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다음 날 낮 12시 30분, 학생 식당.
서윤이 휴대폰을 열어 다시 확인한 서린의 메시지에는 짧은 한 줄이 적혀 있었다.
[한서린 : 걱정은 네가 해야 할 것 같은데, 얼굴 보고 얘기할까.]
그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서윤은 그 한 줄을 수십 번은 더 들여다본 것 같았는데, 볼 때마다 문장 뒤에 숨은 의미를 캐내려 애썼지만 끝내 답을 찾지 못한 채 밤을 꼬박 새우고 말았다.
이불 속에서 뒤척이던 시간이 길어질수록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그 어둠 속에서 서린의 서늘한 눈매가 자꾸만 떠올랐다가 사라지곤 했다.
아침이 되어 거울 앞에 섰을 때, 서윤은 눈 밑에 옅게 내려앉은 그림자를 손끝으로 문질러 지우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그런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져 입술을 짓씹으며 가방을 챙겨 나섰다.
수업 시간 내내 칠판의 글씨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선생님의 목소리는 먼 곳에서 울리는 소리처럼 뭉개져 들렸는데, 그러다가도 문득 정신이 들면 서윤은 자신이 또 서린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는 볼펜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애써 정신을 다잡았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서윤은 이상하게 곤두선 신경을 애써 감추며 식당으로 들어섰다.
식당 안, 마침 반대편에서 식판을 들고 걸어오던 서린과 눈이 마주쳤다.
서린은 언제나처럼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걸었고, 교복 셔츠의 단추 하나까지도 흠 잡을 데 없이 정갈했으며, 그 존재감만으로도 주변의 소란스러움을 잠재우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서린의 서늘한 눈매가 정확히 서윤을 향했고, 그 시선을 받은 순간 서윤의 발끝이 저절로 그쪽으로 돌아갔는데,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을 머리로는 도무지 막을 수가 없었다.
"어제 그 메시지, 재밌었어." 서린이 먼저 입을 열며 다가서자, 서윤은 팔짱을 끼며 맞받았다.
"장난치지 마, 투표는 실력으로 하는 거야."
"실력? 네가 실력으로 이겼다고 생각해?" 서린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도발적인 미소를 그렸다.
그 미소 안에는 여유로움과 조롱이 섞여 있었고, 서윤은 그 얇은 미소 하나에 속이 뒤틀리는 것을 느꼈으며, 동시에 어이없게도 그 표정을 눈에 담아두고 싶다는 이상한 마음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애써 무시했다.
"넌 항상 그렇게 여유로운 척이지." 서윤이 이를 악물며 말을 이었다.
"실력이 아니면 뭘로 이겼다는 거야, 말해봐."
"글쎄." 서린이 어깨를 살짝 기울이며 시선을 내렸다.
"네가 알고 싶다면 말해줄 수도 있는데, 지금 여기서?"
그 말투에 담긴 여유가 서윤의 자존심을 긁었고, 주변 학생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몰리는 가운데, 서윤은 참지 못하고 서린의 식판을 손으로 밀쳤는데, 그 순간 국물이 서린의 교복 소매로 튀며 식당 안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식판이 부딪히며 나는 쇳소리와 그릇들이 흔들리는 소리가 겹쳐 울렸고, 몇몇 학생들은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으며, 누군가는 휴대폰을 꺼내 그 장면을 찍기 시작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서린의 목소리가 낮게 깔리며 서윤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 손아귀의 힘이 예상보다 강해서, 서윤은 숨을 멈춘 채 서린의 얼굴을 마주 보았는데, 가까이서 본 서린의 눈동자는 차갑다기보다는 오히려 뜨겁게 타오르는 것처럼 보였고, 그 눈빛 속에 담긴 것이 분노인지 다른 무엇인지 서윤은 순간적으로 구분할 수 없었다.
손목을 붙잡힌 자리에서부터 열기가 퍼져 나가는 것 같았고, 그 온도가 국물이 튄 자리의 뜨거움보다도 더 선명하게 서윤의 피부를 자극했는데, 그 낯선 감각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서윤은 애써 눈을 크게 떴다.
