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다음 날 오후 4시, 학생부 앞 복도.
청소도구함에서 대걸레를 꺼내 든 서윤과 서린은, 학생부 담당 선생님으로부터 "너희 둘, 오늘 사고 친 값으로 이 복도 전체 청소하고 가."라는 지시를 받은 뒤 나란히 서게 되었다.
선생님이 등을 돌리자마자 두 사람 사이에는 팽팽한 정적이 내려앉았는데,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각자의 구역을 정하듯 무언의 선을 그으며 청소를 시작했다.
복도 창밖으로는 붉은 저녁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오고 있었고, 그 빛이 바닥에 깔린 물기 위에서 잘게 부서지며 반짝였는데, 두 사람의 그림자가 그 빛을 가로질러 길게 늘어지는 모습이 마치 두 개의 평행선처럼 보였다.
대걸레가 바닥을 스치는 소리만이 복도를 채우는 가운데, 서린이 먼저 정적을 깼다.
"어제는 좀 심했어." 서린의 목소리에는 여느 때와 다르게 날이 서지 않아 있었고, 그 낮고 담담한 어조에 서윤은 순간 손을 멈출 뻔했다.
"네가 먼저 시작했잖아." 서윤이 애써 대걸레질을 멈추지 않은 채 대꾸했다. 시선은 여전히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다.
"맞아, 내가 먼저였지." 서린이 뜻밖에도 순순히 인정하자, 오히려 서윤이 당황해 걸음을 멈췄다.
그 인정이 너무 쉽게 나온 탓에, 서윤은 무언가 함정에 걸린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운동장에서는 축구부 아이들이 마지막 훈련을 하는지 공을 주고받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서린이 문득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학생회장이라는 거, 생각보다 답답해. 매일 완벽해야 하고, 뭐 하나 실수하면 바로 소문나고." 서린의 시선이 창밖 운동장을 향한 채 흔들리지 않았지만, 그 말투에는 처음으로 서윤이 알지 못했던 피로감이 스며 있었다.
서윤은 그 말을 듣고서야, 언제나 흠 하나 없어 보이던 서린의 얼굴 뒤에도 균열이 있다는 걸 처음 눈치챈 사람처럼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도 그런 거 느껴?" 서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연하지. 너도 그렇잖아." 서린이 시선을 돌려 서윤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그 눈빛이 평소의 서늘함과는 다르게 묘하게 부드러워, 서윤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왜 갑자기 이런 얼굴을 하는 거야.'
그 짧은 순간, 서린의 얼굴에 걸린 저녁 햇살이 그녀의 눈동자 안에서 붉게 부서지는 것을 서윤은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그때, 복도 끝에서 웃음소리와 함께 소란이 들려왔다.
서윤이 고개를 돌리자, 사물함 앞에서 몇몇 남학생들이 민준서를 둘러싸고 놀리는 모습이 보였다.
민준서는 키가 작고 여성스러운 외모 때문에 늘 놀림의 대상이 되는 아이였는데, 서윤을 열렬히 따르는 팬이기도 했다.
"야, 너 이서윤 좋아한다고 소문났던데, 근데 너 남자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한 남학생이 큰 소리로 비웃자, 준서의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
주변에 있던 다른 아이들도 낄낄거리며 준서의 가방을 발로 툭툭 치기 시작했고, 준서는 그 자리에서 어깨를 움츠린 채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서윤은 그 장면을 보며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었지만, 자신이 나서면 괜한 소문이 붙을 거란 생각에 발이 얼어붙었다.
'가서 도와줘야 하는데.'
머릿속으로는 이미 몇 번이나 그쪽으로 걸어가는 자신을 그렸지만, 실제로 다리는 그 자리에 뿌리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고, 손에 쥔 대걸레 자루만 점점 더 세게 움켜쥐게 되었다.
그런 자신에게 스스로 실망하는 감정이 밀려왔고, 서윤은 그 실망감이 목 끝까지 차오르는 걸 삼키며 애써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결국 먼저 움직인 건 서린이었다.
