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광산 행정관의 처소는 갱도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언덕 위에 있었다.
돌로 쌓은 담장 너머로 붉은 기와가 보였다. 노예들의 막사와는 격이 달랐다.
민재는 그 담장 앞에 섰다.
경비 둘이 창을 엇갈려 세운 채 입구를 막고 있었다.
"노예가 행정관님을 뵙겠다고?" 경비가 창끝으로 민재의 가슴을 툭 밀었다.
창끝은 날카롭지 않았으나, 그 무게만으로도 위협이 됐다.
"저는 정당한 청원을 하러 왔습니다." 민재가 말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청원? 그런 걸 노예가 한다고 들어주기라도 한대?" 경비가 다시 웃었다.
옆에 있던 다른 경비도 따라 웃었다. 노예가 청원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우스운 구경거리였다.
"들어봐라, 저 놈이 정당하다고 말하는구나." 한 경비가 옆의 동료에게 말했다.
"정당함이란 게 저런 놈한테도 있는 건가?" 다른 경비가 맞받았다.
그러나 그 웃음소리를 듣고 안에서 누군가 나왔다.
행정관 가라한이었다.
마족 특유의 붉은 눈, 이마엔 작은 뿔이 돋아 있었다.
체구는 크지 않았지만 태도에서 위압감이 흘렀다. 걸음걸이마다 여유가 있었고, 그 여유는 힘이 있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뭐가 이렇게 소란스러운가." 가라한이 물었다.
"노예 놈이 청원을 하겠다고 합니다." 경비가 대답했다.
"청원?" 가라한이 흥미롭다는 듯 민재를 내려다봤다.
붉은 눈이 위에서 아래로, 민재의 전신을 훑었다. 마치 물건을 감정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들여보내라. 오랜만에 웃을 일이 생기겠구나."
경비들이 창을 거두고 문을 열었다.
민재는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응접실이었다. 마족의 처소치고는 소박했으나, 이 광산 노예들이 사는 곳과는 비교할 수 없이 깨끗했다.
벽에는 광산 운영과 관련된 서류가 쌓여 있었고, 한쪽 구석엔 검은 술병이 놓여 있었다.
"말해봐라." 가라한이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무슨 청원인지."
그는 다리를 꼬고 앉아, 마치 재미있는 연극을 관람하려는 관객처럼 자세를 잡았다.
"감시대장 곽리의 과도한 폭력을 신고하러 왔습니다." 민재가 말했다.
"채굴 할당량 미달을 이유로 노예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매질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는 광산 운영 규정에도 위반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가라한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더니, 소리 내어 웃었다.
"규정이라고?" 가라한이 되물었다.
"노예 놈이 규정을 안다고 말하는 것부터가 신기하구나. 어디서 그런 걸 주워들었나?"
"저는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민재는 물러서지 않았다.
"광산 운영 조례 제17조, 노예는 생산 도구로서 함부로 폐기되어서는 안 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그것은 그가 갱도에서 벽면에 붙은 낡은 규정문을 몰래 외운 것이었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흘 동안, 그는 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머릿속에 담아두었다. 규정문 하나, 순찰의 시간대 하나, 감시탑의 위치 하나까지도.
'정보는 힘이다.' 그의 아버지가, 아니 그가 살던 세계의 아버지가 하던 말이었다. 이곳에서도 그 말은 여전히 유효했다.
가라한의 웃음이 잠깐 멈췄다.
하지만 곧 다시 이어졌다. 더 크게, 더 조롱조로.
"그래, 조례가 있긴 하지." 가라한이 말했다.
"그런데 그건 생산 도구로서 '함부로' 폐기하지 말라는 거다. 곽리가 그 놈을 함부로 죽였다는 증거가 있느냐?"
민재는 순간 말이 막혔다.
증거라니. 이곳엔 매질을 목격한 노예 수십 명이 있었으나, 그들 중 누구도 마족 행정관 앞에서 곽리를 고발할 리 없었다.
곽리에게 밉보이면 다음 날 갱도에 갇혀 나오지 못하는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목격자가 있습니다." 민재가 말했다.
"목격자? 노예의 증언은 이 광산에서 증거로 인정되지 않는다." 가라한이 잘라 말했다.
"그건 알고 있었을 텐데. 규정을 그렇게 잘 안다면."
가라한이 서류 하나를 집어 들며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규정 제3조. 노예의 증언은 단독으로 채택되지 않으며, 반드시 관리자 이상의 확인이 필요하다. 이건 몰랐나?"
민재는 이를 악물었다.
'노예의 말은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렇게 깨달았다.
규정 자체가 노예를 보호하는 것처럼 적혀 있으나, 실제로는 노예의 입을 봉하기 위한 장치였을 뿐이다. 마치 문을 열어주는 척하면서 안에 자물쇠를 하나 더 걸어둔 것과 같았다.
"게다가." 가라한이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곽리가 죽였다는 그 노예, 이름이 뭐지?"
"...민재입니다." 민재가 말했다.
자신의 이름을 자기 입으로 말하는 게 이상하게 낯설었다. 죽었던 자가 자신의 죽음을 신고하러 온 셈이었으니.
