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소환됐는데 축복이 없다니

4화

복도를 걷는 동안 강목현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돌바닥에 부딪히는 갑옷 소리만 규칙적으로 울렸다. 철컹, 철컹. 그 소리가 마치 시계추 같았다. 초침이 아니라 사형 집행까지 남은 시간을 재는 것 같은. 나는 그 소리 사이로 서아의 발소리를 들으려 애썼다. 운동화 밑창이 돌바닥에 부딪히는 소리, 숨소리, 뭐라도. 하지만 서아는 이미 다른 복도로 끌려간 뒤였다. 복도는 갈라지고 또 갈라졌다. 어느 쪽으로 갔는지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돌벽에서는 오래된 종이 냄새 같은 게 났다. 습기와 곰팡이, 그리고 아주 오래전에 누가 이곳에서 죽었을 것 같은 냄새. 나는 그 냄새를 맡으면서 계속 걸었다. "저희 둘, 같이 심문받는 거 아니에요?" "따로 진행된다." 강목현의 대답은 짧았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딱 필요한 만큼만. 뭔가 불안했다. 같이 있으면 그나마 마음이 놓였을 텐데, 따로라니. ···이 새끼들, 애초에 우리를 갈라놓으려고 순서를 짠 건가. 겁을 준다는 게 이런 식이구나. 같이 있어도 무서운 상황인데 혼자 두면 더 만만해 보일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잠깐만요, 서아는 어디로 가는 건데요." "멈추지 마라." 강목현의 목소리에는 아무 감정도 없었다. 명령이 아니라 그냥 사실을 말하는 투였다. 문 열어라, 물 마셔라, 하는 것과 똑같은 어조로. 그게 오히려 더 소름 돋았다. 사람을 위협하는 목소리가 아니라 기계가 대답하는 목소리였다. 나는 주위를 살폈다. 좌우로 뻗은 복도, 앞쪽에 서 있는 강목현, 뒤쪽엔 또 다른 성기사 둘. 도망칠 구석이 있을까. 없었다. 그런데도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 순간 나는 앞을 막고 있는 강목현의 팔 아래로 몸을 숙였다. 좁은 틈을 비집고 복도를 달렸다. 뒤에서 욕설이 들렸다. "저 새끼 잡아!" 달렸다. 낯선 복도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랐다. 그냥 이 방향이 서아가 끌려간 방향과 비슷해 보였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발바닥이 돌바닥에 닿을 때마다 짧고 날카로운 통증이 종아리를 타고 올라왔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것처럼 뛰었다. 등 뒤로 갑옷 소리가 쫓아왔다. 철컹, 철컹, 철컹. 아까보다 훨씬 빠른 박자였다. ···잡히면 어떻게 되는 거지. 생각할 틈도 없었다. 그냥 이 복도를 지나면, 다음 복도를 지나면, 서아가 있을 것 같았다. 근거는 없었다. 그냥 그렇게 믿고 싶었을 뿐이었다. 계단을 두 개 정도 내려갔을 때, 앞쪽 모퉁이에서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피할 새도 없었다. 퍽. 뭔가 단단한 것이 내 얼굴을 후려쳤다. 망치였다. 강목현이 어느새 앞질러 와 있었다. ···언제 저기까지 간 거야. 분명히 방금 내 뒤에서 쫓아오고 있었는데. 다른 통로로 지름길을 알고 있었던 건가, 아니면 애초에 나를 잡을 위치를 미리 계산해 놓았던 건가. 시야가 하얗게 번쩍였다. 그 짧은 순간, 세상이 온통 새하얀 빛으로 가득 찼다가 다시 어두워졌다. 이명이 귓속에서 삐이익 울렸다. 쓰러진 채로 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입안에 피 맛이 퍼졌다. 쇠맛과 비릿한 맛이 뒤섞인, 이상하게 익숙해지고 있는 맛. 철퍽. 코와 입에서 피가 흘러 돌바닥을 적셨다. 붉은 얼룩이 회색 돌바닥 위로 번져나가는 걸 보면서 나는 잠깐 멍하니 그것만 쳐다봤다. 정신이 나가서 그런지, 이 상황에서도 그 무늬가 예쁘다는 생각이 스쳤다. 망할, 지금 그게 눈에 들어올 때가 아닌데.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강목현의 목소리는 화가 난 것도 아니고 그냥 무심했다. 마치 물건을 옮기는 사람 같았다. 짐짝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짐짝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사람 같았다. 그게 더 무서웠다. 화를 냈으면 오히려 안심됐을 것 같다. 적어도 감정이 있다는 뜻이니까. 그런데 저 사람은 그냥 내가 도망친 게 예정된 일정에 없던 잡무 하나 늘어난 정도로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그가 내 팔을 잡아 일으켰다. 다리가 풀려 제대로 서지 못했다. 반쯤 끌려가는 채로 걸었다. 발끝이 바닥에 질질 끌리는 소리가 났다. 입에서 계속 피가 흘렀다. 턱을 타고 흘러 목덜미까지 적셨다. ···서아를 찾으려다 이 꼴이라니.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소환된 지 며칠도 안 됐는데 벌써 두 번째로 얻어맞는 건가. 