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거절하세요."
서은이 딱 잘라 말했다. 한 치의 고민도 없는 즉답이었다.
"당연히 거절할 건데, 이거 계속 오는 거예요?"
책상 위에 쌓인 서신들을 보면서 나는 한숨을 쉬었다. 벌써 다섯 통째였다. 하나같이 화려한 인장이 찍혀 있고, 하나같이 정중한 문체로 시작해서 결국은 같은 결론으로 끝났다. 만나달라, 차 한 잔 하자, 가문의 미래를 논하자. 요즘 세상이었으면 스팸 필터에 걸릴 만한 내용들이었다.
"전하께서 명시적으로 금지하신 상대들이 왜 자꾸 접근하는지가 문제죠."
조미란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후작부인 유채영과 백작부인 임서희. 백은설이 직접 이름을 언급하며 나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경고한 두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계속 사람을 보내는 걸 보면, 뭔가 노림수가 있는 게 분명했다.
"금지된 걸 알면서도 계속 보낸다는 거잖아요. 그럼 이거 무시하다가 나중에 뒤통수 맞는 거 아니에요?"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조미란이 고개를 숙였다. 확실한 대답을 못 주는 게 미안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냥 서신들을 한쪽으로 밀어두었다.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었으니까.
그날 이후 나는 훈련량을 두 배로 늘렸다. 정확히는 서은이 두 배로 늘렸다. 검을 휘두르다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고, 또 쓰러지는 걸 반복했다. 혈맹으로 얻은 힘은 확실히 강했지만, 그 힘을 다루는 기술은 여전히 초보였다. 마치 최신 스포츠카를 뽑았는데 운전면허가 없는 느낌이랄까. 엔진은 미친 듯이 좋은데 핸들 꺾는 법을 몰라서 계속 벽에 박는 기분이었다.
"근육만 좋아서 뭐해. 쓸 줄 알아야지."
하늬가 훈련장 구석에서 단검을 던지며 낄낄거렸다. 나를 향해 던진 건 아니었지만 가끔은 진짜인지 헷갈릴 정도로 정확했다. 단검이 내 귀 옆을 스쳐 지나가 나무 기둥에 콱 박혔을 때는 정말로 심장이 쪼그라드는 줄 알았다.
"그 단검, 저한테 던지실 생각 없죠?"
"있으면 좋겠어?"
"아니요."
"그럼 없어."
대화가 늘 이런 식이었다. 처음엔 당황스러웠는데 며칠 지나니 익숙해졌다. 이 사람들 나름의 애정 표현인가 보다 생각하기로 했다. 안 그러면 매일매일이 공포영화였을 테니까.
"강지훈."
서은이 검을 겨누며 내 이름을 불렀다.
"다시."
"방금 막았잖아요."
"방금 겨우 막았지. 겨우, 라는 말 알아? 겨우 막으면 죽어."
그 말을 하면서도 표정 하나 안 변하는 게 진짜 이 사람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는다는 단어를 마치 밥 먹었냐는 질문처럼 던지는 걸 보면 이쪽 세계에서 죽음이 얼마나 가까운 개념인지 알 것 같았다.
소율은 매일 저녁 상처를 확인했다.
"타박상 세 곳, 열상 한 곳. 힐 걸어드릴게요."
"고마워요."
"효과는 미미할 겁니다."
미미하다면서 매번 상처가 다 나았다. 이 사람의 겸손인지 그냥 습관인지 알 수가 없었다.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옅은 초록빛이 상처 위를 스치면 벌겋게 부어 있던 살이 순식간에 원래 색으로 돌아왔다. 병원비 걱정 없이 이런 힐러 하나 옆에 두고 사는 게 얼마나 사치스러운 일인지, 예전 세계에 있을 때는 상상도 못 했다.
"근데 소율 씨, 진짜 미미한 거 맞아요? 저 눈으로 다 보이는데."
"미미합니다."
"방금 상처 없어졌는데요."
"기분상 그런 겁니다."
이쯤 되면 그냥 대화를 포기하는 게 정신 건강에 좋았다.
