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그녀의 이름은 백서은이었다. 백은설을 몇 세대째 섬겨온 담피르 가문 출신이라고 했다. 담피르라는 게 뭐냐고 물었더니, 뱀파이어와 인간의 혼혈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힘은 뱀파이어에 가깝고, 낮에도 돌아다닐 수 있는 게 특징이라고.
키는 나보다 조금 컸는데, 등을 곧게 펴고 서 있는 자세만으로도 뭔가 압도적인 분위기가 났다. 눈동자가 붉은빛이 도는 갈색이었고, 머리는 짧게 잘라 목덜미가 다 드러났다. 딱 봐도 검을 쓰는 사람 특유의, 낭비 없는 움직임.
"앞으로 네 훈련을 맡을 거야."
"훈련이요? 저 그냥 좀 쉬고 싶은데—"
"쉬는 시간 없어. 넌 지금 이 도시에서 제일 위험한 표적이거든. 강해지지 않으면 죽어."
담백하다. 너무 담백해서 오히려 무서웠다. 나 죽는다는 얘길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하다니.
서은 씨의 말투는 딱딱했다. 존댓말도 반말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에서 명령하는 듯한 느낌. 문장 끝을 흐리지 않고 딱 끊어내는 게, 검을 휘두르는 방식이랑 똑같을 것 같았다.
"근데 저 검 한 번도 안 잡아봤는데요."
"알아. 그래서 훈련하는 거야."
"저 몸도 아직 다 회복 안 됐는데—"
"회복하면서 배우면 돼."
말이 안 통한다. 이 사람은 예외를 안 두는 타입인가 보다.
방문이 다시 열렸다. 이번엔 두 명이 함께 들어왔다.
"오, 이 남자가 그 남자야?"
키가 196은 될 법한, 전신 갑옷을 입은 여자였다. 허리춤에 단검이 스무 개는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걸을 때마다 쇠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는데, 그게 무슨 효과음처럼 들려서 웃음이 나올 뻔했다.
"백하늬. 잘 부탁해, 오빠."
"오빠라고 부르지 마."
서은이 낮게 경고했다. 하늬라는 여자는 그 말을 무시하고 나를 향해 씩 웃었다. 눈빛이 뭐랄까, 딱 봐도 사람 놀리는 걸 즐기는 표정이었다.
"몸 좋네. 혈맹 받고 근육 좀 붙었나 봐."
"저기요, 좀 부담스러운데요."
"부담스러우라고 하는 말인데."
와, 이 여자 진짜네.
"서은 언니 표정 봐. 또 저래. 딱딱하게."
"닥쳐, 하늬."
"거봐, 저런다니까."
둘 사이가 편해 보였다. 자매인가, 아니면 그냥 오래 알던 사이인가. 궁금했지만 물어볼 타이밍은 아니었다.
다른 한 명은 177 정도 되는 키에,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표정에 감정이 거의 없었다. 목소리도 낮고 일정해서, 뭘 말해도 감정의 진폭이 안 느껴졌다.
"백소율입니다. 지원 마법을 담당하고 있어요."
존댓말이었다. 서은과 하늬가 반말과 존댓말 사이에서 애매하게 놀았던 것과 달리 소율은 처음부터 딱 존댓말이었다. 정중하지만 거리감이 느껴졌다.
"치료 마법도 쓸 수 있어요. 다만—"
"다만?"
"인간은 재생력이 낮아서 효과가 제대로 나올지는 모르겠습니다."
걱정도 아니고 그냥 사실 보고였다. 냉정한 게 매력인 사람인가 보다.
"그럼 효과가 없으면 어떻게 해요?"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죠."
"되게 심플하시네요."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서요."
이 셋의 조합이 뭔가 웃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딱한 사람, 시끄러운 사람, 무감정한 사람. 삼각형처럼 딱 나눠진 느낌.
백은설이 이 셋을 소개하며 말했다.
"이 셋이 네 경호와 훈련을 맡을 거야. 서은은 검술, 하늬는 전투 감각, 소율은 지원. 앞으로 자주 볼 사이니 잘 지내도록."
"자주 볼 사이면 얼마나 자주요?"
"매일."
"매일이요?"
"매일."
