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저녁 식사 자리는 3층 응접실에 마련되어 있었다. 긴 원목 테이블 위로 은촛대의 불빛이 흔들렸고, 창밖으로는 정원의 조명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테이블보 위로 놓인 은식기들이 촛불을 받아 서늘하게 반짝였고, 어딘가에서 낮게 흐르는 클래식 선율이 방 안의 공기를 팽팽하게 조율하고 있었다.
강 회장은 이미 상석에 앉아 있었는데, 흰머리가 성성한 노신사였음에도 눈빛만은 날카롭게 살아 있어 방 안 전체를 압도하는 존재감을 뿜어냈다. 저 눈빛 하나로 수십 년간 그룹을 지켜왔을 것이다. 그 옆자리에 강태민이 앉아 있었고, 나는 예정된 대로 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자리에 앉으며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냅킨을 무릎에 펼쳤다. 손끝이 차가웠다. 긴장 때문인지, 실내 온도 탓인지 알 수 없었다.
문이 열리고 강하율이 들어온 순간, 방 안의 온도가 미묘하게 바뀌는 걸 느꼈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스무 살이 채 안 된 나이답게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계산적으로 반짝였다. 원작에서 묘사된 그대로였다. 순진해 보이는 껍데기 속에 숨겨진 야심. 걸음걸이조차 계산된 듯 사뿐했고, 고개를 숙이는 각도마저 딱 적당했다. 저 나이에 저런 몸가짐을 익히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을 거울 앞에서 보냈을까. 그녀가 웃으며 강 회장에게 인사를 건네는 목소리는 맑고 부드러웠지만, 나는 그 안에 담긴 계산을 읽어낼 수 있었다.
"처음 뵈어요, 태민 오빠." 그녀가 강태민을 향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강태민의 표정에 미세한 변화가 스쳤다. 평소의 무표정에 균열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눈매가 살짝 부드러워지고, 입가에 옅은 곡선이 그려졌다. 그 짧은 변화를 나는 놓치지 않았다.
원작대로였다. 첫눈에 흔들리는 장면.
예전의 강서윤이었다면 이 순간 손끝이 떨리고 목이 메었을 것이다. 물잔을 놓치거나, 포크를 떨어뜨리거나. 그리고 곧이어 자리에서 뭔가 실수를 저질러 모두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 원작의 전개였다. 강 회장은 혀를 찼을 것이고, 강태민은 시선을 돌렸을 것이고, 강하율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을 것이다. 나는 그 대신 물잔을 들어 천천히 한 모금을 마시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유리창 너머로 정원등이 하나 더 켜졌다.
동요하지 않는다. 동요하지 않는다. 동요하지 않는다.
"서윤이는 왜 그렇게 조용해." 강 회장이 나를 향해 물었다. 그 목소리에는 시험하듯 날이 서 있었다.
"편찮으셔서 그런가 봐요." 강태민이 대신 대답했다. 무심한 말투였지만, 그 말이 나를 감싸는 것인지 밀어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에요."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하율 씨 얘기를 좀 더 듣고 싶어서요."
강하율의 눈이 나를 향했다. 잠깐이지만 그 안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 예상 밖의 반응이었을 것이다. 질투도, 견제도 없는 담담한 태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율 씨는 어디서 자라셨어요?" 나는 물었다. 이미 답을 알고 있었지만, 그 대답을 이 자리에서 그녀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다.
"지방에서요. 저를 키워주신 분들이… 사정이 있으셔서 오래 떨어져 있었어요." 그녀가 눈을 살짝 내리깔며 말했다. 연습된 슬픔이었다. 눈꺼풀이 떨리는 타이밍마저 정확했다.
"그러셨구나. 힘드셨겠어요." 나는 진심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연기가 아니었다. 진짜로 안타까웠다. 병약하다는 이유로 부모에게서 떼어져 낯선 곳에서 자란 아이의 인생이란, 어느 쪽이든 순탄치 않았을 테니까. 계산이 있든 없든, 그 시간 자체는 진짜였을 것이다.
강 회장이 포크를 내려놓으며 나를 흘긋 보았다. "서윤이 너답지 않게 침착하구나."
"제가 원래 이랬나요?" 나는 되물으며 웃었다. 가벼운 말투였지만, 그 안에는 은근한 도발이 섞여 있었다.
