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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선우 가문의 저택은 대문에서부터 이상했다. 문 자체가 없었다. 담장을 따라 옅은 보랏빛 결계 같은 것이 일렁였고, 차가 그 앞에 서자 결계가 스스로 갈라지며 길을 냈다. 나는 창밖으로 그것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 그게 곧 정보였다. 기억을 잃은 사람은 놀라지 않는다. 그저 멍하니 본다. 나는 그 연기를 하루 만에 완벽하게 체득했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재능이었다. 여명 프로젝트에서 배운 건 전투와 침투, 정보 은닉, 표정 관리였다. 그중에서도 표정 관리는 제일 지루한 훈련이었다. 교관들은 매일 똑같은 얼굴을 들이밀고 "지금 뭘 느껴야 하는지 맞혀봐" 하고 물었다. 그때는 그게 무슨 쓸모가 있나 싶었는데, 지금 보니 이보다 실전적인 훈련이 없었다. 세상은 원래 이렇게 아이러니하다. 쓸모없다고 생각한 것들이 결국 목숨을 구한다. 선우다인이 차를 세우고 먼저 내렸다. "도착했어요." 그녀는 마치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저택은 별거였다. 삼 층짜리 본채가 완만한 언덕을 등지고 서 있었고, 그 앞으로 정원이 시야가 다 안 잡힐 만큼 넓게 펼쳐졌다. 어딘가에서 물소리가 들렸는데, 폭포인지 인공 폭포인지 구분이 안 됐다. 나무들은 지나치게 가지런했고, 잔디는 지나치게 짙은 초록이었다. 자연스러운데 자연스럽지 않았다. 돈으로 자연을 이겼을 때 나는 냄새가 있다면 딱 이런 냄새일 것이다. 부자였다. 그냥 부자가 아니라, 부자라는 단어로는 부족한 부자였다. 나는 속으로 숫자를 세어보려다가 그만뒀다. 세어봐야 의미가 없었다. 이런 곳에서 돈은 숫자가 아니라 그냥 공기였다. 현관 앞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이름은 오순희. 선우 가문의 집사였다. 나이는 예순을 넘긴 듯 보였지만, 등은 곧았고 걸음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흰머리를 단정하게 올려 묶었고, 옷깃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젊었을 때는 뭘 했을까, 나는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훈련받은 사람의 걸음이었다. 나는 그런 걸음을 알아본다. 여명 프로젝트에서 훈련교관들이 저렇게 걸었다. 발바닥을 다 딛지 않고, 무게중심을 항상 절반만 옮기는 걸음. 언제든 뛰쳐나갈 준비가 된 걸음이었다. 그런 사람이 왜 저택의 집사로 있을까. 나는 그 질문의 답을 아직 몰랐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그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아가씨, 늦으셨습니다." 오순희가 말했다. 목소리에는 다정함도 냉정함도 없었다. 딱 필요한 만큼의 온도였다. 선우다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병원 들렀다 왔잖아. 얘 좀 봐줘, 순희 씨." 그 말에 오순희의 시선이 나에게로 옮겨왔다. 그 순간이었다. 오순희의 눈동자가 반박자 늦게 움직였다. 사람을 살필 때 보통은 얼굴부터 훑는다. 그런데 오순희는 내 손끝을, 정확히는 손가락 마디의 흉터를 먼저 봤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고, 다시 얼굴로 시선이 옮겨왔을 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온했다. 나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놓칠 수가 없었다. 저 짧은 시선의 순서, 그게 훈련받은 사람의 습관이었다. 손이 아니라 손가락 마디의 흉터. 얼굴보다 먼저 그걸 본다는 건, 얼굴로는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얼굴은 꾸밀 수 있어도 흉터는 못 꾸민다는 걸 아는 사람의 시선이었다. 등골이 살짝 서늘해졌지만 표정에는 아무것도 담지 않았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오순희가 물었다. 다인이 대신 대답하려는데 오순희가 손을 살짝 들어 막았다. "본인 입으로 듣고 싶습니다." 다인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가 닫혔다. 뭔가 말하려던 걸 참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이 저택 안에서는 다인도 오순희 앞에서 완전한 자유가 없어 보였다. 나는 잠깐 침묵했다. 기억을 잃은 사람처럼, 이름을 떠올리려 애쓰는 표정을 지었다. 미간을 살짝 좁히고, 입술을 반쯤 벌렸다가 다시 닫았다. 실제로는 병원 서류에서 봤던 이름을 그대로 꺼낼 뿐이었다. 접수대 위에 붙어 있던 종이, 담당의가 손에 들고 있던 클립보드, 거기에 적힌 글자를 나는 이미 세 번쯤 반복해서 외웠다. "서지안이요."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연기였다. 대체로는. 오순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묻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 표정 뒤에 뭔가가 지나가는 걸 봤다. 아는 이름인가. 아니면 아는 얼굴인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이런 판단이 서지 않는 순간이 제일 위험하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인정하는 게 훈련의 첫 단계였으니까.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복도 끝에서 한 남자, 아니 정확히는 한 여자가 걸어 나왔다. 이름은 선우태경. 선우 가문의 가장이었다. 삼십대 중반이라 들었는데 얼굴만 보면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한국 액션 영화 속에서 방금 걸어 나온 것 같은 얼굴이었고, 걸음걸이는 오순희보다 더 절제되어 있었다. 저 사람도 뭔가를 했던 사람이다. 나는 그렇게 직감했다. 가문의 가장이라는 자리는 원래 나이 든 사람이 앉는 자리다. 그런데 저 사람은 삼십대 중반에 그 자리에 올라 있었다. 이유는 몰랐다. 위로 오빠나 언니가 있었을 수도, 없었을 수도 있었다. 다만 저런 얼굴로 저런 걸음을 걷는 사람이 아무 사연 없이 가장 자리에 앉았을 리는 없었다. 세상이 그렇게 쉽게 자리를 내주는 법은 없으니까. "다인아." 