서윤이 손을 빼내려 몸을 비틀자, 두 사람의 몸이 부딪히며 균형을 잃었고, 그 바람에 서린의 어깨가 서윤의 가슴께에 닿았다가 떨어졌는데, 그 짧은 접촉의 순간 서윤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시간이 느려진 것처럼 느껴졌고, 주변의 소음이 한순간 멀어졌다가 다시 밀려들었으며, 그 짧은 정지의 순간 서윤은 서린의 숨소리마저 들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상한 착각에 빠졌다.
"놔." 서윤이 낮게 내뱉었지만,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서린 역시 순간적으로 손을 놓으며 한 발 물러섰는데, 그 얼굴에도 당혹감이 스치고 지나간 것을, 그 자리에 있던 하은만이 유일하게 눈치챘다.
서린의 손끝이 살짝 떨리는 것을 본 것 같기도 했지만, 그것이 정말 떨림이었는지, 그저 서윤의 눈이 만들어낸 착각이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서윤아, 그만해!" 하은이 재빨리 다가와 서윤의 팔을 붙잡으며 뒤로 끌어당겼고, 뒤이어 도착한 박도현이 서린 쪽을 살피며 상황을 정리하려 했다.
"괜찮으세요? 소매에 국물 튄 거 닦으셔야 할 것 같은데." 도현이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서린은 아무 대답도 없이 그저 서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선생님이 달려와 두 사람을 갈라놓았고, 식당 안은 순식간에 웅성거림으로 가득 찼다.
"두 사람 다 학생부로 와." 선생님의 단호한 목소리에, 서윤과 서린은 서로를 노려보며 각자 다른 방향으로 끌려갔다.
끌려가면서도 서윤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고, 그때마다 서린의 뒷모습이 반듯한 어깨선을 유지한 채 흔들림 없이 멀어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학생부에서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자리에 앉아 사건 경위서를 써야 했는데, 서윤은 펜을 쥔 손이 자꾸만 떨려 글씨가 삐뚤어지는 것을 느끼며,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흔들리는지 알 수 없어 답답함이 목까지 차올랐다.
그날 오후, 교실 뒤편에서 수아가 팔짱을 끼고 서윤을 쏘아보았다.
"너, 진짜 왜 그랬어. 걔한테 화난 거 맞아?" 수아의 질문에 서윤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화가 났으면 화가 난 거지, 왜 대답을 못 해." 수아가 다시 물으며 서윤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화가 난 거 맞아, 당연히." 서윤이 뒤늦게 대답했지만, 그 목소리에는 자신도 믿지 못하는 듯한 미묘한 흔들림이 섞여 있었다.
"혹시." 수아가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너 그 애 좋아하는 거 아니야?"
그 말이 귀에 닿는 순간, 서윤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고,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듯한 감각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무슨 소리야, 말 함부로 하지 마." 서윤이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수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더 이상 캐묻지 않았지만, 그 짧은 침묵 속에서 서윤은 스스로도 부정하지 못한 무언가가 가슴 깊은 곳에서 요동치고 있음을 느꼈다.
교실 창문 너머로 해가 기울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서윤은 오늘 있었던 일들을 하나씩 되짚어보았는데, 되짚을수록 이해되지 않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었고, 화가 나야 할 상황에서 왜 그 손아귀의 온도가, 그 어깨의 감촉이 자꾸만 되살아나는지 알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서윤은 손목에 남은 서린의 손아귀 자국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붉게 남은 자국은 시간이 지나며 서서히 옅어지고 있었지만, 그 자리에 닿았던 온기만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것 같았고, 서윤은 그 이상한 감각에 스스로도 놀라 손목을 소매 속으로 급히 밀어 넣었다.
버스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는 동안에도, 서윤의 머릿속에는 식당에서의 그 짧은 순간이 몇 번이고 재생되었는데, 서린의 뜨거웠던 눈동자와 낮게 깔린 목소리가 마치 잔상처럼 눈앞에 떠올랐다가 사라지곤 했다.
그 자국이 사라지기도 전에, 휴대폰 화면 위로 또 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
[한서린 : 내일 학생부 끝나고 남아. 할 얘기 있어.]
서윤은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으며, 왜 화가 나야 할 상황에서 오히려 심장이 뛰는 건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 끝내 답을 찾지 못했다.
문장 끝에 마침표 하나 없이 던져진 그 짧은 말이, 오늘 하루 겪은 모든 소란보다도 더 크게 서윤의 가슴을 흔들어놓았고, 내일이 오는 것이 두려운 동시에 이상하게도 기다려진다는 사실이, 서윤 자신을 가장 낯설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