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며칠 뒤, 준서의 집에서 작은 파티가 열렸다.
그의 회사 동료 몇 명이 초대받았고, 수아도 그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 정확히는, 준서가 그녀를 데려가기로 결정한 자리였다. 좋은 여자친구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해야 하는 자리.
준서는 며칠 전부터 그녀에게 옷을 골라주었다. 심플하면서도 단정한 원피스였다. 색은 그의 취향대로 채도가 낮은 베이지색이었다.
— 이거 입어. 너무 화려하지 않게.
수아는 그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도 그가 선호하는 방식대로 옅게 했다. 립스틱조차 붉은 계열은 피했다. 거울 앞에서 마지막으로 매무새를 확인하던 그녀는,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오늘도 잘 해내야 해.'
거울 속 얼굴은 낯설 만큼 차분했다. 마치 다른 사람의 얼굴을 빌려 쓴 것 같은 기분이었다.
파티가 시작되자 준서는 그녀의 손을 잡고 동료들에게 소개했다. 그의 손은 부드러웠지만, 어딘가 확인하듯 그녀의 손가락을 살짝 조였다.
— 제 여자친구예요. 카페에서 일해요.
칭찬과 질문이 이어졌다. 예쁘다는 말, 어떻게 만났냐는 질문, 준서가 좋은 사람이냐는 물음. 수아는 매번 정해진 답을 했다. 미소, 적절한 겸손, 준서를 향한 애정 표현.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마치 대본을 외운 배우처럼.
— 준서 씨가 잘해줘요.
이 말을 할 때마다 그녀의 목 안쪽이 조금씩 조여왔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준서조차도.
주희는 파티 구석에서 캔맥주를 들고 서 있었다. 화려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녀는 유독 눈에 띄었다. 정장 재킷을 걸쳤지만 넥타이는 매지 않았고, 셔츠 단추 하나를 풀어놓은 채였다. 몇몇 동료가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고, 주희는 특유의 여유로운 태도로 대응했다. 짧은 웃음, 짧은 대답. 그러면서도 시선은 어딘가 다른 곳을 향해 있는 듯했다.
수아는 그 모습을 자꾸 눈으로 좇았다.
'왜 저 사람만 보이지.'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이끌림이었다. 준서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손님을 응대하는 동안에도,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주희가 서 있는 방향으로 흘러가 있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 준서가 회사 상사와 대화하러 자리를 비웠다. 수아는 혼자 남아 물을 마시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서 있는 기분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대화의 파도 속에서 그녀만 혼자 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주희가 다가왔다.
— 지친 얼굴인데.
— 아니에요, 괜찮아요.
— 그 대답, 벌써 몇 번째야.
주희가 낮게 웃으며 그녀의 어깨에 살짝 손을 얹었다. 짧은 접촉이었지만, 수아의 몸은 그 자리에서 멈춘 듯했다. 손바닥의 온기가 옷감을 통해 그대로 전해졌다.
— 잠깐 나가서 바람 쐴래?
수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를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발코니로 나오자 차가운 밤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도시의 불빛이 멀리서 흔들리고 있었다. 파티장의 소음이 유리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아득하게 멀어졌다.
— 여기 서 있으면 좀 살 것 같지.
주희가 담배 한 대를 꺼내 물었다. 라이터 불이 잠깐 그녀의 얼굴을 밝혔다. 수아는 그 옆얼굴을 바라보며 숨을 삼켰다. 담배 연기가 밤바람에 흩어지는 모습을 그녀는 오래 눈으로 좇았다.
— 준서랑 사이 괜찮아?
— 네, 괜찮아요.
— 진짜로?
그 짧은 질문이 이상하게 아팠다. 수아는 대답을 찾지 못하고 발코니 난간을 잡았다. 손끝이 차가운 철제 난간에 닿자 그 냉기가 오히려 위안이 되었다.
— 요즘 좀… 그냥, 잘 모르겠어요.
스스로 놀랄 만큼 솔직한 대답이었다. 준서 앞에서는 절대 하지 못했을 말. 입 밖으로 나온 순간,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게 들렸다.
주희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임에는 어떤 이해가, 혹은 예상했다는 듯한 여유가 담겨 있었다.
— 걘 원래 사람을 자기 틀에 맞추려는 애야. 나도 그거 때문에 오래 부딪혔었고.
— 무슨 일이 있었어요?
주희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그 짧은 순간, 그녀의 눈빛이 어딘가 먼 곳을 향해 흘러가는 듯했다. 그러나 곧 다시 여유를 되찾았다.
— 나중에 말해줄게. 지금은… 그냥 오늘 밤 얘기 하자.
그녀가 몸을 돌려 수아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거리가 가까워졌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갑자기 무거워졌다.
— 너, 준서 옆에 있을 때랑 지금 표정이 완전 달라. 알아?
수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귓가에서 자신의 심장 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발코니의 찬 공기도 그 열기를 식히지 못했다.
주희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눈, 코, 그리고 입술. 짧은 침묵이 흘렀다.
— 여기서 표정만 봐도 다 알겠는데.
— 무슨…
수아가 뭐라 대답하려던 순간이었다.
그 순간, 발코니 문이 열렸다.
철컥.
준서가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이 두 사람 사이의 거리에 잠깐 머물렀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시선은 마치 거리를 재는 듯 정확했다.
— 뭐 해?
목소리는 낮았지만 날카로웠다. 수아는 재빨리 한 걸음 물러났다. 발코니 난간에 등이 닿을 정도로.
— 그냥 바람 좀 쐬고 있었어.
준서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파티장 안으로 데려가는 손길이 평소보다 세게 조여왔다. 수아는 그 손아귀의 힘에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안으로 들어서며 그가 낮게 속삭였다.
— 너, 누나랑 너무 붙어 다니는 거 아니야?
수아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봤구나. 아니, 느꼈구나.'
그녀는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 그냥 얘기한 거야.
— 무슨 얘기.
— 그냥, 요즘 지낸 얘기.
준서는 그 말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손목을 붙잡은 손에 힘이 조금 더 실렸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놓아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분명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준서의 손은 그녀의 손목을 계속 붙잡고 있었다. 부드럽지만 놓아주지 않는 힘으로.
그 손의 온도가 처음으로, 다정함이 아니라 다른 감정으로 느껴졌다. 마치 소유를 확인하려는 손길처럼.
수아는 그의 옆에서 걸으며, 고개를 살짝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발코니 유리창 너머로 주희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로. 담배 연기가 그녀의 얼굴 주위를 천천히 감싸고 있었고, 그 뒤로 도시의 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수아는 그 눈빛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시선이 자신에게 오래 남아 있을 것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히 느껴졌다.
준서의 손에 이끌려 다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면서도, 수아의 시선은 자꾸만 그 발코니 쪽을 향했다. 유리문 너머, 주희의 실루엣이 서서히 사람들 속으로 흐려질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