"거기, 뭐 하는 짓이야." 서린이 학생회장 특유의 단호한 목소리로 다가서자, 남학생들은 순식간에 흩어졌다.
서린의 걸음걸이에는 망설임이라곤 조금도 없었고, 그 반듯한 어깨선과 서늘한 눈매가 복도 끝까지 위압감을 뿜어내는 것처럼 보였는데, 방금 전까지 서윤 앞에서 보이던 부드러운 낯빛은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준서는 고개를 숙인 채 자리를 떠났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서윤의 가슴속에서 부끄러움과 씁쓸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저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었잖아.'
그러나 그 생각이 무색하게, 자신은 끝내 한 발짝도 떼지 못했다는 사실만이 선명하게 남았다.
"넌 왜 안 도와줬어?" 서린이 다시 서윤 곁으로 돌아오며 물었다.
그 물음에는 비난의 기색이 섞여 있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 무심한 어조가 서윤의 가슴을 더 깊이 찔렀다.
"…모르겠어." 서윤이 솔직하게 답하자, 서린은 잠시 서윤을 바라보다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무서운 거, 이해해."
그 말이 무엇을 겨냥한 건지 서윤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마치 자신의 속을 들여다본 것 같은 그 한마디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서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고 다시 대걸레를 집어 들었는데, 그 뒷모습이 평소보다 조금 더 커 보인다는 이상한 착각이 서윤을 스쳐 갔다.
두 사람은 다시 각자의 구역으로 돌아가 청소를 이어갔고, 창밖의 햇살은 점점 더 짙은 주황빛으로 물들어갔다.
청소를 마치고 도구를 정리하던 중, 서린이 대걸레를 건네받으며 서윤의 손등에 손끝을 살짝 스쳤는데, 그 짧은 접촉이 예상보다 오래 남아 서윤의 손등이 화끈거렸다.
서윤은 그 순간 손을 빼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몸은 또다시 생각과는 반대로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내일 봐." 서린이 짧게 인사하고 먼저 자리를 떠났고, 서윤은 그 자리에 서서 방금 스친 손끝의 감촉을 오래도록 지우지 못했다.
복도에 혼자 남은 서윤은 청소도구함 문을 닫으며, 창밖으로 완전히 저물어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왜 자꾸, 얘 생각만 하면 이상해지는 거지.'
그 물음은 답을 찾지 못한 채 가슴 한켠에 눌러앉았고, 서윤은 애써 그 감정을 외투 안쪽에 묻듯 감춘 채 가방을 챙겨 교문을 나섰다.
***
그날 밤, 서윤의 방.
책상 위 스탠드 불빛만이 방 안을 은은하게 밝히고 있었고, 서윤은 침대에 누운 채 휴대폰을 손에 쥐고 있었다.
몇 번이나 손가락이 화면 위를 맴돌다가, 결국 서린의 계정을 몰래 열어보게 되었다.
그녀의 계정에는 별다른 게시물이 없었고, 프로필 사진 한 장만이 무심하게 걸려 있었는데, 서윤은 그 사진을 오래도록 들여다보다가 스스로도 당황해 화면을 서둘러 닫았다.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야.'
그때, 화면 상단에 새 메시지 알림이 떠올랐다.
[김하은 : 도현이랑 좀 다퉜어… 내일 얘기해도 돼?]
서윤은 그 메시지를 읽으며 걱정이 되면서도, 동시에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조용히 들뜨는 것을 느꼈는데, 그 감정의 이유를 스스로에게 물을 용기가 아직은 없었다.
답장을 쓰려던 손가락이 몇 번이나 멈췄고, 결국 짧게 "그래, 얘기하자."라는 말만 겨우 적어 보낸 뒤, 서윤은 휴대폰을 가슴 위에 올려놓은 채 천장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창밖에서 늦은 밤바람이 창틀을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 소리 사이로 서윤은 낮에 스쳤던 손끝의 감촉과, 하은의 메시지가 주었던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을 번갈아 떠올리며, 자신의 마음이 어느 쪽을 향해 기울어 가는지조차 가늠하지 못한 채 그렇게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