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호텔 방의 조명은 붉었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도시의 불빛까지 전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이 방 전체가 나를 위해 핏빛으로 물들여진 무대 같았다.
조성재는 넥타이를 풀며 웃고 있었다. 지방 은행장 출신이라던가. 국방 예산 서류를 빼돌려 팔아넘긴 브로커치고는 표정이 참 순진했다. 나는 그 웃음을 마주 보며 잔을 들었다. 잔 속의 얼음이 짤랑, 소리를 냈다.
"이렇게 예쁜 사람이 왜 나 같은 늙은이한테."
그가 물었다. 목소리에 취기가 살짝 섞여 있었다.
"늙은이라뇨. 멋있으신데요."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거짓말이었다. 전부 다.
내가 웃는 이유도, 여기 앉아 있는 이유도, 그의 옆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그의 자랑을 들어주는 이유도. 전부 다.
"그거 알아? 내가 예전에 사업 크게 말아먹었을 때…"
그는 신이 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 척했다. 실은 머릿속으로 다른 계산을 하고 있었다. 서재 위치. 금고 비밀번호 세 자리까지 확보. 남은 건 서재 문 앞을 지키고 있을 경호원 한 명.
그리고 이 남자.
정보, 그다음 침묵. 순서는 늘 그랬다.
그의 손이 내 허리를 감았다. 나는 그 손을 밀어내지 않았다. 대신 그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손끝이 떨리는 걸, 그는 긴장이라 착각했다.
"긴장돼? 나도 그래."
그가 낮게 웃으며 속삭였다.
실은 다른 떨림이었다.
와인 잔에 탄 것이 그의 혈관을 타고 돌기 시작할 즈음, 그의 말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나는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심장 박동이 서서히 느려지는 게 입술 아래로 느껴졌다.
"어, 이상하네…"
그가 중얼거렸다. 눈꺼풀이 무거워 보였다.
"괜찮아요. 그냥 자요."
나는 그의 등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자장가처럼 부드럽게.
그가 나른하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는 뜨지 못했다.
쿵.
그의 몸이 침대에 무너졌다.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앉아 숨을 골랐다. 방 안은 조용했다.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 그리고 내 숨소리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 반대였다. 아랫배 어딘가가 뜨겁게 조여왔다. 손끝까지 열이 올라왔다.
이게 정상인가.
아니야. 정상일 리가 없잖아.
사람 하나가 방금 내 손에 의해 이 세상에서 지워졌는데, 나는 지금 다른 이유로 숨이 가빴다. 이 감각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나도 몰랐다. 죄책감이라기엔 너무 뜨거웠고, 쾌감이라기엔 너무 낯설었다.
그런데도 몸은 멈추지 않았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이 감각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나는 조성재의 서재로 가서 서류를 챙겼다. 금고 비밀번호는 예상대로였다. 세 번째 시도 만에 문이 열렸을 때, 나는 낮게 숨을 내쉬었다.
파일 두 개. 이거면 충분했다.
손이 떨렸다. 흥분 때문인지, 다른 이유인지는 나조차 알 수 없었다. 이 감각은 늘 이런 식으로 찾아왔다. 사람을 지운 직후, 몸속 어딘가에서 뭔가가 터져 나왔다.
마치 벌을 받아야 할 것 같은 쾌감이었다.
나는 그 감각을 억누르려 손끝을 꾹 눌렀다. 늘 하던 습관이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손이 계속 떨렸다.
호텔을 빠져나오면서 나는 휴대폰을 켰다. 화면이 밝아지는 그 짧은 순간에도, 심장은 여전히 진정되지 않고 있었다.
도윤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끝나면 연락해. 기다릴게.]
그 문장을 읽는데 손끝이 조금 진정됐다. 신기한 일이었다. 사람을 죽이고 나온 손으로 그 문자를 읽으면, 이상하게 숨이 트였다.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화면을 들여다봤다. 별거 아닌 문장인데. 그냥 여덟 글자짜리 문장인데. 그런데 왜 이렇게 안심이 되는 걸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근처 호텔 샤워실에서 피 냄새와 향수를 전부 씻어낸 뒤에야 도윤의 오피스텔로 향했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불빛들이 흐릿하게 번졌다. 신호등, 간판, 지나가는 차들의 헤드라이트. 전부 다 흐릿했다. 나는 손끝을 꾹 눌렀다. 아직 남아 있는 열기를 억누르려는 습관이었다.
택시 기사가 라디오를 틀어놓고 있었다. 뉴스에서 국방 예산 관련 브리핑이 흘러나왔다. 나는 무심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가, 이내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내 손으로 만든 일이 뉴스가 되어 나오는 걸 듣는 기분은,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도윤의 집 앞에 도착했을 때, 그는 문을 열자마자 나를 훑어봤다. 옷차림, 화장, 향수 냄새. 그가 무엇을 알아채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내 목덜미, 흐트러진 옷깃, 그리고 손끝까지 훑고 지나갔다.
"오늘은 어디였어."
그가 물었다. 다정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차가운 목소리도 아니었다.
"강남."
"끝났어?"
"끝났어."
짧은 대답들 사이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이 이상하게 편안했다.
그가 나를 안으로 들였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딸깍, 들렸다. 나는 그의 품에 안기며 눈을 감았다. 그의 심장 소리가 귀에 닿았다. 쿵, 쿵, 쿵. 그 소리가 조성재의 심장이 멈추던 순간과 겹쳐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살인을 저지른 다음에야 비로소 안심이 됐다.
도윤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내 등을 쓸어내렸다. 그의 손길에는 어떤 심판도 없었다. 이 남자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다 알면서도, 이렇게 나를 안아준다.
그 손길이 얼마나 오래 이어졌는지 모른다. 나는 그저 그 품 안에서, 아까 손끝을 태우던 열기가 서서히 식어가는 걸 느끼고 있었다. 이 사람 앞에서만, 나는 겨우 사람으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날 밤, 그의 휴대폰이 두 번 연속으로 울렸다.
그는 화면을 흘깃 보더니 표정이 굳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나는 그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왜."
내가 물었다.
"회사에서. 미사일 프로젝트 관련해서 급한 회의가 잡혔대."
그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나는 그 표정에서 뭔가 더 있다는 걸 눈치챘다.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는데,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아주 조금.
"이 시간에?"
"어. 원래 그런 데야."
그는 짧게 웃으며 넘기려 했다. 나는 더 캐묻지 않았다. 캐묻는다고 그가 말해줄 사람도 아니었고, 나 역시 오늘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다 말하지 않았으니까.
우리는 늘 이런 식이었다. 서로의 절반만 아는 채로, 나머지 절반은 침묵으로 채우는.
그리고 그날 밤, 내 휴대폰에도 낯선 번호로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내일 오전 열 시. 본부로.]
발신인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게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손끝이 다시 차가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