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낯선 몸에 숨은 전사

4화

다음 날 아침, 나는 별채 욕실에서 첫 위기를 맞았다. 샤워를 끝내고 몸을 닦는 동안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침대 위에 개켜진 속옷을 집어 든 순간, 나는 손에 든 그 얇은 천 조각을 한참이나 들여다봐야 했다. 브래지어였다. 이 신체, 서지안의 몸에 처음으로 제대로 옷을 갖춰 입어야 하는 순간이었는데, 그 후크를 어떻게 채우는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나는 남자였다. 정확히는 남자로 서른 몇 해를 살아온 남자였다. 이런 걸 배울 기회가 없었다. 여명 프로젝트에서도, 그 전의 인생에서도, 이런 종류의 지식은 필요한 적이 없었다. 일단 앞뒤를 뒤집어봤다. 후크가 등 뒤로 갔다. 손을 뒤로 돌려 채우려니 팔이 이상한 각도로 꺾였다. 다시 앞으로 돌려봤다. 이번엔 후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부터 헛갈렸다. 십 분 동안 낑낑댔다. 뒤로도 돌려보고 앞으로도 돌려보고, 결국 팔이 이상한 방향으로 꺾여서 어깨에 알이 배기도록 씨름했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은 마치 사지가 꼬인 인형 같았다. 이 몸의 원래 주인이었다면 눈 감고도 했을 일을, 나는 안경 없이 미로를 헤매는 사람처럼 더듬거리고 있었다. 그 소리를, 정확히는 그 신음과 옷자락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문밖에서 오순희가 들었다. "괜찮으세요?" 문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네, 네! 괜찮아요!" 나는 다급하게 대답했다. 목소리가 한 톤 높아진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문이 살짝 열렸다. 오순희가 고개만 빼꼼 내밀었다가, 팔이 등 뒤로 꼬인 채 거울 앞에서 버둥대는 내 상태를 보고는 아무 표정 변화 없이 문을 다시 닫았다. 그 무표정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놀라지도, 웃지도, 의아해하지도 않았다. 마치 이런 장면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이 분 뒤, 문 앞에 새 속옷 세트와 함께 짧은 메모가 놓였다. "앞에서 채우고 돌리세요." 메모지에는 그림까지 그려져 있었다. 화살표와 동그라미로 후크의 위치를 표시한, 나름 정성스러운 그림이었다. 나는 그 메모를 보며 얼굴이 화끈거렸다. 창피함과 동시에 이상한 의심이 들었다. 이걸 이렇게 자연스럽게, 당황도 없이, 게다가 그림까지 그려서 처리하는 사람이라면 뭔가를 이미 짐작하고 있는 게 아닐까. 기억을 잃은 여자가 자기 몸의 옷 입는 법을 모른다는 것. 그건 기억상실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뜻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오순희는, 적어도 겉으로는, 그 가능성에 대해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오순희는 그날 하루 종일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아침 식사를 차릴 때도, 방을 정리할 때도, 마당을 지날 때 스치듯 인사를 나눌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오순희는 원래도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필요한 말만 하고, 필요 이상의 감정은 절대 드러내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일수록 무언가를 숨기고 있을 확률이 높다는 걸, 나는 여명 프로젝트에서 배웠다. 침묵은 방패이기도 하고 무기이기도 했다. 점심 무렵, 나는 선우재희와 처음 마주쳤다. 이름은 선우재희. 선우 가문의 장녀였다. 태경보다 몇 살 위였고, 얼굴에는 억누른 분노 같은 것이 항상 옅게 깔려 있었다. 웃을 때조차 눈은 웃지 않았다. 걸음걸이에는 군더더기가 없었고, 말투에는 여백이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재희는 젊은 시절 무언가를 잃었다고 했다. 뭘 잃었는지는 아무도 자세히 말해주지 않았다. 가문 안에서도 그건 금기였다. 그 금기가 오히려 재희의 존재감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 재희는 나를 보자마자 한 발짝 다가와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향수 냄새가 짙었다. "네가 걔야?" 다짜고짜였다. "…네?" 나는 최대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다인이가 주워온 애." 재희의 목소리엔 경멸도 호기심도 아닌, 그 둘의 중간쯤 되는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기억이 없다며." "네, 없어요." 재희는 잠시 나를 훑어봤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마치 물건 감정하듯. 옷차림부터 손톱 끝까지, 그 시선에 놓치는 부분이 없었다. 그러다 짧게 웃었다. 웃음에도 온도가 없었다. "운 좋은 줄 알아. 우리 언니가 마음에 안 드는 건 집안에 안 들여." "태경 씨가 아직 저를 마음에 들어 하는지는 모르겠는데요."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럼 마음에 안 든다는 거네." 재희가 툭 던지고 지나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대화라고 하기도 애매한 짧은 주고받음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정보는 컸다. 