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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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울국(汗鬱國) 변방, 돌무래골.
산세가 험하고 땅이 척박하여 나라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관아에서 파견 나온 아전조차 일 년에 한두 번 얼굴을 비칠까 말까 한 곳, 그렇기에 이곳의 법도는 오직 하나, 촌장의 말이었다.
이곳에는 아홉 개의 계급, 구품(九品) 신분제가 뿌리 깊게 박혀 있었으니, 일품에서 삼품까지는 촌장과 그 일가붙이들이 차지하고, 사품에서 육품까지는 대대로 땅을 부친 양민들이 자리했으며, 칠품과 팔품은 소작농과 노비들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 구품.
구품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밭을 갈다 죽어도, 산에서 굴러떨어져 죽어도, 그 죽음을 슬퍼할 이가 없었다. 아니, 슬퍼해서는 안 되었다. 그것이 이 마을의 불문율이었다.
강태영(姜太永)은 그 구품의 자식이었다.
열두 살, 아직 앳된 얼굴에는 또래보다 짙은 그늘이 드리워 있었다. 볕에 그을린 얼굴, 마디가 굵어진 손가락, 그리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눈빛. 그것이 태영을 처음 본 사람들이 흔히 짓는 감상이었다.
어머니 오씨(吳氏)가 외지에서 흘러온 남편을 따라 이 마을에 정착했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그저 낯선 여인이라 여겼을 뿐이었다. 곱상한 얼굴에 말수가 적은 여인, 그저 그뿐이었다. 하나 남편이 홀연히 사라지고 배 속의 아이가 태어난 순간부터 모든 것이 달라졌다.
"어디서 굴러먹던 사내인지도 모르는 놈의 씨를 배고서."
"필시 무슨 죄를 짓고 도망친 게야."
마을 아낙들의 수군거림은 오씨 부인의 등 뒤에 늘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그리고 그 그림자는 고스란히 태영에게로 옮겨왔다.
"아비도 없는 종자가 어딜 감히."
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다. 사생자(私生子). 그 두 글자가 강태영의 삶 전체를 결정지었다. 구품 중에서도 가장 밑바닥, 사람들의 침이 가장 쉽게 날아드는 자리였다.
칠품의 소작농들조차 태영을 마주치면 슬쩍 길을 비켜 걸었다. 마치 부정 탄다는 듯이.
"태영아."
어머니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오씨 부인은 십 년 넘게 앓아온 해수병으로 몸이 마른 나뭇가지처럼 야위어 있었다. 한때는 고왔다던 그 얼굴에는 이제 뼈마디가 도드라져 있었고, 오늘따라 유독 숨소리가 거칠었다.
"콜록... 콜록콜록..."
기침이 한번 터지면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태영은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심장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어머니, 조금만 참으세요."
태영이 젖은 수건을 이마에 올렸다. 손끝이 떨렸다.
찬물에 적신 수건이었다. 열을 내리는 데는 이것 말고 달리 방도가 없었다. 약초라도 달여드리고 싶었지만, 태영이 아는 약초는 산기슭에 흔한 몇 가지뿐이었고, 그마저도 오씨 부인의 병에는 별 소용이 없었다.
마을에는 의원이 있었다. 최씨 성을 가진 그 의원은 삼품 신분으로, 진맥 한 번에 은자 서 돈을 받는 자였다. 은자 서 돈이면 태영이 밭일을 해서 반년은 모아야 겨우 만질 수 있는 액수였다.
태영이 작년 겨울 어머니를 업고 그 문 앞에 섰을 때, 의원은 문지방도 넘기 전에 코를 틀어막았다.
"구품 것들이 어딜."
의원의 문하생인 듯한 어린 소년마저도 태영을 향해 코웃음을 쳤던 기억이 났다.
"돈은 있고?"
그 물음에 태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없었으니까. 동전 한 닢조차 없었으니까.
"없으면 썩 물러가거라. 여긴 아무나 드나드는 곳이 아니다."
