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쿵.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가 거실 바닥을 타고 울렸다.
나는 숨을 죽였다. 현관에 선 채로, 손잡이를 잡은 손이 얼어붙었다.
발끝부터 냉기가 올라왔다. 신발을 벗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서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낮고, 고요하고, 아무 감정도 없는 목소리였다.
"그렇게 조용히 죽고 싶었으면 처음부터 나를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숨이 막혔다. 천식 흡입기를 찾으려던 손이 주머니 속에서 떨렸다. 지퍼를 내리는 손끝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거실 바닥에, 낯익은 얼굴이 쓰러져 있었다. 눈을 뜬 채로.
피가, 흰 대리석 바닥 위로 천천히 번지고 있었다.
물처럼 퍼지는 게 아니었다. 기름처럼, 느리게, 끈적하게.
그리고 그 위에 서 있는 여자는, 내 아내였다.
서윤은 나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마치 내가 거기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
다섯 달 전이었다.
나는 여느 때처럼 혼자 카페 구석 자리에 앉아 있었다. 노트북 화면 속 게임 캐릭터를 키우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사람 많은 곳은 늘 숨이 막혔다. 눈이 마주치면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손끝이 차가워지고, 목이 조여왔다.
카페 창가 자리는 늘 피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유리를 통과해 나에게 꽂히는 기분이었으니까. 구석, 콘센트가 있는 자리. 등을 벽에 붙일 수 있는 자리. 그게 내가 살아남는 방식이었다.
스물일곱 살. 자폐 스펙트럼 진단을 받은 지 오래됐고, 사회불안장애 약을 매일 삼켰다. 천식 흡입기는 늘 재킷 안주머니에 있었다. 몸무게는 86킬로그램, 키는 170센티미터. 거울을 볼 때마다 스스로에게 실망하는 게 습관이 됐다.
연애는 네 번 시도했고, 네 번 다 바람맞았다. 마지막 여자는 상견례 자리에 나오지 않았다. 부모님 앞에서 세 시간을 기다렸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물잔만 만지작거렸다. 그 침묵이 더 아팠다. 그날 이후로 나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말 자체를 믿지 않게 됐다.
취업도 몇 번 실패했다. 면접관과 눈을 못 맞춘다는 이유로, 목소리가 너무 작다는 이유로. 결국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고,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통장 잔고는 늘 아슬아슬했다. 그런 나에게 유일한 도피처는 이 카페 구석 자리와, 화면 속 세상뿐이었다.
그런데 그날, 카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딸랑-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키가 190센티미터는 되어 보이는 여자가 들어왔다. 검은 코트가 어깨선을 따라 흘러내렸고, 걸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얼굴은 비현실적일 만큼 정교했다. 마치 조각된 것 같았다.
카페 안 모든 대화가 잠깐 멈췄다가 다시 이어지는 게 느껴졌다. 누구나 그녀를 봤고, 누구나 다시 눈을 돌렸다. 감히 오래 쳐다볼 수 없다는 듯이.
그녀는 곧장 내 쪽으로 걸어왔다.
발소리마저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또각, 또각. 리듬이 일정했고, 망설임이 없었다.
"여기, 자리 있나요?"
목소리마저 완벽했다. 나는 대답도 제대로 못 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넓은 카페에 빈자리가 서너 개는 더 있었는데도, 그녀는 굳이 내 앞에 앉았다. 그때는 그게 이상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내 맞은편에 앉았다. 커피를 시키고, 나를 빤히 바라봤다.
시선을 피하려 했지만, 그럴수록 그녀의 눈이 나를 따라왔다. 도망칠 곳이 없었다.
"게임하시네요."
"아, 네. 그냥... 취미로요."
목소리가 갈라졌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났다.
"저도 좋아해요. 어릴 때 많이 했거든요."
말도 안 되는 우연이었다. 아니, 지금 생각하면 우연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는 그냥, 오랜만에 누군가와 말이 통한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그녀는 내 노트북 화면을 흘깃 보더니, 캐릭터 이름을 정확히 맞췄다. 흔한 게임이 아니었는데도.
"이거,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게임인데."
"저도 우연히 알게 됐어요."
