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악역, 봄을 다시 살다

4화

강태민이 나를 서재로 부른 것은 저녁 식사가 끝나고 사흘이 지난 밤이었다. 창밖으로 늦가을 바람이 마른 낙엽을 쓸어가는 소리가 들리던 무렵, 집사 박용현이 직접 내 방문을 두드렸다. "아가씨, 도련님께서 서재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말투에서 나는 묘한 긴장을 읽어냈다. 평소라면 하녀를 시켜 전달했을 일을, 굳이 집사가 직접 나선다는 건 이 자리가 예사롭지 않다는 뜻이었다. 박용현의 눈빛도 평소와 달랐다. 시선이 미묘하게 아래로 향해 있었고, 손끝이 문틀을 짚은 채 미세하게 떨렸다. 뭔가 있다. 나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침착했지만, 심장은 이미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 순간이 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막상 눈앞에 닥치니 손끝이 서늘해졌다. 서재는 3층 복도 끝, 강태민의 방과 이어진 곳에 있었다. 복도를 걷는 동안 발밑에서 마룻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벽에 걸린 초상화들, 강 회장의 젊은 시절 사진, 그리고 이 저택의 오랜 역사를 증명하는 골동품들이 어둠 속에서 나를 지켜보는 듯했다. 문을 열자 그는 책상 앞에 서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달빛이 그의 옆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고, 나는 그 넓은 등을 보며 잠시 걸음을 멈췄다. "오셨습니까." 그가 돌아서지도 않고 말했다. "앉으시죠." 나는 별말 없이 소파에 앉았다. 소파의 가죽이 서늘하게 등을 받쳤고, 나는 무릎 위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그가 마침내 몸을 돌려 나를 마주했을 때, 그 눈빛에는 평소의 무심함과는 다른 종류의 날이 서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벼려온 칼을 이제야 꺼내드는 사람처럼. "요즘 당신,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가 운을 뗐다. "말투도, 행동도, 심지어 하인들을 대하는 태도까지." "달라지면 안 되는 겁니까?" 나는 담담히 되물었다. "이상하다는 겁니다." 그가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질투도, 히스테리도, 그 흔한 신경질조차 없어졌어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다른 사람. 그 말이 정곡을 찔렀지만 나는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단순히 성격이 변한 것뿐이라고 밀어붙일 수 있을까? "사람은 변할 수 있는 겁니다." 나는 짧게 답했다. "그게 그렇게 이상한 일인가요?" "물론 그럴 수도 있죠."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되물었다. "제가 어디 이상한 곳에라도 다녀왔다고요?" "글쎄요."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쳤지만, 그건 결코 다정한 미소가 아니었다. "그걸 알아보려고 이 자리를 마련한 겁니다." 그는 나를 한참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뒀다. "이상하지 않다면 좋겠지만."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박 집사가 최근 당신 방을 정리하다가 이상한 서류를 발견했다고 하더군요." 서류. 순간 심장이 툭 내려앉는 감각을 느꼈지만, 나는 애써 태연하게 물었다. "무슨 서류 말씀이십니까?" "당신 출생 당시 병원 기록입니다. 혈액형이 표시된." 그가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할아버지와도, 강하율과도 일치하지 않는 혈액형이더군요." 올 것이 왔다. 나는 이미 첫날부터 알고 있었다. 이 몸이 강 회장의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윤미경이 자신의 병약한 친딸을 이 저택에 밀어 넣었다는 사실을. 원작 소설 속에서 이 진실은 훨씬 나중, 서윤이 완전히 몰락한 후에야 밝혀지는 반전이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예상보다 빠르게 움직인 탓인지, 아니면 애초에 이 세계가 원작과는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 탓인지, 진실이 예정보다 일찍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터질 줄은 몰랐지. 이렇게 갑작스럽게, 이렇게 무방비한 상태에서 마주하게 될 줄은. "혈액형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반드시 뭔가 이상한 건 아니죠." 나는 침착하게 말을 골랐다. "드물지만 그런 경우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럴 수도 있죠." 그가 순순히 인정했다. 하지만 그 순순함이 오히려 더 불길했다. "그래서 확실히 하기로 했습니다. 유전자 검사를." "검사요?" "할아버지께 이미 보고드렸습니다. 사흘 후, 가족들과 박 집사가 모두 모인 자리에서 결과를 확인할 겁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미안함도, 배려도 없었다. 오직 확인하고자 하는 냉정한 의지뿐이었다. 나는 그 목소리에서 그가 이미 결과를 확신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이건 의혹의 확인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의 공식화였다. 