그날의 냉소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었다. 은자는커녕 동전 한 닢 없던 태영은 그저 어머니를 다시 업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등에 업힌 어머니의 몸이 얼마나 가벼웠는지, 그것이 오히려 태영의 가슴을 후벼팠었다.
'쿵쿵쿵'
밖에서 거친 발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안에 있느냐!"
최촌장(崔村長)의 하수인들이었다. 사립문이 부서질 듯 흔들렸다.
태영이 황급히 문을 열었다. 험상궂은 사내 셋이 마당에 서 있었다. 하나같이 몽둥이를 들고 있었고, 우두머리인 듯한 자가 팔짱을 낀 채 이죽거렸다.
"빚이 벌써 석 달째 밀렸다. 촌장님께서 그냥 넘어가실 것 같으냐?"
"조금만...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십시오."
태영이 고개를 숙였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빚이란 것도 사실 태영의 잘못이 아니었다. 오씨 부인의 약값으로 촌장에게 곡식 두어 말을 빌렸을 뿐인데, 그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었다. 구품에게 빌려주는 곡식의 이자는 원래 그런 식이었다. 갚을 수 없게, 영원히 매여 있게.
"흐흐, 시간이라. 네 놈이 뭘로 갚을 건데? 그 병든 어미 팔아치우기라도 하려느냐?"
사내의 조롱에 태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런 말씀은 삼가주십시오."
"뭐라?"
사내가 한 걸음 다가섰다. 태영의 어깨를 거칠게 밀쳤다.
'퍽!'
태영이 뒤로 넘어갔다. 흙바닥에 무릎이 쓸렸다. 살갗이 찢어지며 따끔한 통증이 올라왔지만, 태영은 신음 한 번 내지 않았다. 신음을 냈다가는 저들이 더 즐거워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태영아!"
방 안에서 오씨 부인의 비명 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몸을 일으키려다 다시 콜록거리며 쓰러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어머니는 나오지 마세요!"
태영이 다급히 외쳤다. 하지만 오씨 부인의 기침 소리는 그치지 않았고, 그 소리가 태영의 귀에는 마치 비수처럼 꽂혔다.
"저놈 봐라, 눈에 힘 들어간 거."
옆에 서 있던 다른 사내가 낄낄거렸다.
"구품 놈 주제에 눈은 살아서."
"이래서 씨가 뭔지 궁금하다니까. 저 눈빛 하고는."
우두머리 사내가 태영의 턱을 발끝으로 툭 건드렸다.
"고개 들어봐라."
태영은 이를 악물었다.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덤벼들고 싶었다. 저 몽둥이를 빼앗아 저 이죽거리는 낯짝을 후려치고 싶었다. 하지만 저들 뒤에는 최촌장이 있었고, 최촌장 뒤에는 이 마을의 모든 권력이 있었다. 구품인 그가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여기서 손찌검이라도 했다가는 관아 근처도 못 가보고 마을 초입 나무에 매달려 죽을 것이 뻔했다.
"고개 들라니까?"
태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에는 여전히 불씨가 살아 있었지만, 입에서는 다른 말이 나왔다.
"...죄송합니다."
그 한마디가 목구멍을 찢고 나오는 것 같았다.
우두머리 사내가 그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크크큭. 그래, 그래야지. 구품 놈은 구품답게 굴어야 오래 사는 법이다."
"오늘은 이만 봐주마."
사내가 침을 퉤 뱉었다. 태영의 발치에 떨어진 침이 흙바닥에 스몄다.
"허나 다음 달까지 갚지 못하면, 네 어미가 어찌 될지는 모르는 일이지."
"관아 노비로 팔려가든, 아니면..."
사내가 말끝을 흐리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 웃음의 뒷말이 무엇인지 태영은 구태여 묻지 않았다. 묻고 싶지도 않았다.
사내들이 낄낄거리며 사라졌다. 몽둥이 끝이 사립문을 툭 치고 지나가며 나무 문짝이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태영은 한참을 그 자리에 무릎 꿇은 채 있었다. 무릎에서 흐르는 피가 흙바닥에 스며드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였다.