이 가문의 최종 결정권은 태경에게 있고, 재희는 그 결정을 존중하되 자기 나름의 경계를 세우는 타입이었다. 존중과 경계, 그 두 개를 동시에 유지하는 사람은 대체로 위험했다. 어느 쪽으로도 예측이 안 되기 때문이다. 나는 재희의 뒷모습이 사라진 복도를 잠시 바라보다가, 손에 쥐고 있던 찻잔이 차갑게 식어버렸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그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나는 마지막 인물을 만났다. 이름은 선우다빈. 선우 가문의 셋째였다. 나이는 열여덧이나 열아홉쯤 되어 보였는데, 실제 나이보다 훨씬 앳돼 보이는 얼굴이었다. 말이 많고 거만했다. 식탁 예절 같은 건 안중에도 없어 보였고, 그 무례함조차 어딘가 훈련된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이 집에서 유일하게 눈치를 안 보는 사람이라는 게, 좋은 신호인지 나쁜 신호인지 나는 아직 판단할 수 없었다. 식탁에 앉자마자 다빈이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물었다. "언니, 이 사람 진짜 기억 없어? 연기 아니야?" 식탁이 순간 조용해졌다. 수저 소리마저 뚝 끊겼다. 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표정만은 최대한 평온하게 유지했다. 이런 순간에 흔들리는 얼굴을 보이는 게 가장 위험하다는 걸,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기억이 있으면 이렇게 여기 안 있겠죠."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건 그렇네." 다빈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그 이상 파고들지는 않았다. 다인이 다빈을 향해 눈치를 줬다. "밥 먹을 때 그런 얘기 좀 하지 마." "난 그냥 물어본 거야." 다빈이 입을 삐죽였다. 그러다 뭔가 새로운 걸 발견했다는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언니, 저 사람 손 좀 봐. 흉터가 왜 저렇게 많아?" 식탁의 시선이 일제히 내 손으로 쏠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무릎 아래로 내렸다. 너무 늦은 반응이었다. 그 짧은 순간에도 몇 개의 흉터가 이미 눈에 들어왔을 게 분명했다. 손등의 가느다란 선, 손가락 관절 부근의 오래된 흉터, 그리고 손목 안쪽의 흐릿한 자국까지. 서지안이라는 몸이 살아온 시간이 그 흉터들 안에 새겨져 있었고, 나는 그 시간을 하나도 알지 못했다. 다인이 급히 화제를 돌렸다. "다빈아, 그런 거 물어보는 거 아니야." 목소리에 평소보다 힘이 실려 있었다. 나를 감싸려는 태도가 분명하게 드러났고, 그 순간만큼은 다인의 시선이 오직 나를 향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봤다. 태경의 시선이 그 순간 아주 짧게, 정확하게 내 얼굴을 향했다는 걸. 그리고 그 눈빛에는 확신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놀람도 아니고 의심도 아니었다. 이미 알고 있던 것을 다시 확인하는, 그런 눈빛이었다. 뭔가를 확인했다는 눈빛이었다. 나는 그 눈빛을 마주하지 않으려 애써 시선을 돌렸다. 식탁 위의 국그릇에 시선을 고정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수저를 들었다. 하지만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걸 나는 스스로 알고 있었다. 식사가 끝난 뒤, 나는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오순희와 다시 마주쳤다. 그녀는 복도 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서 있었다. 조명이 어두운 복도 끝, 그림자와 거의 구분되지 않는 자세로. "서지안 씨." 오순희가 불렀다. "그 이름, 병원에서 알려준 이름이시죠." 나는 걸음을 멈췄다. 발밑의 마룻바닥이 순간 낮아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네. 왜요?" 오순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목례를 하고 지나갔다. 그 뒷모습이 복도의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발걸음 소리조차 조심스러워서, 마치 소리를 내지 않는 훈련을 받은 사람 같았다. 그 이름, 병원에서 알려준 이름이시죠. 그 말이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마치 다른 이름을 알고 있다는 뜻으로 들렸다. 그 말 한마디 안에, 오순희가 이미 알고 있는 것과 내가 모르는 것의 경계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 경계선의 반대편에 뭐가 있을지,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날 밤 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다. 천장을 바라보며 하루 동안 마주친 얼굴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무표정한 오순희, 온도 없는 웃음의 재희, 눈치 없이 직설적인 다빈, 그리고 마지막 순간 나를 향했던 태경의 그 짧은 시선까지. 이 집 안의 누구도 나를 순전히 기억을 잃은 낯선 사람으로만 보고 있지 않았다. 다들 뭔가를 알고 있거나, 적어도 뭔가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시선의 중심에, 병원에서 붙여준 이름 하나가 놓여 있었다. 서지안. 어쩌면 이 이름조차, 이 집에서는 진짜가 아닐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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