타협의 여지가 없다는 뜻이군. "정말입니까?" 나는 되물었다.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나요? 가족 간의 신뢰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겁니까?" "신뢰." 그가 그 단어를 곱씹듯 되풀이했다. "당신이 요즘 보여준 행동들이, 그 신뢰라는 걸 흔들었으니 하는 말입니다." "제가 뭘 어쨌길래요?" "모르시겠습니까?" 그가 한 걸음 다가섰다. "당신은 더 이상 예전의 강서윤이 아닙니다. 말투도, 눈빛도,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다 달라졌어요. 그런데 혈액형까지 맞지 않는다니, 의심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습니까." 나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 순간 내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그것이 곧 죄를 인정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질 터였다. 나는 이 몸의 진짜 정체를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지금 여기서 내가 먼저 그 사실을 실토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침착하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받아들이는 편이 나았다. "알겠습니다." 나는 짧게 대답했다. "확인하시면 되겠네요." 내 태연함에 그가 다시 미간을 좁혔다. 그 표정에는 의심과 당혹감이 동시에 스쳤는데, 아마도 그는 내가 부정하거나, 화를 내거나, 최소한 동요하는 모습을 기대했을 것이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그가 물었다. "제가 뭘 어쩌겠습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이면 사실인 거고, 아니면 아닌 거겠죠." "당신답지 않군요."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예전 같았으면 벌써 발작하듯 소리를 지르거나, 아니면 눈물을 쏟았을 텐데." "제가 변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나는 그의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었다. "그렇다면 이런 반응도 그 변화의 일부겠죠."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커튼을 흔들었고, 나는 그 미세한 움직임을 바라보며 속으로 다음 수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사흘 후. 윤미경에게 미리 알려야 할까, 아니면 그녀도 그날 처음 진실과 마주하게 두어야 할까. 그녀가 미리 알게 된다면 어떤 수를 쓸지 예측할 수 없었다. 반대로 그날 처음 알게 된다면, 그 순간의 충격이 오히려 나에게 유리한 패로 작용할 수도 있었다. 타협점은 없었다. 이미 검사는 진행 중이었고,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문제는 그 결과가 밝혀진 뒤 내가 어떻게 이 상황을 나에게 유리하게 이끌어낼 것인가였다. "더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없습니다." 그가 짧게 답했다. "사흘 후에 뵙겠습니다." 서재를 나서는 길, 복도 끝에서 박용현과 마주쳤다. 그는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지만, 그 눈빛에는 이전에 없던 차가운 계산이 어려 있었다. 촛불이 그의 얼굴 반쪽을 밝혔고, 나머지 반쪽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아가씨." 그가 낮게 불렀다. "이번 일, 저는 그저 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압니다." 나는 짧게 답했다. "믿어주십시오." 그가 덧붙였다. "저는 누구의 편도 아닙니다. 다만 진실이 밝혀지는 게 이 집안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진실이라. 그 말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이 사람은 알고 있을까. 그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 사람이 앞으로 어느 편에 설지, 이미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직감했다. 저 흔들림 없는 걸음걸이가 그 증거였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창가에 서서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달빛 아래 서리 맺힌 나뭇가지들이 은빛으로 반짝였고, 그 고요함이 오히려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사흘. 그 사흘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윤미경을 찾아가야 할까,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까. 강 회장은 이미 보고를 받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의 마음은 이미 어느 정도 정해졌을지도 모른다. 사흘 뒤, 이 저택의 모든 것이 뒤집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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