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혈월 대공국의 유일 신랑감

3화

어둠 속에서 걸어나온 여자는, 뭐랄까,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미의 정점 같은 느낌이었다. 은빛 머리카락이 등을 타고 흘렀고, 붉은 눈동자는 촛불도 없는 방 안에서 스스로 빛나는 것 같았다. 검은 드레스 자락이 바닥을 스치며 움직였다. 걸음걸이 하나에도 어떤 위압감이 있었다. 마치 이 공간 자체가 저 여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와. 이건 뭐지. 나는 순간적으로 게임 보스몹 등장 컷씬 생각이 났다. 배경음악만 깔리면 완벽했을 텐데. 이 와중에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이 좀 웃겼다. 방금까지 나를 끌고 가던 뱀파이어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그 동작이 너무 빨라서 마치 리모컨으로 조종당하는 것처럼 보였다. "대공 전하." 대공. 아, 이거 완전 대장 등장이구나. 드라마에서 보면 꼭 이런 타이밍에 진짜 보스가 나온다. 나는 그동안 조연 뱀파이어들한테 붙잡혀 있었던 거고. "백은설 전하, 저희는 그저—" "닥쳐." 한마디에 방 안이 조용해졌다. 진짜 조용해졌다. 숨소리 하나 안 들릴 정도로. 나는 그 순간 초등학교 때 교실이 떠올랐다. 담임이 딱 한마디 하면 반 전체가 얼어붙던 그 느낌. 그거랑 똑같았다. 백은설이라 불린 여자가 나를 향해 걸어왔다. 붉은 눈이 나를 위에서 아래로 훑었다. 마치 물건 감정하는 눈빛이었는데, 이상하게 아까 뱀파이어들의 눈빛과는 결이 달랐다. 저놈들 눈빛은 먹잇감을 보는 눈빛이었고, 이 여자 눈빛은—뭐랄까, 상품을 감정하는 감정사의 눈빛이었다. 어느 쪽이 더 나은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덜 무서웠다. "이름." "강지훈입니다." "강지훈. 지상에서 떨어졌군. 몸에서 지상의 냄새가 나." 지상의 냄새라니. 그게 무슨 냄새인지 궁금했지만 물어볼 상황은 아니었다. "저, 여기가 어디인지, 제 약혼녀는 어디—" "질문은 나중에." 그녀가 손을 들자 나를 잡고 있던 사슬이 저절로 풀렸다. 쇠사슬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손목에 남은 자국이 화끈거렸다. 마치 오래 찬 시계 자국처럼 붉게 부풀어 있었다. "넌 지금 이 도시에서 가장 위험한 존재야. 남자, 그것도 지상에서 온 남자. 저것들이 널 가만둘 것 같아?" 그녀가 무릎 꿇은 뱀파이어들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놈들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아까까지 나를 잡아먹을 듯이 굴던 놈들이 지금은 완전 순한 양 같았다. 서열이라는 게 이렇게 확실하게 갈리는구나 싶었다. "살고 싶으면 방법은 하나야." "뭐, 뭔데요." "내 것이 되는 것." 그 말이 뭘 의미하는지 이해하는 데는 정확히 3초가 걸렸다. 정확히는 2초 반쯤이었을지도 모르는데, 어쨌든 3초 안에 이해했다는 게 중요하다. "저기요, 그건 좀—" "거절할 처지가 아닌 것 같은데." 맞는 말이었다. 완전 맞는 말이었다. 나는 지금 사슬에 묶여있던 인질이었고 저 여자는 그 인질을 구해준 유일한 존재였다. 협상 카드가 나한테 하나도 없었다. 손에 쥔 게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협상을 하려는 내가 좀 웃겼다. 회사에서 갑질하는 거래처 상대할 때도 이 정도로 카드가 없진 않았는데. "혈맹 계약이야. 네 피와 내 피를 나누는 것. 그러면 넌 내 보호 아래 이 도시의 시민이 돼. 아무도 널 함부로 건드릴 수 없어." 시민이라니. 갑자기 이 도시에 주민등록을 하게 되는 기분이었다. 다만 그 등본에 찍히는 도장이 송곳니라는 게 다를 뿐. "대신 뭘 내놔야 하는데요." 장사꾼처럼 물었다. 이 와중에도 협상 본능이 튀어나오는 게 나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부터 뭘 하나 살 때도 꼭 흥정을 해야 마음이 편했던 성격이 여기서도 발동한 거다. 백은설이 살짝 웃었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서늘함 사이로 재미있다는 감정이 스쳤다. 