노을이 붉게 물들기 시작한 하늘 아래, 열두 살 소년이 홀로 마당에 앉아 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 처연했다. 하지만 이 마을에는 그 처연함을 알아줄 이가 없었다.
어머니의 기침 소리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태영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흙 묻은 손을 바지에 문지르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어머니..."
오씨 부인의 낯빛이 창백했다. 입술마저 파리했다. 이불을 걷어차고 반쯤 몸을 일으킨 채 태영이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괜찮다... 콜록... 괜찮으니... 걱정 말거라."
"무릎이... 다쳤구나."
오씨 부인의 눈이 태영의 찢어진 무릎에 가 닿았다. 그 순간 부인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이 어미가... 못나서... 콜록... 너까지 이런 고생을..."
"어머니, 그런 말씀 마세요."
태영이 재빨리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작고 거친 손이었다. 한때는 곱던 손이었을 텐데, 이제는 뼈마디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괜찮아요.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지킬게요."
오씨 부인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 미소가 태영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했다.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도 아들을 향해 웃어 보이려 애쓰는 그 모습이, 어떤 매질보다도 더 태영의 마음을 아리게 만들었다.
"반드시... 반드시 이 마을에서 벗어날 겁니다. 어머니를 편하게 모실 겁니다."
"큰 도회지로 나가서, 좋은 의원께 진맥도 받고, 따뜻한 방에서 편히 지내실 수 있도록... 제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 겁니다."
말을 뱉으면서도 태영 스스로 그것이 얼마나 허황된 다짐인지 알고 있었다. 구품의 자식이 무슨 수로 이 마을을 벗어난단 말인가. 도망치다 붙잡히면 그 자리에서 맞아 죽는 것이 이 땅의 법도였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오씨 부인은 아들의 눈에서 그 절박함을 읽은 것인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태영의 손을 꼭 마주 잡을 뿐이었다.
"콜록... 콜록..."
기침이 또 한 차례 몰아쳤다. 태영은 어머니의 등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창밖으로 저녁 노을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산등성이 너머로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언제나 같은 풍경이었지만, 오늘따라 그 붉은빛이 유독 서글프게 느껴졌다.
이 마을에 온 뒤로 매일같이 보아온 노을이었다. 그 노을을 볼 때마다 태영은 늘 같은 생각을 했다. 저 산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저 붉은 하늘 아래 어딘가에는, 구품 같은 것 없이 그저 사람으로만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있지 않을까.
물론 그것이 헛된 상상이라는 것은 태영도 잘 알고 있었다. 이 산세를 넘어본 자가 없었으니까. 아니, 넘으려 한 자조차 없었다. 넘으려다 붙잡히면 그 즉시 목이 달아나는 것이 이 땅의 규칙이었기 때문이다.
태영은 문득 후산 쪽을 바라보았다. 저물어가는 햇살 아래 후산의 봉우리가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곳에는 아직 캐지 못한 고구마가 남아 있었다. 내일은 반드시 캐 와야 했다. 어머니께 죽이라도 끓여드려야 했으니.
빚 독촉도, 의원의 냉대도, 결국 다 먹고사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었다. 오늘 밤을 넘기고 내일 새벽 일찍 후산에 올라 고구마 몇 뿌리라도 캐 와야 죽 한 그릇이라도 끓일 수 있을 터였다.
태영은 어머니의 이마를 다시 한번 짚어보았다. 아직도 열기가 가시지 않았다. 젖은 수건을 새로 적셔 다시 올려드리고, 태영은 그 옆에 우두커니 앉아 밤을 지새울 준비를 했다.
바람이 창호지를 스치며 스산한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마치 무언가를 경고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 후산에는, 태영이 아직 알지 못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내일 아침, 그 위험이 소년의 운명을 송두리째 뒤바꾸어 놓으리라는 사실을, 지금의 태영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