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천민, 신선이 되기로 했다

3화

### 3화 다음 날 밤, 마을 어귀에 횃불 여럿이 모여들었다. 하나둘 켜지던 불빛이 어느새 열댓 개로 불어나 있었다. 붉은 불꽃이 흔들릴 때마다 사내들의 그림자가 땅바닥에 길게 늘어졌다 짧아지기를 반복했다. 최촌장의 명을 받은 장정들이었다. 낫과 몽둥이, 개중에는 쇠스랑을 든 자까지 있었다. 열댓 명의 발걸음이 태영의 집을 향해 무겁게 몰려가고 있었다. "그 집 천것 아들놈, 오늘 밤 끝을 봐야 한다!" 선두에 선 사내가 소리쳤다. "어제 촌장님 체면을 그리 짓밟아 놓고도 살아 숨 쉬게 두면 우리가 다 우스운 놈이 되는 게야!" 옆에서 걷던 자가 낫자루를 손바닥에 탁탁 두드리며 맞장구쳤다. "천것 씨가 감히 양반댁 자제를 병신을 만들어? 오늘 밤 그 씨를 아예 말려 죽여야지." 그들의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이미 술과 노기로 가득 찬 얼굴들이었다. 태영은 그날도 후산에서 늦게까지 나무를 하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등에 진 지게가 유난히 무겁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멀리서 횃불의 행렬을 발견한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태영은 지게를 내던지듯 벗어놓고 달렸다. "어머니...!"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발바닥이 돌부리에 채여도 멈추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나뭇가지가 얼굴을 할퀴었지만 아픈 줄도 몰랐다. 오로지 저 앞, 붉은 불빛이 모여드는 방향으로만 두 다리가 움직였다. 하지만 그의 발보다 장정들의 걸음이 먼저였다. 이미 집 앞마당까지 이른 그들은 사립문을 발로 걷어차고 있었다. '쾅!' 문짝이 부서졌다. 낡은 경첩이 뜯겨나가며 마당 한복판으로 나동그라졌다. "이놈! 어디 숨었느냐!" 방 안에서 오씨 부인이 놀란 비명을 질렀다. "태, 태영아... 태영아 어디 있느냐...!" 떨리는 목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이 집구석에 처박혀 봐야 소용없다! 오늘은 기어이 끄집어내고 만다!" 장정 하나가 방문을 향해 다가서던 그 순간이었다. "멈춰!" 태영이 마당으로 뛰어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머니와 장정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장정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쏠렸다. "왔구나, 이 어린놈이." 우두머리가 낫을 겨눴다. 횃불에 비친 낫날이 서늘하게 번뜩였다. "어제는 운이 좋았던 것뿐이다. 오늘은 그렇지 못할 것이다." "...!" 태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어제는 하나를 상대했을 뿐이었다. 오늘은 하나둘도 아니고 열댓이었다. 어제의 힘으로도 감당하기 벅찬 숫자였다. 손끝이 저릿하게 떨려왔다. "저리 비켜라, 애송이!" 장정 하나가 몽둥이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태영이 몸을 틀어 피했다. 몽둥이가 허공을 가르며 옆으로 스쳤다. 그러나 곧이어 두 번째, 세 번째 장정이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이쪽도 있다!" "놓치지 마라!" 포위된 채였다. 사방에서 그림자가 좁혀들었다. '퍽!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태영의 어깨와 옆구리에 몽둥이가 꽂혔다. "으윽...!" 태영이 신음하며 쓰러졌다. 흙바닥에 무릎이 파묻혔다. "태영아!" 오씨 부인이 방문을 열고 뛰쳐나오려 했으나, 다리에 힘이 풀려 문턱에서 주저앉았다. "안 돼요, 어머니! 들어가세요!" 태영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이미 여러 곳에서 얻어맞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팔을 짚고 일어서려는 찰나, 또 다른 몽둥이가 등을 후려쳤다. '퍽!' "크윽...!" 태영이 다시 고꾸라졌다. 흙바닥에 얼굴을 처박은 채 이를 악물었다. "이놈, 오늘로 끝을 내주마." 우두머리가 낫을 치켜들었다. 낫날이 횃불빛을 받아 붉게 물들었다. "이 애비 없는 천것 새끼, 여기서 끝내주면 촌장님도 흡족해하실 게야." 태영은 눈을 부릅뜬 채 낫을 올려다보았다. 도망칠 힘도, 막을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거, 참 시끄러운 밤이로군." 느긋한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흘러나왔다. 모두의 시선이 소리가 난 쪽으로 향했다. 담장 위에 한 노인이 걸터앉아 있었다. 다 해진 삼베 옷에 지저분한 봇짐을 멘, 영락없는 떠돌이 거지의 행색이었다. 허리춤에는 찌그러진 호리병 하나가 달랑거리고 있었다. "뭐 하는 늙은이냐! 상관 말고 꺼져라!" 우두머리가 소리쳤다. "괜히 끼어들었다간 늙은이 목숨도 부지 못할 게다!" 노인은 대답 대신 담장에서 뛰어내렸다. 그런데 그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마치 깃털이 내려앉듯 소리 하나 없었다. '스으윽' 땅에 발이 닿았는데도 흙먼지 하나 일지 않았다. "허어, 애 하나 잡겠다고 열댓이 몰려들다니. 이 늙은이가 살다 살다 별꼴을 다 보는군." 노인이 혀를 찼다. 봇짐을 고쳐 메며 태영과 쓰러진 오씨 부인을 흘깃 살폈다. "게다가 어미까지 앞에 두고 이 짓거리라... 참으로 사내다운 열댓이로세." "닥쳐라!" 장정 하나가 노인을 향해 몽둥이를 휘둘렀다. '스르릉' 노인의 손이 움직인 것 같지도 않았는데, 몽둥이는 어느새 두 동강 나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잘린 단면이 매끈했다. 장정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뭐, 뭐야 이 늙은이?" 