그 미소가 순간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곧바로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정신이 나간 게 아닌가 싶어서 스스로 반성했다. "내게 속박된다는 것. 그게 대가야." 선택지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외에 다른 동작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도망갈 다리도, 숨을 곳도, 이 세계에 대한 정보도 전혀 없었으니까. 그녀가 손목을 들어 자기 손등을 살짝 물었다. 붉은 피가 한 방울 맺혔다. 그리고 내 목덜미로 얼굴을 가져왔다. 가까이서 보니 그녀의 피부는 도자기처럼 매끈했고 향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차가운 향이 났다. 겨울 새벽 공기 같은 냄새랄까. "아플 거야." "미리 말해주는 게 매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빨이 목을 파고들었다. 비명이 터지려는 걸 겨우 참았다. 뜨거운 것이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눈앞이 하얗게, 그다음엔 새하얗게 물들었다. 몸속 뭔가가 바뀌는 감각이었다. 근육이 팽창하고, 뼈가 조여들고, 시야가 갑자기 선명해졌다. 마치 오래된 브라운관 TV가 갑자기 4K 화질로 바뀌는 느낌이었다. 이 비유를 떠올릴 정신이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옆구리의 통증이 사라졌다. 팔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몸이 이상하게 가벼웠다. 마치 갓 튜닝받은 자동차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엔진 오일을 갈고 타이어까지 새로 끼운 자동차 느낌이었다. 창밖—아니 이 도시엔 창밖이라는 게 없었지만, 방 안 어딘가에서 붉은 조명이 은은하게 비쳤다. 방 안을 둘러보니 가구들이 하나같이 고풍스러웠다. 협탁 위에는 초 하나 켜져 있지 않았는데도 방 안이 붉게 밝았다. 이 도시의 조명 시스템이 어떻게 되어 있는 건지 궁금했지만 지금 그걸 물어볼 여유는 없었다. 그리고 침대 옆에 백은설이 앉아 있었다. 다리를 꼬고 앉아 나를 내려다보는 그 자세가 무슨 회사 면접관 같았다. "깨어났군." "저, 방금 그거 뭐였어요? 몸이 완전—" "혈맹의 대가야. 내 힘의 일부를 받은 거지. 이제 웬만한 담피르 정도는 상대할 수 있을 거야." 담피르. 처음 듣는 단어였지만 굳이 물어보진 않았다. 이 세계에는 모르는 단어가 너무 많았고, 하나씩 물어보다가는 밤을 새워도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순간, 방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전하, 손님이 있다고 들었는데." 188은 될 법한 키에, 검을 등에 멘 여자였다. 눈빛이 예리했다. 걸음걸이만 봐도 전투 훈련을 오래 받은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다. 그녀가 나를 위아래로 훑더니 한마디 던졌다. "이게 그 지상에서 떨어진 남자예요? 생각보다 멀쩡하네." 멀쩡하다는 말이 칭찬인지 아닌지 헷갈렸다. 목에 이빨 자국이 나 있는 상태로 침대에 누워 있는 게 멀쩡한 축에 든다면, 대체 여기 기준으로 안 멀쩡한 건 어떤 상태인 건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백은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은 드레스가 다시 바닥을 스치며 소리를 냈다. "백서은. 이쪽은 내가 방금 거둔 사람이야." 백서은이라는 이름의 여자가 눈썹을 슥 올렸다. "거뒀다고요? 전하답지 않게 빠른데." "이유가 있어."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눈빛이 뭔가 심상치 않았다. 마치 이미 알고 있는 사정이 있다는 듯이, 서로 눈으로만 대화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순간 침대에 누운 채로 이 두 사람 사이에 낀 투명인간이 된 기분이 들었다. 뭔가 다음 국면이 시작되고 있는 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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