그녀가 웃었다. 입꼬리가 정확히 대칭으로 올라갔다.
그녀의 이름은 강서윤이라고 했다. 성이 강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나이도, 직업도, 사는 곳도. 물어보면 그녀는 늘 화제를 돌렸다.
"그런 거 안 궁금해요, 현우 씨는 나만 보면 안 돼요?"
그 말이 로맨틱하게 들렸다. 그때는.
그날 이후로 그녀는 매일 그 카페에 나타났다. 우연이라기엔 너무 정확한 시간이었다. 늘 오후 세 시, 늘 같은 자리.
일주일 만에 우리는 저녁을 함께 먹었다. 값비싼 레스토랑이었다. 메뉴판에 가격이 없었다. 나는 화장실에 가는 척 자리를 비우고 지갑 속 카드 잔액을 확인했다. 결국 그녀가 계산을 했고,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이주일 만에 그녀는 내 손을 잡았다. 손이 차가웠다. 이상하게, 그 차가움이 싫지 않았다.
"현우 씨는 왜 이렇게 자신을 낮게 봐요?"
그녀가 물었을 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저 같은 사람이 뭐가 좋다고..."
"내가 좋다고 하면 안 돼요?"
그녀의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 눈빛이 오히려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너무 확신에 차 있었으니까.
한 번은 그녀가 내 손목을 잡고 맥박을 재듯 지그시 눌렀다.
"빠르네요. 나 때문에요?"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심장이 실제로 그녀의 손끝 아래에서 뛰고 있었으니까.
한 달 만에 그녀는 결혼을 말했다.
나는 웃으며 물었다. "장난이죠?"
"나는 장난 안 해요."
그녀의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서늘한 무언가를 느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가, 곧 사라졌다.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나는, 그 서늘함을 사랑이라고 착각했다.
***
결혼식은 조용했다. 하객도 거의 없었다. 나는 그게 그저 그녀의 취향이라고 생각했다.
식장은 작은 정원이었다. 꽃은 온통 흰색이었고, 하객석은 열 개도 채우지 못했다. 내 쪽 하객은 부모님뿐이었고, 그녀 쪽은 낯선 얼굴 몇몇이 검은 정장을 입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결혼식이라기보다는 다른 무언가의 의식 같았다.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정말... 괜찮은 거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그게 최선의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식이 끝나고 그녀가 나를 데려간 곳은, 도심 한복판의 초고층 건물이었다. 유리로 된 외벽이 하늘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로비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회장님."
그 두 글자가, 내 귀에 이상하게 크게 들렸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서윤이 나를 돌아봤다.
로비 안내 데스크 뒤편, 검은 대리석 벽에 새겨진 로고가 눈에 들어왔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마크였다. 뉴스에서, 광고에서, 셀 수 없이 봐온 그 로고.
"말 안 했나요? 한성그룹, 내 거예요."
손끝이 저릿해졌다. 한성그룹이라니. 대한민국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왜... 왜 말 안 했어요?"
목소리가 떨렸다.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중요해요? 내가 누구든, 현우 씨는 나를 사랑하잖아요."
그녀는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무서웠다.
로비 직원들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호기심과 경계가 뒤섞인 눈빛이었다. 저 여자가 회장님의 배우자인가. 저렇게 평범한 사람이.
나는 그 시선 속에서 처음으로, 내가 무언가 잘못된 자리에 서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현우 씨."
서윤이 내 손을 잡았다. 차가운 손이었다. 늘 그랬듯이.
"이제 여기가 우리 집이에요."
그녀는 나를 엘리베이터로 이끌었다. 문이 닫히는 순간, 로비의 불빛이 서서히 가려졌다.
나는 그때 알았어야 했다. 그녀가 나에게 보여준 것은,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층수 표시등이 하나씩 켜졌다. 10, 20, 30... 숫자가 올라갈수록 내 심장은 반대로 가라앉았다.
서윤은 아무 말 없이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거울처럼 반들거리는 엘리베이터 벽에, 그녀의 옆얼굴이 비쳤다. 표정이 없었다. 완벽하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 순간 나는 처음으로 궁금해졌다.
이 여자는, 대체 나를 왜 골랐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