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그날 저녁, 사택으로 돌아오자마자 최여옥이 나를 불렀다.
대문을 넘어서기가 무섭게 마당쇠 아이가 달려와 할머니가 찾는다고 전했다. 신발을 벗을 새도 없이 곧장 안채로 향했다.
방문을 열자, 낡은 주문서 대신 두꺼운 고서가 서안 위에 펼쳐져 있었다.
먹 냄새가 코를 찔렀다. 새로 필사한 듯, 종이의 결이 아직 뻣뻣했다.
"오늘부터 이걸 외운다."
짧은 명령이었다.
나는 고서를 내려다봤다. 글자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평소 외우던 주문서보다 몇 배는 더 두꺼웠다. 한 장을 넘길 때마다 손가락 끝이 떨렸다.
"이건··· 상급 주문서잖아요···."
"그래서."
최여옥의 눈빛이 차가웠다.
칼날처럼 얇게 접힌 눈매, 그 안에서 감정이라고는 읽히지 않았다.
"열흘 안에 다 외워라."
"열흘은··· 너무 짧아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손끝이 뺨을 스쳤다.
짝,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뺨이 화끈거렸다.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데 한참이 걸렸다.
"변명하지 마라."
낮고 서늘한 목소리였다.
"네 어미도 이만한 걸 다 외웠다."
그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입술을 깨물었다. 짜디짠 맛이 혀끝에 번졌다.
어머니 얘기가 나올 때마다, 할머니의 눈빛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마치 어머니가 남긴 모든 흔적이, 나를 통해서만 갚아야 할 빚이라도 되는 것처럼.
"가서 외워라."
최여옥이 등을 돌렸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는 뜻이었다.
나는 고서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방을 나섰다. 팔이 무거웠다. 종이 몇 장 무게일 뿐인데, 마치 돌덩이를 안고 있는 것 같았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뺨을 감싸 쥔 채 고서를 펼쳤다.
글자들이 눈앞에서 흐릿하게 번졌다.
호롱불 심지를 돋우고, 무릎을 꿇은 채 첫 장부터 읽어 내려갔다. 낯선 한자와 처음 보는 부적 문양이 뒤섞여 있었다. 한 줄을 세 번, 네 번 읽어야 겨우 뜻이 짚였다.
그날 밤, 나는 새벽까지 주문을 외웠다. 눈꺼풀이 무겁게 감겨왔지만, 멈출 수 없었다.
몇 번이나 고개가 앞으로 꺾였다. 그때마다 이마가 서안 모서리에 닿을 뻔했고, 그 아슬아슬함에 놀라 다시 눈을 떴다.
새벽닭이 울 때쯤에야 겨우 첫 장을 넘길 수 있었다.
아홉 장이 남았다. 아직 열흘이나 있으니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손끝은 이미 저릿저릿했고, 눈은 모래가 낀 것처럼 뻑뻑했다.
다음 날 점심시간, 뒤뜰로 향하는 발걸음이 유난히 무거웠다.
밤을 꼬박 새운 몸은 천근만근이었고, 뺨에 남은 붉은 자국은 아무리 가려도 감춰지지 않았다.
"얼굴이 왜 그래?"
도현이 나를 보자마자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뺨에 남은 붉은 자국을 가리려 했지만, 이미 늦은 모양이었다.
그의 시선이 내 뺨에 가서 오래 머물렀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그가 내 뺨 가까이 손을 뻗으려다 멈췄다.
손끝이 허공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그는 결국 손을 거두었다.
"누가 그랬어."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넘어졌어요."
거짓말이었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만약 도현이 할머니에게 항의라도 한다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게 뻔했다.
도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믿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지만, 더 캐묻지는 않았다.
준영과 태민도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진짜 괜찮은 거지?"
태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
"네, 진짜 괜찮아요."
준영은 여전히 미심쩍은 얼굴로 나를 살폈지만, 이내 도시락 뚜껑을 열며 화제를 돌렸다.
"오늘 반찬 뭐 싸 왔어? 나눠 먹자."
억지스러운 다정함이었다. 그게 오히려 고마웠다.
그때, 저 멀리서 지완이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 게 보였다.
그는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예전과는 조금 다른 결이 섞여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의심하는 듯한, 혹은 관찰하는 듯한 눈빛.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게 나를 응시했다.
나는 애써 그 시선을 무시하고 카드를 집어 들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카드 모서리가 손가락 사이에서 자꾸 미끄러졌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은 계속 불안했다.
최여옥이 던진 그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유가 뭔지 알아봐야겠다.』
할머니가 알아보려는 이유가, 설마 도현일까.
그 생각만으로도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밥알이 목에 걸리는 기분이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카드 패의 그림도, 전부 멀게만 느껴졌다.
그날 오후 수업이 끝난 뒤, 나는 평소보다 일찍 뒤뜰을 떠났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서였다.
교문을 나서면서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 텅 빈 골목이 오히려 더 서늘하게 느껴졌다.
사택으로 가는 길, 골목 어귀에서 낯선 그림자를 봤다.
월궁회 소속 무녀 중 하나였다.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 낯익은 복식이었다.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조용히 사라졌다.
그 짧은 순간, 그녀의 눈빛에 스친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호기심인지, 아니면 확인인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발걸음을 재촉했다. 등 뒤로 누군가 따라오는 듯한 착각에 몇 번이나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그날 밤, 나는 방문 틈으로 새어 나오는 목소리를 다시 들었다.
고서를 외우다 물을 마시러 나가던 참이었다. 안채에서 새어 나오는 낮은 대화 소리에,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숨을 죽이고 문 옆에 몸을 붙였다.
"확인했느냐."
최여옥의 목소리였다.
"예. 백랑족 아이들과 어울리는 걸 봤다고 합니다."
다른 목소리가 낮게 대답했다.
낯선 목소리였다. 아마도 낮에 골목에서 본 그 무녀일 것이었다.
"그것도, 백가의 도련님과 특히 가깝게 지낸다고···."
침묵이 흘렀다.
길고, 무거운 침묵이었다.
그 침묵 속에서 나는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찬 바람이 목덜미를 스쳤지만, 그마저도 느낄 겨를이 없었다.
"그래."
마침내 최여옥이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에는 분노도, 슬픔도 아닌, 서늘한 계산만이 담겨 있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한, 그런 담담함이었다.
"그 아이가 감히."
나는 문 앞에서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벽을 짚지 않으면 그대로 주저앉을 것 같았다.
방금 들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나 명확했다.
비밀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서늘함이 발끝까지 번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