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소환됐는데 축복이 없다니

1화

야자가 끝난 건 밤 열 시 반이었다. 형광등 불빛 아래서 반쯤은 졸고 반쯤은 문제집을 붙잡고 있던 애들이 하나둘 자리를 정리했다. 나도 가방을 챙기며 목을 두어 번 꺾었다. 교문을 나서자마자 윤서아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준서야, 떡볶이." "방금 저녁 먹었잖아." "저녁은 저녁이고 떡볶이는 떡볶이지." 밤색 머리를 하나로 묶은 서아가 씩 웃었다. 그 웃음에는 거절권이 없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봐온 웃음이라 더 그랬다. 나는 별수 없이 지갑을 열었다. 분식집 안은 늦은 시간에도 손님이 제법 있었다. 매콤한 냄새가 김을 타고 얼굴에 확 끼쳤다. 둘이 나눠 먹은 떡볶이가 오천 원, 튀김 세 개가 이천 원이었다. 서아는 어묵 국물까지 두 그릇을 리필해서 마셨다. "너 그러다 배 터진다." "국물이 남으면 죄악이야." 그런 대화를 나누며 나는 마지막 남은 떡볶이 조각을 서아 앞으로 밀어줬다. 그게 내가 이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쓴 돈이었다. 그때는 당연히 몰랐다. 분식집을 나와 골목을 걷는데 하늘이 이상했다. 평소보다 밝다고 느낀 게 먼저였다. 달이 두 개로 보였다. "저거 뭐야." 서아가 먼저 하늘을 가리켰다. 목소리에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나도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달 두 개가 겹쳐지듯 가까워지고 있었다. 크기가 점점 커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심장이 이상하게 빨리 뛰기 시작했다. 서아 손을 잡으려던 순간이었다. 번쩍. 세상이 하얗게 지워졌다. * * * 눈을 떴을 때 나는 풀밭 위에 누워 있었다. 등이 축축했다. 하늘은 회색이었고 바람에서 쇠 냄새가 났다. 피 냄새였다. 살짝 비릿하고 눅눅한, 처음 맡아보는 종류의 냄새였다. 일어나 앉으니 사방에 사람들이 있었다. 교복을 입은 애들, 사복을 입은 애들, 심지어 잠옷 차림도 있었다. 누군가는 슬리퍼 한쪽만 신고 있었고 누군가는 신발도 없이 맨발이었다. 다 합쳐 수백 명은 되어 보였다. 저마다 웅성거리며 자기 몸을 만져보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몇몇은 그냥 얼어붙어 있었다. "여기 어디야." "꿈이야, 이거 꿈이지." 누군가 울먹이는 소리도 들렸다. "준서야!" 서아가 내 쪽으로 뛰어왔다. 머리끈이 반쯤 풀려 밤색 머리카락이 흩어져 있었다. 다친 데는 없어 보였다. 다행이었다, 진짜로. 서아는 내 팔을 두 손으로 꽉 붙잡았다. 손이 차가웠다. 주위를 둘러보니 우리는 어떤 평원 한가운데 있었다. 풀은 무릎까지 자라 있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파도처럼 눕고 일어섰다. 멀리 성벽처럼 보이는 구조물이 있었고, 그 앞에 황금빛 갑옷을 입은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갑옷은 반짝였는데 표면이 매끄러운 금속판이었다. 게임에서 보던 판금 갑옷보다 훨씬 정교했다. 칼을 든 사람도 있고 창을 든 사람도 있었다. 그들의 자세는 흐트러짐 하나 없이 일정했다. 군대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전부 정렬하십시오.] 어디선가 커다란 목소리가 울렸다. 사람이 아니라 어떤 거대한 스피커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일어섰다. 나도 서아와 함께 일어섰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버텼다. 그때 하늘에서 빛의 기둥이 떨어졌다. 촤아아악. 한 줄기가 아니라 수십, 수백 줄기였다. 빛은 곧게 떨어지다가 사람들 몸에 닿는 순간 부드럽게 퍼졌다. 그 빛이 사람들 몸에 닿을 때마다 뭔가 반짝하고 빛나는 문양이 팔이나 가슴에 새겨졌다. 문양은 저마다 달랐다. 칼 모양도 있었고 불꽃 모양도 있었고 알 수 없는 기하학적 문양도 있었다. 주변에서 탄성이 터졌다. "이게 뭐야, 몸이 이상해!" "나 검이 보여! 내 손에서 검이 나와!" 누군가는 자기 손바닥에서 불꽃이 피어오르는 걸 보고 소리를 질렀고, 누군가는 갑자기 몸이 반투명해졌다가 돌아오는 걸 보고 주저앉았다. 게임 이펙트 같은 광경이었는데, 문제는 이게 게임이 아니라는 거였다. 나는 내 팔을 내려다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가슴도, 손등도, 다 멀쩡한 맨살이었다. 서아도 자기 손을 폈다 접었다 하고 있었다. "준서야, 나… 아무것도 안 생겼어." 목소리가 떨렸다. 나도 뭐라 대답할 말이 없었다. 빛이 우리를 그냥 비켜간 것처럼, 우리 둘만 아무 일도 없었다. [이것이 신의 축복입니다.] 다시 그 목소리가 울렸다. 사무적이고 건조한 톤이었다. 마치 안내 방송 같았다. [축복을 받은 자들은 오른쪽으로, 받지 못한 자들은 그대로 계십시오.] 순식간에 대부분이 오른쪽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자기 팔에 새겨진 문양을 신기하다는 듯 만져보며, 서로 뭐가 생겼는지 비교하며, 흥분한 얼굴로 몰려가는 사람들. 