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최정숙이 저녁 식사를 제안한 건 주희가 입주한 지 보름쯤이 지난 뒤였다.
전화벨이 울렸을 때 준서는 소파에 누워 있었다. 발신자를 확인하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어머니 전화는 늘 그런 반응을 불러왔다.
— 얘 여자친구도 데려와. 얼굴 한번 보자.
짧고 단호한 말투였다. 질문이 아니라 통보였다.
— 네, 알겠어요.
전화를 끊은 준서의 얼굴에는 묘한 긴장과 기대가 뒤섞여 있었다. 어머니께 인정받는 여자친구, 그 그림이 그에게는 중요했다. 최정숙은 쉽게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어머니가 먼저 자리를 만들자고 한 건 드문 일이었다.
준서는 그날 저녁, 수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 토요일에 시간 괜찮아?
— 왜, 무슨 일 있어?
— 어머니가 보자셔. 저녁 같이 하자고.
수아는 잠시 말이 없었다. 전화기 너머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 그래, 알겠어.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손끝은 이미 차가워지고 있었다. 그녀는 전화를 끊고 옷장을 열었다.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 어떤 말투를 써야 할지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시나리오를 그렸다. 준서의 가족을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토요일, 식당은 조용한 한정식집이었다. 나무 향과 은은한 육수 냄새가 실내에 배어 있었다. 종업원의 안내를 따라 안쪽 방으로 들어서자 최정숙이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정장 차림, 흐트러짐 없는 자세. 변호사다운 절제된 표정이었다.
— 수아씨죠. 얘기 많이 들었어요.
— 안녕하세요, 이수아입니다.
수아는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완벽한 예의, 완벽한 목소리 톤. 몇 년간 연습해온 것들이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다.
주희는 맞은편에 앉아 젓가락을 만지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셋업된 셔츠를 입고 있었다. 어색해 보였다. 수아와 눈이 마주치자 주희는 짧게 고개를 숙였다. 그 인사는 형식적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시선은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
식사가 시작되자 최정숙이 부드럽게 질문을 던졌다.
— 준서랑 어떻게 만났어요?
— 카페에서요. 제가 일하는 곳에 준서씨가 자주 왔었어요.
— 벌써 2년이나 됐다고.
— 네.
— 오래 만났네. 결혼 얘기는 없어요?
순간 준서의 손이 살짝 멈췄다. 수저를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가 다시 풀렸다. 수아는 그 미세한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얼굴에는 자연스럽게 웃음을 지었다.
— 아직 저희 둘 다 준비가 덜 된 것 같아요.
대답은 매끄러웠다. 하지만 속으로는 다른 목소리가 울렸다.
'준비가 안 된 게 아니라, 그가 아직 확신을 안 준 거지.'
그 생각이 스쳐가는 사이에도 그녀의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랜 시간 다듬어온 얼굴이었다.
최정숙의 시선이 잠시 수아의 얼굴에 머물렀다. 뭔가를 가늠하는 눈빛이었다. 젓가락을 내려놓는 손짓조차 계산된 것처럼 정확했다.
— 수아씨는 참 침착하네요. 준서 만나면서 힘든 일 없었어요?
그 질문에는 미세한 압력이 있었다. 그저 안부를 묻는 말이 아니었다. 마치 뭔가를 알고 있으면서 확인하려는 질문 같았다.
— 힘든 일이요…
순간 대답이 막혔다. 목 안이 좁아지는 느낌이었다. 준서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 저희 잘 지내요. 별일 없어요.
목소리가 조금 빨랐다. 지나치게 서두른 대답이었다.
최정숙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시선은 여전히 수아에게 남아 있었다. 마치 대답 뒤에 숨은 다른 대답을 찾으려는 것 같았다.
주희가 물잔을 들며 낮게 중얼거렸다.
— 엄마, 취조 좀 그만해.
— 관심이야, 관심.
최정숙이 짧게 웃으며 답했다. 그 웃음에는 물러날 기색이 없었다.
분위기가 잠시 풀어지는 듯했다. 종업원이 새 반찬을 내려놓는 동안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접시가 놓이는 소리만 방 안에 가볍게 울렸다.