"민재." 가라한이 서류를 뒤적였다.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응접실에 무겁게 울렸다.
"어라. 그 이름, 아직 광산 명부에 살아 있다고 나오는데."
가라한의 붉은 눈이 민재를 훑었다.
이번엔 아까와는 다른 눈빛이었다. 흥미가 아니라 의심이었다.
민재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들켜서는 안 된다.'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곽리가 자신을 죽였다는 사실을 안 순간, 다시 확인 사살을 하러 올 것이 뻔했다. 이번엔 실수 없이, 두 번 세 번 확인한 후에야 손을 뗄 것이었다.
"명부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저 그 노예가 죽어가는 것을 본 목격자로서 신고하러 온 것입니다." 민재가 얼른 말을 돌렸다.
목소리는 침착했으나,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을 감추려 그는 두 손을 등 뒤로 감췄다.
가라한은 잠시 그를 쏘아봤다.
응접실에 정적이 흘렀다. 창밖으로 경비들이 창을 세운 채 서 있는 소리만 간간이 들렸다.
그러다 흥미가 식었는지, 다시 히죽 웃었다.
"됐다. 노예 하나 죽은 게 뭐 대수라고." 가라한이 손을 저었다.
"할당량만 채우면 된다. 못 채운 놈이 몇 명 죽는 건 광산 운영에 아무런 문제가 안 돼."
"그렇다면 곽리의 폭력은..." 민재가 다시 말을 꺼냈다.
"내가 임명한 감시자다. 그의 방식에 간섭할 이유가 없다." 가라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서는 것만으로도 방 안의 공기가 바뀌는 듯했다.
"청원은 끝났다. 나가라."
경비들이 다가와 민재의 어깨를 붙잡았다.
"들었지? 나가라잖아." 경비가 그를 문밖으로 밀었다.
민재는 저항하지 않았다. 저항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힘을 써봐야 손해만 볼 뿐, 얻는 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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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밖으로 나오며, 민재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낮게 깔린 구름 사이로 잿빛 태양이 흐릿하게 보였다.
'이 세계는 노예에게 아무런 통로도 열어주지 않는구나.'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청원도, 규정도, 정의도. 전부 강자의 손에서만 의미가 있었다. 규정문이란 것은 결국 강자가 자신의 편의를 위해 적어놓은 종이였을 뿐, 약자를 위한 안전망 같은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문득, 다른 의문이 그를 짓눌렀다.
자신에게 주어진 이 시스템, 상태창과 특성이라는 것. 이것이 정말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이 세계가 재미로 던져놓은 또 다른 놀잇감인지.
'왜 나에게 이런 힘이 생긴 걸까.' 그는 그렇게 자문했다.
답은 없었다. 상태창은 그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건, 힘이 있다는 것과 그 힘을 어떻게 쓸지는, 전적으로 자신에게 맡겨졌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스스로 답을 만들어야겠지.' 민재는 그렇게 결론지었다.
행정관에게 기댈 수 없다면, 스스로 정보를 모아 곽리의 배후를 파악하는 수밖에 없었다.
가라한이 규정을 그토록 능숙하게 인용한 것도 이상했다. 마치 이런 청원을 여러 번 받아본 사람처럼, 반박의 논리가 즉각적이었다.
'저 마족은 이런 일에 익숙하다.' 민재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자신 이전에도 비슷한 청원을 한 노예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모두, 지금 자신과 같은 결말을 맞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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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그는 소하에게 조용히 그 사실을 전했다.
막사 구석, 다른 노예들이 잠든 시각이었다. 낮게 신음하는 소리와 코 고는 소리가 뒤섞여 흘렀다.
"청원은 무시당했어요. 곽리는 처벌받지 않을 거예요." 민재가 말했다.
소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예상은 했지만, 확인받는 것은 또 다른 무게였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요?" 그녀가 물었다.
목소리가 작게 흔들렸다.
"직접 알아볼 거예요. 곽리가 어떤 힘을 등에 업고 있는지, 그리고 이 광산이 어떤 구조로 돌아가는지." 민재가 말했다.
"행정관마저 그를 감싸는 걸 보면, 단순한 감시대장이 아닐 수도 있어요. 뭔가 더 있어요."
소하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의 눈빛엔 사흘 전에는 없던 무언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전에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 버티는 눈이었다면, 이제는 무언가를 파악하려는, 계산하는 눈이었다.
소하는 그것을 알아챘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다만 그의 손을 다시 잡았을 뿐이다.
그녀의 손은 하루 종일 곡괭이를 쥐어 거칠었지만, 그 안에 담긴 온기는 여전했다.
"조심해요." 소하가 낮게 말했다.
"곽리가 당신을 알아보면... 다시 확인하러 올 수도 있어요."
"알아요." 민재가 답했다.
"그래서 더 서둘러야 해요."
갱도 저편에서, 검은 날개의 그림자가 순찰을 돌고 있었다.
그 날개가 달빛을 가릴 때마다, 막사 안의 노예들은 숨을 죄었다.
민재도 그 그림자를 눈으로 좇았다. 언젠가는 저 그림자의 정체까지도 알아내야 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