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선월학원의 뒤뜰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버려진 온실 뒤편, 깨진 유리 조각들이 반쯤 흙에 파묻힌 자리였다.
풀 냄새와 녹슨 쇠 냄새가 뒤섞여 코끝을 스쳤다.
나는 그곳에 웅크리고 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점심시간마다 반복되는 일이었다.
식당에 들어서면 시선이 쏟아졌다. 접시를 든 손이 떨렸다. 줄을 서 있는 동안에도, 자리에 앉으려는 순간에도, 등 뒤로 따라붙는 시선이 있었다.
무녀. 그 두 글자가 등 뒤에 항상 따라붙었다.
월궁회 소속, 그것도 최하층 혈통이라는 낙인은 교복 위에 새겨진 것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쟤가 그 애야. 죽은 무녀 딸.』
『가까이 가지 마. 재수 없어.』
누군가 속삭이는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
처음엔 그 말들을 하나하나 세었다. 몇 번째 시간에 누가 뭐라고 했는지, 몇 명이 나를 피해 자리를 옮겼는지.
이제는 세는 것도 그만두었다.
그저 도망칠 곳을 찾을 뿐이었다.
이 온실 뒤편이 유일한 도피처였다. 깨진 유리 조각을 밟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발을 디디면, 아무도 찾지 않는 작은 틈이 나왔다.
나는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울지 않으려 했는데 자꾸만 눈꺼풀이 뜨거워졌다.
무릎에 이마를 대고 숨을 골랐다. 하나, 둘, 셋. 숫자를 세면 마음이 가라앉는다고 누가 그랬던가. 어머니였던가, 아니면 그저 내가 지어낸 방법이었던가.
기억이 흐릿했다.
그때, 발소리가 들렸다.
무겁지 않았다. 오히려 조심스러웠다. 낙엽을 밟는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쿵, 쿵, 쿵.
누구든 여기서 나를 발견하면 좋을 게 없었다. 무녀가 몰래 숨어 있었다는 소문이 하나 더 붙을 뿐이었다.
"거기, 누구 있어?"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백랑족 특유의 억양이 섞여 있었다. 딱딱하지 않은, 그러나 분명한 발음.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나는 숨을 죽였다. 숨소리조차 내면 안 될 것 같았다.
그가 조금씩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유리 조각을 밟는 소리, 낙엽을 스치는 소리, 그리고 잠깐의 정적.
발소리가 멈췄다.
나를 찾은 걸까.
아니면 그냥 지나가는 걸까.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온실 뒤편으로 얼굴 하나가 불쑥 들어왔다.
은빛 머리카락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머리칼 아래로, 호박색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백랑족.
그것도 최고위 혈통의 색이었다.
교복 재킷 안으로 단정하게 넣은 셔츠, 흐트러짐 없는 옷매무새. 나와는 다른 세계에서 걸어 나온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몸을 더 움츠렸다.
도망칠 곳이 없었다. 등 뒤는 깨진 온실 벽이었고, 옆은 흙벽이었다.
"죄송해요···. 금방 나갈게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일어서려 했다.
그런데 그가 손을 뻗어 내 어깨를 살짝 눌렀다.
밀어내는 게 아니었다.
그 손끝의 온도가 옷 위로도 느껴졌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이상하게 낯선 온기였다.
"왜 사과해."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 앉아 있으면 안 되는 거야?"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늘 정해진 답이 있었으니까. 무녀는 백랑족의 눈에 띄면 안 된다. 그게 규칙이었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태어날 때부터 몸에 새겨진 것처럼 당연하게 여겨온 규칙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규칙을 아무렇지 않게 무너뜨리는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그는 내 옆에, 아무렇지 않게 털썩 주저앉았다.
교복 바지가 흙바닥에 닿는 것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저렇게 좋은 옷을 입고, 저렇게 함부로 앉아도 되는 걸까.
그가 무릎을 세우고 팔을 걸치며 나를 돌아봤다.
"나 백도현이야."
그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상처 하나 없는 손이었다. 매끈하고 하얀, 나와는 다른 세계의 손. 손톱 끝까지 정갈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내 손은 그렇지 않았다. 손등엔 작은 생채기가 몇 개, 손끝은 거칠었다. 매일 접시를 나르고, 청소를 하고,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손이었다.
나는 그 손을 잡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강서인이요."
겨우 이름을 뱉었다. 손은 잡지 못했다.
도현이 씩 웃었다.
그 웃음에 나는 순간 숨 쉬는 법을 잊었다.
화창한 날씨보다 더 밝은 웃음이었다. 그늘 하나 없이, 계산 없이 웃는 얼굴을 나는 오랫동안 본 적이 없었다.
"강서인."
그가 내 이름을 한 번 더 불렀다. 마치 확인하듯이.
혀에 이름을 올려놓고 그 무게를 가늠해보는 사람처럼.
나는 그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 내 이름을 이렇게 또박또박, 조롱이나 경멸 없이 불러준 게 얼마 만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가슴 한구석이 저릿했다.
그 순간,
종이 울렸다.
점심시간이 끝났다는 신호였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여기 있는 걸 들키면 안 됐다. 백랑족과 어울리는 무녀라니, 상상만 해도 등골이 서늘했다. 지금까지 쌓아온 침묵과 무시가, 이 짧은 순간으로 전부 무너질 수도 있었다.
"저 가야 해요···."
도망치듯 몸을 돌렸다.
발이 꼬일 뻔했다. 유리 조각을 밟지 않으려 애쓰며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등 뒤에서 도현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내일도 여기 있어?"
나는 대답하지 않고 뛰었다.
심장이 목까지 차오른 채로.
숨이 가빠지는 것도,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온실을 벗어나 본관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문득 뒤를 돌아봤다.
멀리서, 회색 머리카락의 소년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지완이었다.
도현의 친구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학원 안에서 몇 번 스친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그의 눈빛에는 경계심이 짙게 배어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지키려는 사람처럼, 나를 향한 시선이 날카롭게 굳어 있었다.
그 시선이 닿는 순간, 나는 내가 무슨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도망친 게 아니라, 쫓겨나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 시선을 피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복도를 지나는 내내 등 뒤가 따가웠다. 실제로 눈에 뭔가 박힌 것처럼.
교실 문을 열고 자리에 앉을 때까지도 심장은 가라앉지 않았다.
책상 위에 손을 올려놓았는데,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날 오후 수업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는 소리처럼 멀게 들렸고, 대신 그 목소리만 자꾸 되풀이됐다.
『왜 사과해.』
『여기 앉아 있으면 안 되는 거야?』
그 짧은 두 문장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이불 속에서 낮의 일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천장을 바라보며 손을 가슴 위에 얹었다. 심장 박동이 여전히 조금 빠른 것 같았다.
그가 왜 나를 밀어내지 않았을까.
그 흔한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고, 오히려 옆에 앉아 이름을 물었다.
백랑족 최고위 혈통이, 무녀인 나에게.
그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나는 오래도록 잠들지 못했다.
창밖으로 달빛이 희미하게 스며들었다. 나는 몸을 돌려 벽을 바라봤다.
내일도 여기 있어?
그 말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가지 않겠다고 다짐해야 했다. 다시는 그 자리에 가서는 안 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몸속 어딘가에서 작은 기대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 기대를 애써 눌러 담으며 눈을 감았다.
그러나 좀처럼 잠은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