선우태경이 부르는 목소리에는 억양이 거의 없었다. "이 사람이 그 사람이야?" "응, 언니. 지안이야. 기억을 잃었대." 다인의 목소리엔 이미 애정이 묻어 있었다. 만난 지 하루도 안 됐는데, 세상은 원래 이렇게 성급하게 마음을 정해버리곤 한다. 선우태경이 나를 향해 걸어왔다. 눈높이가 나보다 조금 높았다. 그녀는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봤다. 오래, 그리고 깊게.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피하면 의심을 부른다. 시선을 피하지 않는 것도 연습이 필요했지만, 여명 프로젝트에서 그 정도는 배웠다. 몇 초가 지났다. 시간이 이상하게 느려졌다. 다인은 옆에서 발끝을 까딱거렸고, 오순희는 뒤에서 조용히 서 있었다. 그 정적 속에서 나는 선우태경의 눈동자 색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짙은 갈색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검은색에 가까웠다. 사람을 오래 보는 눈은 대개 저런 색이다. 많은 걸 봐서 색이 짙어진 눈. "기억이 없다." 선우태경이 되풀이했다. 확인이 아니라 실험이었다. 반응을 보는 질문이었다. "네." 나는 최대한 지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눈을 뜨니까 골목이었어요." "어느 골목인지도 모르고?" "몰라요." "이름도 서류에서 봤을 뿐이고?" 그 질문에 나는 잠깐 멈췄다. 서류라는 말은 다인이 병원에서 언급한 적 없는 단어였다. 저 여자는 벌써 병원 기록을 확인했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표정에 담지 않으려고 애쓰며 대답했다. "네. 담당 선생님이 그렇게 알려주셨어요." 선우태경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짧게 말했다. "방을 내줘. 씻고 쉬게 해." 그러고는 몸을 돌려 복도 안쪽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뭔가를 봤다는 확신이 들었다. 정확히 뭔지는 몰랐지만, 저 여자의 눈에 나는 이미 하나의 의문문이었다. 다인이 내 팔을 잡아끌며 위층으로 안내했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나는 벽에 걸린 초상화들을 봤다. 다들 눈매가 비슷했다. 가문의 핏줄이란 게 저렇게 눈에서 드러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초상화 속 사람들은 하나같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고, 그 응시가 하나같이 서늘했다. 초상화만 봐도 이 가문이 뭘 하는 집안인지 짐작이 갔다. 웃는 얼굴로 그려진 초상화가 단 하나도 없었다. "저기 저 사람은 우리 할머니야." 다인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무섭게 그려놨지? 실제로는 더 무서웠어." "어떤 분이셨는데요." "몰라도 돼. 아니, 몰라야 돼." 다인은 그렇게 말하고 웃었는데, 그 웃음 끝이 살짝 굳어 있었다. 나는 그것도 놓치지 않았다. 그 순간 뒤에서 오순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서지안 씨 방은 동쪽 별채로 정했습니다." "왜 별채야? 본채에 방 많잖아." 다인이 되물었다. "태경 아가씨 지시입니다." 오순희가 담담히 대답했다. "언니가 왜 그런 지시를 해? 손님을 별채에 보내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 "저는 지시받은 대로 전할 뿐입니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다인의 얼굴에 불만이 스쳤지만, 곧 지워졌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별채. 본채와 떨어진 곳. 격리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괜찮아요." 나는 일부러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어디든 상관없어요. 신세 지는 것만도 감사한데." 다인은 그 말에 마음이 약해진 듯 나를 한 번 안아주려다 오순희의 시선을 느끼고 멈췄다. "그래도 별채는 좀 춥고 오래됐는데. 순희 씨, 난방은 넣어놨지?" "미리 조치했습니다." 오순희의 대답은 언제나 짧고 정확했다. 감정을 담지 않는 사람 특유의 말투였다. 나는 그 말투에서도 훈련의 흔적을 봤다. 필요한 정보만, 필요한 만큼만. 그게 이 사람의 화법이었다. 그날 밤, 나는 배정받은 방의 창가에 앉아 정원을 내려다봤다. 옅은 자주색 노을이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이 세계의 하늘은 여전히 낯설었다. 원래 있던 세계의 하늘과 색이 미묘하게 달랐다. 노을이 조금 더 붉었고, 별이 뜨는 시간이 조금 더 빨랐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차이였지만 나는 매일 그 차이를 세고 있었다. 창밖 저편, 정원 끝자락에 불이 켜진 작은 별채 하나가 보였다. 아마 저기가 오순희의 숙소일 것이다. 그 불빛이 밤이 깊도록 꺼지지 않았다. 새벽 두 시가 넘어도, 세 시가 넘어도 그 불은 그대로였다. 잠을 안 자는 사람인가. 아니면 잠을 안 자야 하는 사람인가. 멀리서 발소리가 들렸다. 하나가 아니었다. 둘, 어쩌면 셋. 정원을 가로질러 걷는 발소리였는데, 리듬이 하나같이 조심스러웠다.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창문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발소리는 곧 정원수 사이로 사라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착각이었을까. 아니, 착각이 아니었다. 이 저택에서는 밤에도 누군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다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잠들기 직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선우태경은 이미 뭔가를 알고 있다. 오순희도 뭔가를 알고 있다. 저 정원을 걷는 발소리의 주인도 뭔가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만 모른다. 세상은 원래 이렇게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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