강 회장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노회한 그의 얼굴에서 그런 감정을 읽어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지금 이 자리의 기류가 예전과 다르다는 증거였다.
식사가 이어지는 동안 강태민의 시선이 종종 강하율에게 머물렀다가, 이따금 나를 향하기도 했다. 그 시선에 담긴 감정을 읽으려 애썼지만,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 예전의 질투 어린 강서윤이었다면 절대 만들지 못했을 균형이, 지금 이 자리에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
포크와 나이프가 접시에 부딪히는 소리, 낮게 흐르는 음악, 이따금 오가는 짧은 대화. 그 사이사이로 나는 강하율의 손동작을 관찰했다. 냅킨을 만지작거리는 손끝, 물잔을 드는 각도, 강태민 쪽을 향하는 시선의 빈도. 하나하나가 계산된 몸짓이었다. 원작 속에서 이 여자가 어떻게 이 집안을 손에 넣었는지, 그 시작을 지금 두 눈으로 보고 있는 셈이었다.
"서윤이 오늘 좀 다르네." 식사가 끝나갈 무렵 강태민이 낮게 말했다. 나를 향한 첫 관심의 표현이었다.
"제가요?" 나는 되물었다.
"평소 같지 않아서." 그는 팔짱을 끼며 나를 응시했다. "뭔가 이상한데."
"좋은 쪽으로 이상한 건가요, 나쁜 쪽으로 이상한 건가요."
그가 잠시 헛웃음을 흘렸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그건 두고 봐야 알겠지."
짧은 대화였지만, 나는 그 안에서 무언가 미세하게 균열이 생겼다는 걸 느꼈다. 예전의 무관심이 관심으로, 아주 조금 바뀌고 있었다.
강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식사 자리가 끝났음을 알렸다. 강태민도 뒤따라 일어섰고, 강하율은 나에게 살짝 목례를 하고는 먼저 방을 나섰다. 나는 잠시 그대로 앉아 은촛대의 불빛이 흔들리는 걸 지켜보았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넘겼다는 안도감과, 앞으로가 더 문제라는 불안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
식사가 끝난 후 정원으로 나와 홀로 밤바람을 쐬고 있을 때,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강하율이었다.
정원의 조명 아래 그녀의 흰 원피스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밤공기 속에서도 그녀의 걸음걸이는 여전히 정갈했다.
"저기, 서윤 언니." 그녀가 처음으로 나를 언니라고 불렀다. 그 호칭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진짜 자매였으니 당연한 것인데도, 그 사실이 아직 실감 나지 않았다.
"네."
"아까 왜 그렇게 물어보셨어요? 제 얘기." 그녀의 눈빛이 조심스러웠지만, 그 안에는 탐색의 기색이 뚜렷했다.
"그냥 궁금해서요."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 집안에 갑자기 나타난 사람이니까요."
"오빠… 아니, 태민 오빠랑 저는 오늘 처음 봤어요." 그녀가 서둘러 덧붙였다. 마치 내가 오해라도 할까 봐 서두르는 듯했다.
"알아요." 나는 웃었다.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 말에 강하율의 표정이 묘하게 흔들렸다. 안심이 아니라, 오히려 불안이 스치는 얼굴이었다. 예상했던 질투와 견제가 나오지 않으니, 그녀로서는 오히려 다음 수를 가늠하기 어려워진 것이었다.
"언니는… 안 무서우세요?" 그녀가 불쑥 물었다.
"뭐가요?"
"제가 이 집에 들어온 게요. 다들 저를 경계하던데."
"경계할 필요가 있나요?"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되물었다. "하율 씨가 뭘 할 것도 아닌데."
그 대답에 강하율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그녀는 무언가를 더 캐물으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결국 말을 삼켰다.
걔? 망설임이 없어?
그녀는 잠시 나를 응시하다가,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원작 속 강하율은 언제나 계산이 앞서는 인물이었다. 상대의 반응을 미리 그려놓고, 그 틀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 그녀의 방식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계산이 처음으로 어긋나기 시작했다.
밤바람이 차가웠다. 나는 팔을 감싸 안으며 저택의 불빛을 올려다보았다. 3층 응접실의 불은 이미 꺼져 있었고, 대신 강태민의 방으로 보이는 창문에만 여전히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저 창 너머에서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 안에서 벌어질 다음 국면이, 이미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의 중심에, 이제 나도 발을 들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