한 달 정도 지나자 몸이 완전히 달라졌다. 처음에는 서은의 검을 두 번 막지도 못했는데, 이제는 열 번 정도는 버텼다. 팔뚝에 근육이 붙는 게 눈으로 보였고, 숨이 차오르는 속도도 확실히 늦어졌다. 예전엔 계단 세 층만 올라도 헐떡였는데 지금은 검을 든 채로 훈련장을 열 바퀴는 돌 수 있었다. 이게 게임으로 치면 스탯 창에 숫자가 쭉쭉 오르는 걸 실시간으로 보는 기분이었다.
백은설은 종종 훈련장에 들러 나를 지켜보곤 했다. 그녀가 지켜볼 때마다 이상하게 신경이 곤두섰다. 부담스러운데 싫지 않은, 그런 애매한 감각이었다. 시험 볼 때 선생님이 뒤에서 지켜보는 것 같은 느낌인데, 그 선생님이 엄청 예쁘고 무려 2000살이라는 게 문제였다.
"많이 늘었네."
"전하 덕분이죠."
"덕분이라니. 넌 원래 재능이 있었던 거야. 그냥 힘을 준 것뿐이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떴다.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이 사람은 대체 몇 살일까. 2000년이 넘었다는 소문을 서은에게 들었는데, 그게 정말이라면 이 사람이 봐온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문명이 몇 번이나 뜨고 지는 걸 지켜봤을까. 나 같은 존재가 몇백 번쯤 왔다가 사라지는 걸 지켜봤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괜히 서글퍼져서 나는 다시 검을 들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강해지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 조미란이 다시 나를 찾아왔다. 이번엔 표정이 좀 달랐다. 평소의 침착함 대신 미묘하게 굳어 있는 얼굴이었다.
"강지훈 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또 혼담이에요?"
"그건 아니고요."
조미란이 목소리를 낮췄다. 주변을 한 번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최근 후작부인 유채영과 백작부인 임서희 쪽에서 이상한 움직임이 포착됐습니다. 강지훈 님을 직접 만나려는 시도가 아니라—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려는 것 같습니다."
"다른 방식이요?"
"조사 중입니다. 다만, 두 분 다 최근 은밀히 사람을 사서 지하 도시 하층부를 뒤지고 있다는 첩보가 있습니다."
하층부.
그 단어가 머릿속에 박히는 순간, 연우 생각이 스쳤다. 심장이 갑자기 무겁게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지하 도시 하층부라니. 그곳에 뭐가 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나에게는 그 단어가 곧 연우와 연결되는 유일한 지점이었다.
"하층부에 뭐가 있는데요?"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떨렸다.
"모릅니다. 하지만 두 분 모두 그쪽 방향으로 사람을 계속 보내고 있어요. 그것도 최근 들어 갑자기."
"갑자기, 라는 게 얼마나 갑자기예요?"
"보름 전부터입니다. 그전에는 전혀 그런 움직임이 없었습니다."
보름 전. 정확히 내가 이곳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시점과 겹쳤다. 그게 우연일 리 없었다.
서은이 옆에서 팔짱을 끼며 말했다.
"뭔가 냄새를 맡은 거겠죠. 전하께 보고해야겠네요."
"냄새라는 게 구체적으로 뭔데요?"
"몰라. 몰라서 문제인 거고."
서은은 평소처럼 툭 던지듯 말했지만, 눈빛만큼은 날카롭게 가라앉아 있었다. 저 사람이 저런 표정을 지을 때는 대체로 좋은 신호가 아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저 두 귀족이 왜 갑자기 하층부를 뒤지기 시작했는지,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하층부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심장이 이상하게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연우가 거기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사실을, 나보다 먼저 저 귀족들이 알아챘을지도 몰랐다.
만약 그렇다면. 만약 그들이 나보다 먼저 연우를 찾아내서, 나보다 먼저 무언가를 손에 넣으려 한다면.
나는 조미란을 향해 물었다.
"그 두 사람, 지금 당장 만날 수 있어요?"
조미란의 눈이 커졌다.
"전하께서 금지하신 상대입니다."
"알아요. 그래도 만나야 할 것 같아서요."
서은이 미간을 좁혔다.
"강지훈. 지금 무슨 생각 하는 거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그냥 하층부라는 말 하나에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 있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