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혼수남의 세 연인

1화

쏴아아- 창밖으로 빗소리가 스쳐 지나가는도다. 본좌*本座: 스스로를 높여 이르는 말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새하얀 천장이었다. 낯설고도 삭막한 천장이었으니, 마치 대적을 앞두고 눈을 감았다가 뜬 순간과도 같았다. '이곳이 어디인가.' 기억을 더듬으려 하였으나, 머릿속은 온통 안개가 자욱한 계곡과 같았다. 분명 서울코믹페스티벌*무림대회: 천하 각지의 협객들이 모여드는 큰 행사이라는 곳에서 무언가 대단한 것을 마주하였다는 감각만이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그 이후로는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천장 한켠에는 작은 등이 붙어 있었는데, 저것은 촛불도 아니요 등롱도 아니었다. 빛이 흔들리지도 않고 그저 정직하게 밝기만 하니, 참으로 요망한 광명이로다. 벽에는 알 수 없는 관이 이리저리 꽂혀 있었고, 팔목에는 차가운 무언가가 붙어 있어 삐빅- 삐빅- 소리를 내고 있었다. 필시 진법의 일종이거나, 혹은 사혈을 짚어 기를 흡수하는 마도의 술법일 것이라 여겼다. "...지훈아?" 귓가에 파고드는 여인의 음성. 작고 다급한 그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파랗고 검은 머리를 양갈래로 흩날리며 다가서는 여인이 있었다. 낯이 익었다. 익다 못해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왈칵 솟구쳤다. "...민지냐."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가 스스로도 낯설었다. 오래도록 쓰지 않은 검처럼 서걱거렸다. "야, 야! 정신 들어?! 나 알아보겠어?!" 민지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녀는 내 손을 붙잡고 흔들며 소리쳤다. 본좌는 그 손길이 낯설지 않으면서도 어딘가 아득한 거리감을 느꼈으니, 마치 백 년의 세월을 건너온 듯한 기분이었다. "한 달이야. 한 달이나 안 일어났어, 이 자식아." "한 달이라니..." 본좌는 눈살을 찌푸렸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통째로 사라졌다는 것인가. 무당산에서 면벽수련*面壁修練: 벽을 마주하고 수행함을 하던 시절에도 이런 공백은 없었느니라. '허나 본좌는 무당산에 간 적이 없거늘.' 순간 기묘한 위화감이 스쳤다. 어찌하여 본좌의 머릿속에는 무당산이니 검법이니 하는 말들이 이토록 자연스럽게 떠오르는가. 마치 전생의 기억이 뒤섞인 것처럼 말이다. '허나 그렇다면 본좌는 대체 누구인가. 검을 쥔 자인가, 아니면 이 병상에 누운 자인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마치 두 개의 산맥이 하나의 봉우리 속에서 충돌하는 듯한 통증이었다. "의사 선생님! 여기요! 깨어났어요!" 민지가 문 밖으로 소리치자, 백의를 두른 자들이 우르르 들이닥쳤다. 저들은 스스로를 의원이라 부르지 않고 '의사'라 칭하였으나, 본좌의 눈에는 그저 백의를 걸친 약재상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손에는 침도 아니요 부적도 아닌, 가느다란 은빛 막대와 작은 판이 들려 있었다. "환자분, 여기 보세요. 눈동자 좀 볼게요." 낯선 손길이 눈꺼풀을 강제로 벌리며 작은 빛을 비추었다. 본좌는 반사적으로 그 손을 쳐낼 뻔하였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팔 하나 들어 올리는 것조차 태산을 짊어진 듯 무거웠다. '이 무슨 괴변인가.' 본좌의 육신이 이토록 무력하였던가. 손가락 하나로 산을 가르던 그 힘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아니, 애초에 본좌가 손가락 하나로 산을 가른 적이 있었던가? 생각할수록 머릿속이 뒤엉켰다. 마치 두 개의 인생이 하나의 그릇에 억지로 담긴 듯한 느낌이었다. "동공 반사는 정상이네요. 팔다리는 좀 움직여보세요, 지훈 씨." 의사라는 자가 무심히 말하니, 본좌는 시험 삼아 오른손 손가락을 하나씩 꼽아 보았다. 엄지, 검지, 중지... 참으로 굼뜬 움직임이었다. 마치 갓 태어난 망아지가 첫걸음을 떼는 것과 같았으니, 본좌의 자존심이 크게 상하는도다. "환자분, 이름이 뭐예요?" "...지훈이니라." 말이 그렇게 나갔다. 