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언니, 좋아하면 안 돼요?

3화

일주일 뒤, 준서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누나 여기서 몇 달 살기로 했어. 최정숙 여사님이 부탁하셨거든.] 수아는 카페 카운터에 기대선 채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몇 달. 그 단어가 이상하게 크게 다가왔다. 손끝이 화면 위에서 잠시 멈췄다. 주방에서 그릇 부딪는 소리가 들렸다. 마감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수아는 그 자리에 서서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왜 갑자기?]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나서야, 자신이 너무 빨리 답장했다는 걸 깨달았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누나 회사 근처 집이 계약 문제 있대. 우리 집이 넓으니까. 어차피 방세 내겠다니까 나쁠 거 없고.] 짧고 사무적인 답장이었다. 준서는 감정을 설명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문장에는 여백이 없었고, 이유는 딱 필요한 만큼만 달려 있었다. 수아는 그 무심함에 이미 익숙했다. 익숙하다고 스스로 되뇌었다. [알겠어. 나도 자주 갈게.] [뭐, 편할 대로.] 대화가 끝났다. 그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카페 마감 정리를 시작했다. 행주로 테이블을 닦고, 의자를 정리하고, 커피머신의 스팀 노즐을 세척했다. 손은 자동으로 움직였지만 머릿속은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몇 달이면, 자주 보게 되겠구나.' 그 생각에 이어 곧바로 불안이 따라붙었다. '왜 그게 기대가 되는 거지.' 수아는 행주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자꾸만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준서가 아니었다. 그다음 주부터, 수아는 준서의 집에 더 자주 드나들었다. 처음엔 반찬을 갖다 준다는 명목이었고, 다음엔 준서가 부탁한 물건을 전해준다는 명목이었다. 이유는 매번 달랐지만, 발걸음은 항상 같은 방향이었다. 그리고 그 집에는 늘 주희가 있었다. 어느 오후, 준서가 회의로 늦는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수아는 혼자 그 집 소파에 앉아 있었다. 거실은 조용했다. 창밖으로 들어오는 오후 햇살이 바닥에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때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주희가 방에서 나와 이어폰 한쪽을 그녀에게 건넸다. 아무 설명도 없이, 아주 당연한 동작처럼. — 이 노래 알아? 낡은 밴드의 곡이었다. 기타 리프가 거칠고 날카로웠다. 수아는 평소 듣던 음악과는 전혀 다른 종류였지만, 이상하게 귀에 감겼다. 드럼 소리가 심장 박동과 겹쳐지는 것 같았다. — 좋아요. — 그럴 줄 알았어. 주희가 옆에 앉으며 다리를 접었다. 가까운 거리였다. 소파가 살짝 눌리며 두 사람의 몸이 기울었다. 향수 냄새인지 담배 냄새인지 모를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다. 수아는 숨을 살짝 들이켰다가, 그 사실을 들킬까 봐 천천히 내뱉었다. — 수아씨, 궁금한 거 있는데. — 네? — 준서랑 있을 때, 진짜 니 표정은 언제 나와? 그 질문이 가슴 한복판을 찌르고 지나갔다. 수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 이어폰 줄을 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 무슨 말인지… — 아니야, 됐어. 캐묻는 거 아니야. 주희가 웃으며 넘어갔지만, 수아는 그 웃음 뒤에 숨겨진 관찰력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사람은 자신을 보고 있었다. 겉모습이 아니라, 그 아래 뭔가를. 눈빛이 마치 필름을 읽어내는 것 같았다. '무섭다. 그런데 무섭지 않아.' 노래가 한 곡 더 넘어갈 때까지,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어폰 한쪽씩을 나눠 낀 채로, 어깨가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그날 이후, 수아는 자신도 모르게 준서의 집을 찾는 날이 늘어났다. 늘 이유는 준서를 만나기 위해서였지만, 도착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사람은 언제나 주희였다. 현관문을 열 때마다, 수아의 시선은 준서의 방보다 먼저 거실 소파를, 부엌을, 주희가 있을 만한 자리를 훑었다. 어느 날엔 함께 저녁 재료를 사러 나갔다. 준서 없이, 두 사람만. — 오늘 준서 늦는대. 우리 뭐라도 해 먹을까. 주희의 제안이었고, 수아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별생각 없음이, 나중에서야 이상하게 느껴졌다. 마트 조명 아래에서 주희는 장난스럽게 카트를 끌고 다녔다. 바퀴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통로를 지나갈 때마다, 주희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야채 코너에서 뭘 골라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수아를 보며 웃었다. — 이런 것도 몰라? — 요리 잘 안 해서요. — 내가 알려줄게. 주희가 손을 뻗어 수아의 손목을 살짝 잡고 파 코너로 이끌었다. 그 접촉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수아는 순간 저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손목에 닿은 온기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주희는 대파를 하나 집어 들고 흔들어 보였다. — 이건 뿌리 쪽이 단단해야 좋은 거야. 여긴 이렇게, 눌러보고. 수아는 시키는 대로 손끝으로 대파를 눌러보았다. 별것 아닌 동작인데, 주희의 손이 자신의 손 위에 겹쳐지는 순간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 잘하네. — 그냥 시키는 대로 한 건데요. — 그게 잘하는 거야. 카트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늘, 양파, 국물용 멸치. 주희는 능숙하게 코너를 옮겨 다녔고, 수아는 그 뒤를 따라가며 재료 이름을 하나씩 배웠다. 대화는 사소했지만, 그 사소함이 오히려 더 위험하게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봉투를 나눠 들고 걷던 중 주희가 말했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 준서한테는 말 안 할게. 우리 둘이 마트 간 거. — 왜요? — 이상하게 신경 쓸 것 같아서. 수아는 그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했다. 준서가 이 상황을 알면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걸, 그녀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걸음이 잠시 느려졌다. — 그럼… 비밀로 하는 거예요, 우리? — 비밀이라기보다는, 그냥 사소한 거니까. 주희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지만, 수아는 그 웃음이 조금은 계산된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 어쩌면 그저 자신이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 비밀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이 스스로도 낯설었다. '왜 지키고 싶은 걸까. 감출 이유가 없는 일인데.' 봉투 속에서 대파 끝이 삐죽 튀어나와 팔에 닿았다. 서늘한 감촉이었다. 수아는 그 감촉에 집중하려 애썼다. 다른 생각을 지우려는 것처럼. 그날 밤 집에 돌아온 준서가 물었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으며, 별생각 없이 던지는 질문이었다. — 저녁 뭐 먹었어? — 그냥 집에서 대충. 거짓말이 너무 쉽게 나왔다. 수아는 그 사실에 스스로 놀랐다. 목소리는 흔들림 없이 평소와 똑같았고, 표정도 자연스러웠다. 마치 오래 연습한 대사를 읽는 것 같았다. 준서는 별다른 의심 없이 냉장고를 열었다. 물병을 꺼내 한 컵 따라 마시고는, 소파에 털썩 앉아 넥타이를 풀었다. 수아는 그 옆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주희의 메시지였다. [오늘 재밌었음.] 화면에 뜬 짧은 문장이 유난히 밝게 느껴졌다. 수아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준서가 보기 전에 화면을 재빨리 껐다. 휴대폰을 손바닥으로 덮듯이 쥐었다. 준서가 고개를 돌렸다. — 뭐야? — 아, 아무것도. 준서는 다시 시선을 텔레비전으로 돌렸다. 수아는 여전히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을 준 채, 자신의 심장 소리가 이 좁은 거실 안에 너무 크게 울리는 것 같아 숨을 죽였다. 방 너머에서,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그 틈으로, 주희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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