이러다 대심문회 가기도 전에 얼굴이 걸레짝 되겠는데. 끌려가는 동안 복도의 벽화들이 눈에 들어왔다. 성인들의 그림, 후광을 두른 인물들, 그리고 그 아래 무릎 꿇은 사람들. 전부 경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저런 표정 절대 못 지을 것 같은데. 끌려간 곳은 넓은 원형 홀이었다. 천장이 높고 스테인드글라스로 된 창이 있었다. 색유리를 통과한 빛이 바닥에 무늬를 그렸다. 붉고 푸른 빛이 뒤섞여 마치 피와 얼음이 함께 흩뿌려진 것 같은 모양이었다. 그 무늬 위에, 붉은 종교복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키가 크고 머리가 은발이었다. 눈빛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공기 자체가 다르게 느껴졌다. 방금까지 지나온 복도보다 온도가 훨씬 낮은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 낮은 게 아니라 저 남자가 서 있는 것만으로 공기가 무거워진 걸지도 모른다. "내가 대주교 조광일이다." 낮고 울리는 목소리였다. 목소리 자체에 무게가 실려서, 그냥 듣고 있기만 해도 어깨가 눌리는 느낌이었다. "이준서 소환자." 그가 내 얼굴을, 정확히는 피가 흐르는 입가를 내려다봤다. 그 눈빛에는 동정도, 놀람도 없었다. 그냥 대상을 확인하는 눈이었다. "강목현, 얼굴은 왜 이렇게 만들었나." "도주를 시도했습니다." "···그래." 조광일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사람 얼굴이 이렇게 됐는데도, 마치 배송 온 물건 포장이 조금 찢어진 정도로 취급하는 어조였다. "본론만 말하겠다. 너희는 축복이 없다." "저희가 뭘 잘못한 게 아니라—" "들어라." 조광일의 목소리가 커지지 않았는데도 방 전체가 조용해졌다. 심지어 내 심장 소리까지 줄어든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신은 실수하지 않는다. 축복이 없다는 건 네가 신의 소환에 응답할 자격이 없다는 뜻이거나, 애초에 신이 부르지 않은 존재가 소환의 틈을 타 숨어들었다는 뜻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등골에 소름이 쫙 돋았다. 자격이 없다는 것도 무서운데, 숨어들었다는 표현은 거의 침입자, 아니 벌레 취급이었다. ···내가 여기 오고 싶다고 온 것도 아닌데. "저는 그냥 다른 애들이랑 같은 날 같은 장소에 있다가 끌려온 거예요." "그게 사실인지 확인하는 절차가 대심문회다." 말은 담담했지만, 확인이라는 단어가 이상하게 불길했다. 확인이라는 말 뒤에 뭐가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으니까. "닷새 뒤라고 들었는데요." "결정이 바뀌었다." 조광일이 처음으로 살짝 미소를 보였다. 웃는 게 아니라 그냥 입꼬리가 올라갔을 뿐이었다. 그 미소가 오히려 더 소름 끼쳤다. 사람이 웃는 표정을 하고 있는데, 그 안에 어떤 온기도 없다는 게 이렇게 무서울 수 있구나. "지금부터 시작한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윤서아 소환자는 이미 다른 심문실로 이동했다. 너는 이쪽이다." 서아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저쪽도 지금 이런 방에서, 이런 눈빛을 받고 있는 건가. 혼자서, 아무도 없이. 강목현이 나를 다시 붙잡아 세웠다. 손아귀 힘이 아까보다 더 세졌다. 이번에는 도망갈 틈조차 주지 않겠다는 뜻인 것 같았다. 원형 홀 반대편에 작은 철문이 있었다. 그 문 너머에서 낮은 신음 같은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니, 그냥 내 심장 소리였는지도 모른다. 너무 크게 뛰어서 그게 밖에서 나는 소리처럼 느껴진 걸지도. 【대심문회 개회를 선언합니다. 심문 대상, 이준서.】 어디선가 그 건조한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사무적이고 무미건조한 어조, 마치 회의 시작을 알리는 안내 방송 같았다. 망할, 이게 재판이야, 회의야. 조광일이 앞장서 걸었다. 망토가 바닥을 스치며 사각거렸다. 그 소리조차 위압적으로 들렸다. 나는 강목현에게 끌려 그 뒤를 따랐다. 다리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철문이 천천히 열렸다. 경첩에서 낮은 마찰음이 났다. 끼이이익. 안쪽은 어둡고 좁았고, 중앙에 의자 하나만 놓여 있었다. 의자 위쪽 벽에 쇠사슬이 걸려 있는 게 보였다. 녹슨 쇠사슬이 벽에 부딪혀 흔들리며 나는 작은 쇳소리가 들렸다. 다리가 떨렸다. 이건 그냥 질문 몇 개 받는 자리가 아니었다. 저 쇠사슬은 애초에 대답을 듣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대답을 강제로 뽑아내기 위한 도구처럼 보였다. 강목현이 나를 그 의자 쪽으로 밀었다. 발이 문턱을 넘는 순간, 등 뒤에서 철문이 다시 닫히는 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콰앙.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