그러나 최정숙은 곧 다른 화제로 옮겨갔다.
— 준서, 예전에 주희 이름 갖고 실수했던 거 기억나?
식탁 위 공기가 갑자기 얼어붙었다.
준서의 얼굴이 굳었다. 젓가락을 쥔 손이 그대로 멈췄다.
— 그건… 그때 실수였어요.
— 실수든 아니든, 사람 이름을 그렇게 부르면 안 되는 거지.
최정숙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날카로웠다. 마치 오래전부터 벼려온 말 같았다.
수아는 그 대화를 따라가며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폈다. 주희는 아무 말 없이 잔을 내려놓았다. 표정에 미세한 균열이 지나갔다. 그 짧은 순간, 수아는 주희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 걸 보았다. 무언가를 삼키는 듯한, 오래 참아온 사람의 눈빛이었다.
— 다 지난 얘기잖아요.
주희가 겨우 말을 얹었다.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그 아래 깔린 피로가 느껴졌다.
— 지난 얘기니까 하는 거야. 이제 웃으면서 말할 수 있잖아.
최정숙은 태연하게 반찬을 집었다. 그 태연함이 오히려 방 안의 긴장을 더 짙게 만들었다.
식사는 그 뒤로도 계속됐지만, 누구도 처음처럼 편하게 젓가락을 움직이지 못했다. 수아는 국그릇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저 이름 이야기, 단순한 실수가 아니었구나.' 그러나 더 물을 수는 없었다. 아직은 그럴 자리가 아니었다.
식사가 끝나고 밖으로 나올 때, 최정숙은 수아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 다음에 또 봐요. 오늘 반가웠어요.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손끝의 힘은 만만치 않았다. 마치 짧은 시험을 끝낸 것 같은 손짓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준서가 갑자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아까 그 얘기, 밖에서 하지 마.
— 무슨 얘기?
— 누나 이름 얘기. 옛날 일이야. 굳이 꺼낼 필요 없어.
수아는 창밖을 바라보며 물었다. 지나가는 가로등 불빛이 차창을 스치듯 흘러갔다.
— 무슨 일이었는데?
— 별거 아니야. 그냥 예전 이름으로 부른 적 있어. 실수였어.
그의 말투는 너무 빨리 정리된 듯했다. 마치 이미 여러 번 설명해본 문장처럼. 억양도, 속도도, 심지어 눈을 피하는 방향까지 어딘가 익숙했다.
'실수였다고 몇 번이나 말한 걸까.'
수아는 더 묻지 않았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채 손을 무릎 위에 가만히 얹었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서 오래된 상처의 냄새를 맡았다. 준서가 감추려는 무언가, 주희가 삼킨 무언가. 두 사람 사이에는 그녀가 아직 닿지 못한 층이 있었다.
차는 조용히 도심을 지나갔다. 라디오에서 낮은 음악이 흘렀지만 아무도 그 소리에 집중하지 않았다.
그날 밤, 그녀는 휴대폰을 열었다. 화면 밝기에 눈이 시렸다. 주희에게서 짧은 메시지가 와 있었다.
[오늘 힘들었지. 우리 엄마 원래 그래.]
[아니에요, 괜찮았어요.]
[너 표정 관리 잘하더라. 근데 다 티 났어.]
수아는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웃음이 났다가, 곧 서늘한 불안이 뒤따라왔다. 화면을 손끝으로 쓸어내리며 다음 메시지를 기다렸다. 그러나 더 이상 답은 오지 않았다.
'저 사람은 계속 나를 읽고 있어.'
그리고 그 사실이, 왜인지 무섭기보다는 조금 기뻤다.
수아는 휴대폰을 가슴에 얹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오늘 저녁의 장면들이 하나씩 되풀이됐다. 최정숙의 눈빛, 준서의 굳은 얼굴, 그리고 주희의 흔들리던 시선.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래 남는 건 주희의 문자였다. 짧은 몇 마디였는데도, 그 안에 담긴 시선이 어쩐지 다른 누구보다도 정확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이름 하나에 얼어붙었던 식탁의 공기가, 자꾸만 머릿속에서 되살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