 보였다.
걸음걸이가 이상하게 여유로웠다. 방금 살인미수 현장을 들킨 사람 같지가 않았다.
저 여유는 뭐지.
설마 나 말고 다른 카드가 또 있는 건가.
등줄기가 다시 서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