두 번 강조하니까 뭔가 확정된 느낌이었다. 반박할 틈도 안 줬다.
"저는 딱히 훈련보다 연우를 찾는 게—"
"연우?"
서은이 물었다.
"제 약혼녀요. 저랑 같이 떨어졌는데 어디 있는지 몰라요."
방 안에 잠깐 침묵이 흘렀다. 하늬도 장난기를 거두고 나를 쳐다봤다. 소율의 표정은 그대로였지만, 뭔가 계산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백은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 도시는 넓어. 아래로 몇 층이나 이어져 있는지도 정확히 몰라. 찾으려면 힘이 있어야 해. 그리고 정보도 필요하고."
"그럼 도와주시는 거예요?"
"내 시민이 원하는 걸 들어주는 것도 대공의 의무니까."
말투는 무심했지만, 그 안에 뭔가 다른 뜻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정확히 뭔지는 몰랐지만.
그날부터 나는 매일 서은에게 검을 배웠다. 처음엔 서 있기도 힘들었는데, 며칠이 지나자 몸이 놀랍도록 빠르게 적응하기 시작했다. 혈맹으로 얻은 힘이 확실히 있었다. 검을 쥐는 법도 몰랐던 손이, 일주일도 안 돼서 서은이 던지는 목검을 받아낼 정도가 됐다.
"발 위치 틀렸어."
"방금 맞췄잖아요."
"틀렸어."
"어디가요?"
"전부."
정말 전부인 건가 싶었지만, 다음 순간 목검이 옆구리를 스쳤다. 아, 진짜 전부였구나.
하늬는 훈련 중간중간 놀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오빠, 그 자세로 몬스터 만나면 그냥 죽는 거야."
"안 죽을 건데요."
"죽어. 백 프로 죽어. 내가 걸었어."
"뭘 걸었어요?"
"내 검 하나."
이 여자는 진짜 내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하고 있었다. 근데 그게 또 은근히 동기부여가 됐다. 죽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으니까.
소율은 다친 부위를 치료해주며 매번 같은 말을 반복했다.
"효과는 미미할 겁니다."
효과는 확실히 있었지만. 상처가 눈에 보이게 아물어가는 걸 보면서도 소율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그럼 왜 매번 그렇게 말해요?"
"기대치를 관리하는 겁니다."
"기대를 낮춰놓고 결과가 좋으면 좋게 보이려고요?"
"정확합니다."
이 사람 은근히 계산적이네. 근데 그게 또 나쁘게 안 느껴졌다.
이 사람들 되게 재밌네, 라고 생각하다가도 밤이 되면 연우 생각이 났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가 어딘가에서 떨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면서, 연우의 얼굴을 떠올리려 해도 자꾸 흐릿해지는 게 무서웠다. 도와줘야 했다. 빨리.
그러던 어느 날, 조미란이라는 궁정 집사가 나를 찾아왔다. 조미란은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강지훈 님, 후작부인 유채영께서 혼담을 넣으셨습니다."
"혼담이요?"
"백작부인 임서희께서도 별도로 제안을 넣으셨고요. 그 외에도 몇몇 가문에서 관심을 표하셨는데, 정리해서 서면으로 올릴까요?"
"서면이요? 몇 개나 되는데요?"
"현재까지 확인된 건 다섯 건입니다."
다섯 건.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 도시가 나를 그저 위험한 표적이 아니라, 아직도 어딘가에서 '자원'으로 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인간의 피가 특별한 가치를 가진 세계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거래 대상이 될 줄은 몰랐다.
"저 이미 약혼녀가 있는데요."
"알고 있습니다. 다만 이곳의 혼담 문화는 조금 다릅니다. 정혼자가 있어도 별개로 제안이 들어오는 경우가—"
"거절해주세요. 전부."
"전부 말씀이십니까?"
"전부요."
조미란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알겠다는 듯 물러났지만, 그 표정 어딘가에 미묘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저게 그냥 사무적인 미소인지, 아니면 뭔가 다른 뜻이 있는 건지 판단이 안 됐다.
이 도시에서 나는 도대체 뭘로 보이고 있는 걸까. 위험한 표적, 훈련이 필요한 인간, 그리고 이제는 혼담의 대상까지. 점점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방향으로 상황이 흘러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