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규칙 하나, 키스는 금지

2화

그 여자를 처음 만난 건 대학교 3학년, 카이스트 연구동 근처 벤치였다. 늦가을이었다. 낙엽 냄새와 커피 냄새가 뒤섞여 있던 오후. 나는 논문 마감에 시달려 벤치에 널브러져 있었다. 사흘 밤을 새운 몸이었다. 눈은 뜨고 있었지만 정신은 반쯤 나가 있었다. 그때 누군가 내 옆에 앉았다. 기척도 없이. 마치 원래부터 거기 있었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니 여자였다. 커피 두 잔을 든 여자. "드세요." 이름도 묻지 않았는데 커피를 건넸다. 그때만 해도 나는 그게 첫 만남인 줄 알았다. 세상 어디에나 있는, 그런 우연한 친절인 줄 알았다. 실은 아니었다는 걸, 나는 한참 뒤에야 알았다. - "저 사람 알아요? 저기 서 있는." 그날, 은채가 무심코 던진 말이 떠오른다. 별생각 없이 던진 질문처럼 들렸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 사람을 봤다. 정장을 입은 중년 남자였다. 특별할 것 없는 얼굴. 특별할 것 없는 뒷모습.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은채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커피만 남아 있었다. 아직 온기가 남은 종이컵. 나는 그때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냥 급한 일이 있나 보다, 하고 넘겼다. 대학생의 사고란 게 원래 그렇게 단순하니까. 나중에, 정말 나중에 뉴스에서 그 사람의 부고 기사를 봤다. 심장마비. 그렇게 나와 있었다. 기사 아래 사진 속 얼굴을 보는 순간, 손끝이 차가워졌다. 분명 그 사람이었다. 벤치 근처에 서 있던, 은채가 물었던 그 사람. 나는 그날 처음으로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하지만 확신은 없었다. 세상엔 우연이라는 게 있으니까. 심장마비로 죽는 중년 남자가 하루에도 몇 명씩 나오는 세상이니까.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확신이 든 건 그로부터 이 년이 지난 뒤였다. 그날 밤, 은채는 늦게 들어왔다.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 현관문 여는 소리에 나는 잠에서 깼다. 그녀의 손에서 피 냄새가 났다. 향수로도 가려지지 않는, 비릿하고 진한 냄새였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이거 뭐야." 손목에 붉은 자국이 있었다. 가느다란, 하지만 깊어 보이는 상처. "베였어." "어디서." "묻지 마." 그녀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시험하는 눈빛이었다. 마치, 여기서 더 캐물으면 어떻게 되는지 보자는 듯한.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이 여자는 평범한 회사원이 아니었다. 손이 떨렸다.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정확히 뭔지 모르겠지만, 무언가 거대한 것의 끝자락을 만진 기분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그녀를 미행 아닌 미행을 했다. 어리석은 짓이었다. 이 여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뒤를 밟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퇴근 시간에 맞춰 그녀의 회사 앞에서 기다렸다. 그녀가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면 멀찍이 따라갔다. 지하철에서는 다른 칸에 탔다. 스릴러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짓을, 나는 진지하게 했다. 바보 같았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결국 목격했다. 어느 밤, 고급 세단 앞에서 그녀가 한 남자의 차 문을 닫아주는 걸 봤다. 우아한 손짓이었다. 남자는 웃으며 그녀에게 뭐라 말했고, 그녀도 웃으며 답했다. 연인처럼 보였다. 몇 시간 뒤, 그 남자가 실려 나가는 걸 봤다. 들것에 실려 나가는 남자의 얼굴은 창백했다. 구급대원들이 다급하게 움직였다. 그 광경을 나는 골목 어귀에 숨어서 지켜봤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았다. 대신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세 번 울렸다. 네 번째에 그녀가 받았다. "만나서 얘기 좀 해." 그녀는 아무 대답 없이 전화를 끊었다. 뚝, 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나는 그날 밤 한숨도 못 잤다. 이불 속에서 뒤척이며 생각했다. 신고를 해야 하나. 아니, 신고하면 뭐라고 말할 건데. 봤다고? 뭘 봤는데. 커피 건네던 여자가 알고 보니 살인청부업자였다고? 그리고 이틀 뒤, 그녀가 내 자취방 문 앞에 서 있었다. 얼굴이 창백했다. 평소의 여유로운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어딘가 지친 얼굴이었다. "뭘 봤는데." 그녀가 먼저 물었다. "다 봤어." "그럼 신고해." "안 해." "왜." 그 질문에 나는 오래 대답하지 못했다. 왜였을까. 그때 내가 느낀 건 두려움이 아니라 이상하게도 안도감이었다. 이 여자가 살아있어서 다행이라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이상했다. 사람을 죽이고 다니는 여자를 앞에 두고, 나는 그녀가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게 맞나. 아니야. 이건 정상이 아니야. 그런데도 마음은 그렇게 움직였다. "조건이 있어." 대신 나는 그렇게 말했다. "뭔데." "일할 때는 나한테 오지 마. 그 입술로 사람 유혹하고 온 날, 나한테 키스하지 마." 그녀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그 표정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마치 오래된 상처를 건드린 사람 같은 얼굴이었다. 순간적으로 드러났다가 사라진, 아주 짧은 균열. "왜 그런 조건을 거는데." "네가 사람 죽이는 입으로 나한테 오는 게 싫어. 나머지는 다 상관없어."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완전한 진실도 아니었다. 사실은, 그녀가 다른 남자에게 그 표정을 짓는 걸 상상하기가 싫었다. 우아하게 웃으며 차 문을 닫아주던 그 손짓, 그 눈빛이 다른 남자를 향하는 게 싫었다. 질투였다. 아주 유치하고, 아주 인간적인.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그녀가 다른 남자에게 웃어주는 게 더 견디기 힘들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이 남자가 진짜, 우선순위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그녀는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 "알았어." 짧은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뭔가가 결정됐다는 걸 느꼈다. 돌이킬 수 없는 무언가가. 그날부터 우리는 이상한 규칙 속에서 관계를 이어갔다. 일이 끝나면 반드시 씻고 오라는, 아무도 이해 못 할 규칙이었다. 친구들에게 이 얘기를 하면 다들 미쳤다고 할 거다. 아니, 애초에 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니었다. 몇 년이 흘렀다. 나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연구소에 취직했다. 은채는 여전히 그 일을 했다. 나는 묻지 않았고, 그녀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쌓였다. 그리고 지금, 오피스텔 창밖을 보며 나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도시의 불빛이 흐릿하게 번져 있었다. 늦은 밤, 차 소리도 뜸해진 시간. 은채는 이미 자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등을 바라보다가 문득 그녀의 손목에 남은 오래된 흉터를 봤다. 몇 년째 봐온 흉터였지만, 그날따라 유난히 신경이 쓰였다. 가느다란 선. 이제는 하얗게 아문 자국. 처음 봤던 그날의 붉은 상처가 이렇게 옅어질 때까지, 얼마나 많은 밤을 이 여자는 혼자 견뎠을까. 손끝으로 그 흉터를 살짝 만지려다 멈췄다. 깨우고 싶지 않았다. 이런 순간엔, 그냥 지켜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내 휴대폰이 울렸다. 진동음이 방 안의 정적을 깼다. 회사에서 온 메시지였다. 현무-X 프로젝트 관련 자료 요청. 익숙한 업무 메일이었다. 이 시간에 이런 메일이 오는 게 드문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발신인란에 낯선 이름 하나. 정민호. 왜 이 시간에.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회사 내부 인원 명단에도 없던 이름. 발신자 주소도 낯설었다. 나는 문자를 열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읽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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