그 물결이 지나가고 나니 남은 건 열댓 명 정도였다. 나와 서아도 그 안에 있었다.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왠지 모르게 등줄기가 서늘했다. 남은 사람들끼리 서로 눈치를 봤다.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군가 작게 중얼거렸다. "우리… 뭔가 잘못된 거 아니야?" 그 말에 몇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갑옷 입은 사람 하나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남자였다. 발걸음마다 갑옷이 철컹거리는 소리를 냈다. 허리에 커다란 망치를 매달고 있었는데, 그 크기가 내 상체만 했다. "움직이지 마라." 낮고 위압적인 목소리였다. 나는 그 눈빛에서 뭔가 심상찮은 걸 느꼈다. 동물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사람을 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축복 없는 자들은 별도로 관리한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뒷걸음질을 쳤다. 뭔지 모르겠지만 저기 가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냥 본능이었다. 머릿속에서 경보가 울리는 것 같았다. 서아 손을 잡고 반대쪽으로 달렸다. 풀숲을 헤치며 뛰는데 다리에 온갖 게 걸리는 느낌이었다. "거기 서라!" 등 뒤에서 발소리가 쫓아왔다. 무거운 갑옷을 입고도 빠른 속도였다. 말도 안 됐다. 저 무게로 저 속도가 나온다는 게.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서아도 숨을 헐떡이며 내 손을 놓지 않고 따라왔다. "준서야, 못 뛰겠어…" "조금만 더!" 얼마 못 가 앞을 막아섰다. 또 다른 갑옷 입은 남자였다. 흰 검을 든, 조금 더 젊어 보이는 인상이었다. 표정에는 아무 감정이 없었다. 그냥 절차를 처리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허튼짓 마라." 검끝이 목 앞에 닿았다. 차가운 감촉이 목덜미를 스쳤다.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서아가 내 뒤에서 숨을 삼켰다. 등 뒤로 서아의 심장 소리가 느껴질 정도로 가까웠다. 나는 두 손을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얌전히 있었을 텐데. 도망 한 번에 이렇게 빨리 잡힐 줄은 몰랐다. 결국 우리는 다시 끌려갔다. 망치 든 남자가 우리를 훑어보더니 짧게 명령했다. "수용소로." 그 말 한마디에 우리는 짐짝처럼 어딘가로 옮겨졌다. 걷는 내내 아무도 우리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질문에 답해줄 사람도 없었다. 밤이 되자 우리는 나무판자로 지은 허름한 건물에 갇혔다. 바닥에는 지푸라기 같은 게 깔려 있었고 벽 틈으로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창문 밖으로 저 멀리 성벽이 보였다. 불빛이 새어 나오는 창문 몇 개가 그 위에서 반짝였다. 저 안에는 뭐가 있을까. 아니, 그보다 우리는 왜 저기 못 들어가는 걸까. 서아가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있었다. "준서야, 우리 어떻게 되는 거야." 대답할 말이 없었다. 나도 무섭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서아가 더 무서워할 것 같아서 참았다. 같은 건물 안에 우리 말고도 여덟 명 정도가 더 있었다. 다들 벽에 등을 붙이고 앉아 서로 말을 아꼈다. 누군가는 소리 없이 울고 있었고, 누군가는 멍하니 천장만 보고 있었다. 아무도 다음에 뭐가 벌어질지 몰랐다. 그 모름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그날 밤 나는 한숨도 못 잤다. 건물 밖에서 발소리가 계속 오갔다. 간간이 갑옷 부딪히는 소리와 낮은 대화 소리가 들렸는데,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낮에 들었던 그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계속 울렸다. 축복 없는 자. 그 말이 왜 그렇게 무섭게 들렸는지,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문이 벌컥 열리며 한 사람이 명단을 들고 들어왔다. 햇빛이 등 뒤에서 쏟아져 들어와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손에 든 종이가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축복 없는 자 전원, 지금부터 별도 심사를 진행한다." 목소리에는 억양도, 감정도 없었다. 그냥 그렇게 정해진 일이라는 듯한 말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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