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혈월 대공국의 유일 신랑감

2화

붉은 눈동자는 하나가 아니었다. 어느새 어둠 속에서 여러 개의 눈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처음엔 하나인 줄 알았는데, 두 개, 세 개, 넷. 세다가 포기했다. 사람 형체가 하나둘 걸어나왔다. 하얀 피부, 검은 옷, 뭐랄까, 화보 찍으러 나온 느낌의 사람들이었는데 문제는 눈빛이 화보 찍는 사람들 눈빛이 아니었다는 거다. 그 눈빛은 좀 더... 육식동물 다큐멘터리에서 본 그런 눈빛이었다. 초원에서 얼룩말 무리를 훑는 그 카메라 워크 있잖나. 딱 그거였다. "어머, 살아있는 거야?" 여자 목소리였다. 그리고 다른 목소리도 여자였다. 그리고 그 다음도. 열 명 가까이 모였는데 전부 여자였다. 이상하다고 느낄 겨를도 없었다. 애초에 이상하다는 감각 자체가 마비된 상태였으니까. 하늘에서 떨어져서 뼈가 몇 개 부러진 것 같은데 이상함을 느낄 여유가 어디 있겠나. "진짜 남자야. 이런 곳까지 떨어지고 살아있고. 운이 좋네." "운이 좋은 게 아니라 우리한테 운이 좋은 거지." 다들 낮게 웃었다. 그 웃음이 소름 끼쳤다. 배고픈 사람이 스테이크 앞에서 짓는 웃음이랄까, 아니 뭔가 더 노골적이었다. 스테이크는 적어도 먹히기 전에 이런 대화를 듣지 않아도 되는데. "일어나. 상처 좀 보고." 손목이 잡혔다. 힘이 장난 아니었다. 내가 발버둥쳐도 꿈쩍하지 않았다. 헬스장에서 삼 년을 굴려도 이런 악력은 못 만든다. 눈치를 보니 이 사람들, 일반적인 인간이 아니었다. 저 창백한 피부, 저 송곳니, 저 힘.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무도 숨을 쉬지 않았다.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뱀파이어. 어릴 때 동화책에서나 보던 그 존재가 지금 내 팔을 잡고 나를 어딘가로 끌고 가려 하고 있었다. 심지어 동화책 삽화보다 실물이 훨씬 미인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생각이 드는 게 정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저기요, 이거 좀 놓고 얘기하시죠." "얘기는 나중에. 지금은 확인이 먼저야." "확인이라니 뭘요." "번식 가능한 상태인지." 그 한마디에 온몸의 피가 다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아니 진짜로, 몬스터한테 팔이 물릴 뻔했을 때보다 지금이 더 무서웠다. "뭐, 뭐라고요?" "이 도시에 남자가 몇 명이나 있는 줄 알아? 백 명도 안 돼. 그런데 하늘에서 뚝 떨어졌잖아, 이게 기회지, 안 그래?" 다들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임이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마치 회사 회의에서 다음 프로젝트 담당자 정하는 분위기였다. 저요, 저요, 이런 손짓만 없었을 뿐이지. 나는 순식간에 사람에서 가축으로 신분이 바뀌는 걸 실시간으로 체감했다. 태어나서 이렇게 빠른 강등을 당해본 적이 없었다. 군대에서 이등병으로 굴러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잠깐, 저 여자 친구, 아니 약혼녀 있어요. 저 임자 있는 몸이에요." "어머, 그게 무슨 상관이야." 상관없다고 한다. 이 사람들한테는 인간의 결혼 서약이 딱지만큼도 안 중요한 거였다. 오히려 임자 있는 몸이라는 말에 몇몇은 더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아, 이건 진짜 최악의 대답이었구나. "오히려 더 재밌겠는데. 어디 있는 여자야? 이 도시는 아니지?" "그, 그건 왜 물으시는 건데요." "경쟁자 파악은 기본이지." 경쟁자라니. 나는 물건인데 물건 취급받는 것도 아니고 경매 품목 취급받는 기분이었다. 낙찰가 협상하는 소리까지 들릴 지경이었다. 끌려가면서 발버둥쳤지만 소용없었다. 신발이 바닥에 끌리며 끽끽 소리를 냈다. 살면서 이렇게 힘이 압도적으로 밀리는 상대는 처음이었다. 몬스터랑 싸울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몬스터는 최소한 힘을 쓰면 밀리는 시늉이라도 했다. 이 여자들은 아니었다. 그냥 내가 벌레처럼 느껴졌다. 도착한 곳은 작은 저택 지하실 같은 곳이었다.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온도가 뚝뚝 떨어졌다. 침대 하나, 사슬 몇 개, 그리고 나를 둘러싼 시선들. 벽에는 촛불이 몇 개 켜져 있었는데 그 불빛이 유독 붉게 보였다. 아니, 어쩌면 저 여자들 눈동자 색이 옮겨붙은 걸지도. "자, 얌전히 있어. 아프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미친. 이게 무슨 판타지 세계관의 뒤통수야. 남자로 태어난 게 이렇게 위험한 일이 될 줄이야. 지구에서 살 때는 남자로 태어난 게 딱히 위험한 일은 아니었는데, 여긴 다른가 보다. "저 진짜, 진심으로,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소리를 질렀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사슬이 손목에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차갑고 무거운 감각이 살갗에 닿았다. 쇠 특유의 비린 냄새까지 코끝에 스쳤다. 이런 디테일까지 느껴지는 게 더 절망적이었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편하게 생각해. 우리 중에서 제일 온순한 애가 먼저 볼 거니까." "온순한 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요 지금!" 누군가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벽에 부딪혀 몇 배로 크게 들렸다. 사슬을 마저 걸려는 손이 내 다른 팔목으로 다가왔다. 이대로 끝인가. 약혼녀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이런 데서 이런 식으로 끝나는 건 진짜 억울했다. 그때, 저택 전체가 흔들렸다. 쩍, 하고 벽에 금이 가는 소리가 났다. 지진이라도 난 줄 알았다. 천장에서 돌가루가 떨어졌다. 문이 통째로 날아갔다. 나무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고, 방금까지 웃던 뱀파이어들의 표정이 한순간에 굳었다. 나를 붙잡고 있던 손아귀에서도 미세하게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문 너머로 걸어 들어오는 발소리 하나. 또각, 또각. 규칙적이고 느렸다. 그런데 그 소리만으로도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방금까지 나를 짐짝처럼 다루던 여자들이 전부 그 발소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에 담긴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방금 전까지 나한테 보였던 눈빛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 "누구 허락으로." 낮고 서늘한 목소리였다. 그 한마디에 나를 붙잡고 있던 여자의 손에서 힘이 완전히 빠졌다. "내 도시에서, 내가 정한 규칙을 어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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