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밤이 깊었다. 병실 안에는 오직 본좌 혼자였다. 창밖으로는 도시의 불빛이 마치 은하수처럼 흩뿌려져 있었으니, 참으로 낯설고도 요망한 풍경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세 여인은 저마다의 사정으로 돌아갔으니, 민지는 학교 과제를 핑계 삼아, 서연은 밝히지 않은 무언가를 위해, 하윤은 다음 순번을 위해 잠시 쉬러 갔다. 세 사람 모두 본좌를 지키겠노라 다짐한 듯한 눈빛이었으나, 지금은 각자의 자리로 흩어진 채였다.
'참으로 기이한 밤이로다.'
병실의 침상은 딱딱하고, 이불은 얇았다. 본좌는 몸을 뒤척이며 낮에 보았던 그림자를, 그리고 낮에 들었던 이야기들을 곱씹었다.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본좌는 홀로 천장을 바라보며 영판을 다시 불러내었다.
"영판이여, 그대의 원리를 다시 짚어보고자 하노라."
[알림: 시스템은 명령어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알림: 스스로 시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요망한 판이로다."
본좌는 헛웃음을 지었다. 마치 무공 비급을 앞에 두고도 첫 장부터 알아먹지 못하는 초학자의 심정과 같았으니, 참으로 곤란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무릇 무공을 익힘에도 처음에는 헤아릴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손발을 더듬는 법이었으니, 이 또한 그와 같은 이치이리라.
본좌는 눈을 감았다. 손끝으로 이불을 움켜쥐고, 마치 참선하는 노승처럼 호흡을 가라앉혔다. 하나, 둘, 셋... 숨을 고르며 컨벤션에서의 그 순간을 다시 떠올려보려 하였다. 무언가 밝은 빛, 사람들의 함성, 그리고... 손에 쥐고 있던 무언가.
'그것이 무엇이었더냐.'
기억은 안개 속에 잠긴 듯 흐릿했다. 마치 강호의 절정 고수가 남긴 무공 비급이 세월에 낡아 글자가 뭉개진 것과 같았으니, 읽으려 해도 읽을 수가 없었다.
'포커스 참.'
그 이름이 떠오르는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반응했다. 마치 봉인된 혈도가 갑작스레 풀리는 듯한 감각이었다.
[알림: 봉인된 기억의 파편 1개를 발견했습니다.]
[알림: 회수하시겠습니까?]
"회수하겠노라!"
본좌가 소리치자, 눈앞이 순식간에 아득해졌다. 마치 폭포수 속으로 뛰어드는 듯한 감각이 전신을 휘감았다. 귓가에는 물소리가 울리는 듯하였고, 온몸이 붕 뜨는 듯한 기묘한 부유감이 엄습해왔다.
***
환영 속에서, 본좌는 컨벤션 부스 앞에 서 있었다. 화려한 코스튬을 입은 자들 사이로, 붉은 눈동자를 가진 여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주변에는 형형색색의 깃발과 조명이 걸려 있었고, 낯선 복식을 한 자들이 웃음소리를 흩날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참으로 정신이 어지러운 마경(魔境)*이었다.
*마경: 요사스러운 기운이 가득한 곳
그 얼굴은... 유진이었다.
"지훈아. 나야."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그 눈빛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붉은 기운이 스며 나왔으니, 마치 피가 흐르는 듯한 색채였다. 그 기운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손끝에서 넘실거리며 허공을 향해 뻗어 나갔다.
"너 없인 못 살아. 알잖아."
그녀의 음성 속에는 애원과 원한이 뒤섞여 있었다. 본좌는 그 목소리에서 무언가 섬뜩한 예감을 느꼈으니,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긴장감이 전신을 감쌌다.
"유진아, 이제 그만..."
환영 속의 본좌가 말을 이어가려 하였으나, 그 순간 유진의 눈동자에서 빛이 번쩍이며 장면이 흐트러졌다. 마치 거울이 산산조각 나는 듯한 파열음이 귓속을 울렸다.
[알림: 기억 파편이 불완전합니다.]
[알림: 추가 회수를 위해선 조건이 필요합니다.]
환영이 사라지고, 본좌는 다시 병실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온몸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심장은 마치 전마(戰馬)*가 달리는 듯 쿵쾅거렸고,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전마: 전쟁터를 달리는 말
"허어..."
숨을 몰아쉬며 본좌는 방금 본 것을 되새겼다. 유진이라는 여인, 그리고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온 그 붉은 기운. 그것은 단순한 마력이 아니었다. 무언가 인간의 것이 아닌, 흡혈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다.
'그 여인이 살아있다는 뜻이로구나.'
본좌는 이불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왔다.
그리고 그것이 결코 안전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도, 본좌는 어렴풋이 직감하고 있었다. 마치 화산이 겉으로는 잠잠하나 속으로는 용암을 끓이고 있는 형국이었으니, 언제 폭발할지 알 수 없는 위태로움이었다.
[알림: 봉인된 기억의 파편이 3개 남았습니다.]
[알림: 각 파편은 감정적 충격이 클 때 자동으로 열릴 수 있습니다.]
"흠, 그렇다면..."
본좌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침상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병실 안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 창밖을 바라보았다. 낮에 보았던 그 그림자가 다시 떠올랐다. 긴 머리를 늘어뜨린 여인의 실루엣.
'설마 그것이...'
확신할 수는 없었으나, 불길한 예감이 가슴 한쪽에 자리 잡았다. 유진이라는 이름과 그 그림자가 자꾸만 겹쳐 보였다. 마치 두 개의 그림이 하나로 겹쳐지는 듯한 착란이었으니, 본좌는 눈을 몇 번이나 비볐다.
그때, 병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문틈으로 새어 나온 복도의 불빛이 어둠 속에 한 줄기 선을 그렸다.
"...아직 안 자?"
서연이었다. 그녀는 어두운 병실 안으로 조심스레 들어와 침대 옆에 앉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옅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서연아, 방금 무언가를 보았느니라."
"뭘."
"유진이라는 여인. 붉은 기운을 다루는 자였다."
서연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본좌는 놓치지 않았다.
"...기억이 돌아왔어?"
"일부이니라. 파편이라 하더군."
서연은 잠시 침묵하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무거운 것이 실려 있었다.
"유진은... 지금도 위험해. 아직 안 죽었어. 아니, 오히려 더 강해졌어."
"뭣!"
본좌가 놀라 소리쳤다. 서연은 손가락을 입에 대며 목소리를 낮췄다.
"조용히 해. 애들 깨."
"허나, 유진이 어찌 강해졌단 말이냐."
서연은 대답 대신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따라 본좌도 고개를 돌렸다.
병실 안은 순식간에 정적에 잠겼다. 오직 심전계의 규칙적인 삑- 삑- 소리만이 무거운 공기를 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다시 그 그림자가 있었다. 이번엔 확실히, 창문 바로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드러난 그 형체는, 사람인지 아닌지조차 분간이 어려운 기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봤지."
서연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두려움과 익숙함이 뒤섞여 있었다.
"보았느니라."
두 사람의 시선이 그림자에 고정된 순간, 그림자는 천천히 손을 들어 창문을 가리켰다. 그리고 입 모양으로,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읽을 수 없었으나, 본좌는 그 입 모양이 만들어낸 형체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곧 만나자.'
병실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본좌는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서늘한 기운을 느끼며, 그 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