손에 남은 몽둥이 반 토막을 내려다보며 그가 뒷걸음질쳤다. "그냥 지나가는 술꾼이다." 노인이 히죽 웃었다. 이 하나가 빠진 잇몸이 드러났다. "허나 오늘 밤 여기서 벌어지는 일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노인의 눈빛이 순간 서늘하게 변했다. 방금까지의 능글맞은 웃음기는 온데간데없었다. "다들 덤벼라!" 우두머리가 다급히 외쳤다. 남은 장정들이 일제히 노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퍼퍼퍼퍽!' 눈 깜짝할 사이, 장정들이 하나씩 나가떨어졌다. 노인의 손이 스칠 때마다 사람들이 짚단처럼 쓰러졌다. 어느 자는 배를 부여잡고 뒹굴었고, 어느 자는 몽둥이를 놓친 채 마당 구석까지 나가떨어졌다. '퍽! 퍽! 쿵!' 태영은 눈을 크게 뜬 채 그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열댓 명이 순식간에 흙바닥에 널브러지는 데 채 열 호흡도 걸리지 않았다. 어제 자신이 상대했던 힘과는 격이 다른, 무언가 완전히 다른 세계의 것이었다. 순식간에 마당에는 노인과 태영, 그리고 신음하는 장정들만 남았다. "가, 가자!" 남은 이들이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낫과 몽둥이를 내던진 채 서로 부딪히며 사립문 밖으로 사라졌다. 노인은 태영에게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괜찮으냐, 꼬맹아." "...누구십니까?" 태영이 경계하며 물었다. 부어오른 어깨를 붙잡은 채 노인을 올려다보았다. "박노인(朴老人)이라 부르면 된다. 그냥 떠돌이 늙은이지." 박노인이 웃으며 봇짐을 뒤졌다. "어제 후산에서 벌어진 일을 좀 보았느니라. 그 힘, 타고난 것치고는 꽤나 대단하더구나." "...보셨습니까?" 태영이 눈을 크게 떴다. 그렇다면 어제 자신이 이 최가 아들놈을 상대로 벌인 일도, 이 노인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래. 헌데 그 힘만으로는 앞으로도 저런 놈들을 계속 상대해야 할 거다. 오늘처럼 열댓 명이 몰려오면, 언젠가는 당해내지 못할 게야." 박노인의 말에는 조롱기가 없었다. 담담한 사실을 짚어내는 어조였다. "오늘 밤 살아남았다고 해서 내일 밤도 그럴 거란 보장은 없느니라. 저 촌장이란 자, 한번 마음먹으면 끝을 보는 성정이 아니더냐." 태영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몸 곳곳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이 그 말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박노인이 작은 호리병 하나를 꺼냈다. 낡고 투박한 나무 재질의 호리병이었다. 마개 틈으로 은은한 향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게 뭔지 아느냐?" "...모릅니다." "신선주(神仙酒)라 한다. 아무나 마신다고 되는 게 아니지만... 네놈은 그 자질이 보이는구나." 태영은 호리병과 노인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호리병에서 풍기는 향이 코끝을 스칠 때마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듯했다. "마시면 어찌 됩니까?" "몸이 바뀔 것이다. 뼈와 살이, 기맥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지. 다시는 지금 같은 무력함에 떨지 않아도 될 것이다." 박노인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마치 수백 번도 더 해본 말인 양 담담했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세상에 공짜란 없는 법이니. 허나 지금 당장 네게 필요한 건 그런 셈속이 아니라, 오늘 밤 같은 일을 두 번 다시 겪지 않을 힘이 아니겠느냐." 오씨 부인이 문턱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불안한 눈빛이었으나, 아들을 지켜야 한다는 본능이 앞섰다. 부어오른 다리를 끌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태영아... 저 어르신을 믿어 보거라."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확고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오늘 이 어른이 아니었다면... 우리 모자는 오늘 밤을 넘기지 못했을 게다." 어머니의 목소리에 태영은 마음을 굳혔다. 부어오른 옆구리를 짚으며 천천히 일어섰다. "...마시겠습니다." 박노인이 호리병 마개를 열었다. 은은한 향기가 마당에 퍼졌다. 코끝을 찌르는 듯하면서도 어딘가 달콤한, 처음 맡아보는 냄새였다. "단단히 각오해라. 그 몸이 다시 태어나는 고통은... 결코 만만치 않을 게야." 박노인의 눈빛이 진지하게 가라앉았다. "한번 마시면 되돌릴 수 없다. 그래도 마시겠느냐?" 태영이 호리병을 받아 들었다. 손이 떨렸다. 손끝에 닿은 나무 재질의 촉감이 서늘했다.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오씨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영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그리고 단숨에, 들이켰다.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리는 액체가 처음에는 뜨거웠다가, 이내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했다.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크윽...!" 태영의 눈이 크게 뜨였다. 몸속 어딘가에서 낯선 통증이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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