본좌 자신도 놀랄 정도로 자연스럽게, 고졸한 어투가 흘러나온 것이었다. 의사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옆의 간호사와 시선을 교환했다. "...지훈, 지훈 씨. 오늘이 며칠인지 아세요?" "모르느니라." "이름 말고 성은?" "김지훈이니라." 또 그렇게 나갔다. 본좌는 스스로의 입을 원망스레 바라보고 싶었으나 입은 얼굴에 붙어 있어 그럴 수도 없었다. 어찌 입이란 놈이 뇌의 명을 거역하고 제멋대로 고풍스러운 언사를 뱉어내는지, 참으로 하극상*下剋上: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침범함이 아닐 수 없었다. "...선생님, 이거 좀 이상한데요." 간호사가 조심스레 속삭였다.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차트에 무언가를 적어 넣었다. "뇌 쪽 검사를 좀 더 해봐야 할 것 같아요. 혹시 두통이나 어지러움 있으세요?" "어지럽... 지는 아니하나, 머릿속이 두 채의 집처럼 나뉘어져 있는 듯하느니라." 의사의 손이 잠시 멈췄다. 간호사도 펜을 떨어뜨릴 뻔한 듯 눈을 크게 떴다. 본좌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검사라니, 본좌의 정신에 어찌 검사라는 것이 필요하단 말인가. 이는 그저 오랜 폐관수련*閉關修練: 문을 닫고 수행함 뒤의 어색함일 뿐이니라. '허나...' 허나 기억이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컨벤션이라는 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찌하여 이토록 오랜 시간을 잃어버렸는지, 그 무엇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조각은 어떤 거대한 빛, 그리고 귓가를 찢을 듯한 소리뿐이었다. 그것이 벼락이었는지, 혹은 무언가의 포효였는지조차 분간이 되지 않았다. 의료진이 이런저런 것들을 눌러보고, 팔뚝에 무언가를 감아 조였다가 풀기를 반복하더니, 이내 알 수 없는 숫자들을 중얼거리며 물러갔다. 본좌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생각하였다. 저들이야말로 본좌가 알지 못하는 낯선 문파의 제자들이 아닐까 하고. 민지의 눈이 다시 붉어졌다. 그녀는 의료진이 물러난 뒤에도 내 손을 놓지 않았다. 그 손의 온기가 본좌의 차가운 손가락 하나하나에 스며드는 듯하였다. "지훈아... 진짜 무서웠어. 안 일어날까 봐..." "...본좌는..." 말을 이으려던 순간, 민지의 얼굴에 눈물이 그치지 않고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며 애써 웃으려 했으나, 웃음이 채 완성되지도 못한 채 다시 무너져 내렸다. "바보야. 왜 갑자기 그런 말투를 써. 사극 찍냐." "...이것이 어찌 사극이란 말이냐. 본좌의 본연의 언사이니라." "미쳤나 봐, 진짜." 민지가 헛웃음을 흘리며 다시 눈물을 닦아내는 순간, 창밖에서 무언가가 흔들리는 것을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의 형체 같기도, 그저 나뭇가지의 흔들림 같기도 한 그림자였다. 본좌가 고개를 돌리자 그 그림자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무엇이었을꼬.' 민지는 눈치채지 못한 듯 여전히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본좌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으나 그곳엔 그저 흐린 하늘과 빗줄기뿐이었다. 유리창에 부딪히는 빗방울들이 마치 무언가의 발소리처럼 들리는 것은 본좌의 착각이었을까. '대체 본좌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기억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그리고 그 공백 속에서, 무언가가 본좌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불길한 예감만이 남아 있었다. 마치 폭풍 전야의 고요함처럼, 이 병실의 백색 천장 아래로 무언가 거대한 것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듯한, 그러한 예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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