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단장님, 절 가지셨네요

4화

다음 날 아침, 나는 결사의 대전이라 불리는 넓은 홀에 세워졌다. 돌기둥은 사람 몸통 몇 개를 합친 것보다 굵었고, 그 사이사이로 아홉 명, 아니 그 이상의 귀병족 전사들이 늘어서 있었다. 다들 키가 나보다 머리 두 개는 더 컸다. 어깨가 문짝만 했고, 팔뚝에는 하나같이 문양 같은 흉터가 새겨져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하나같이 나를 향했다. 위에서 아래로 훑는 시선, 벌레를 보는 듯한 눈빛도 섞여 있었다. 어떤 놈은 대놓고 코웃음을 쳤고, 어떤 놈은 그냥 무표정하게 나를 관찰했다. 관찰당하는 쪽에서는 그게 더 무서웠다. '이거 완전 동물원 원숭이네.' 누가 먹이라도 던져줄 것 같은 분위기였다. 태리가 상석에 앉아 있었다. 검은 옥좌 같은 자리였는데, 그의 체구에 딱 맞춰 만들어진 게 분명했다. 등받이 높이며 팔걸이 위치까지 그 몸에 맞춘 걸 보니, 이게 하루 이틀 앉은 자리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태리는 턱을 괴고 나를 내려다봤다. 표정에 별다른 감흥이 없어서 오히려 더 불안했다. 옥좌 옆에 서 있던 한 여자 전사가 나를 유심히 쳐다봤다. 윤서아는 결사 소속 전사로, 태리 다음으로 서열이 높다고 했다. 다른 귀병족들보다는 체구가 작았지만, 그래도 인간 기준으로는 거인이었다. 짧게 자른 머리, 팔뚝에 새겨진 문양들이 전투로 다져진 몸을 증명하고 있었다. 눈매가 날카로웠는데, 그 안에 담긴 건 적대감이 아니라 뭐랄까, 순수한 궁금증 같았다. 신기한 동물을 처음 본 사람의 눈빛. "이게 새 노래인가." 서아가 낮게 말했다. 목소리에는 경멸도, 호기심도 아닌 그냥 담백한 평가가 담겨 있었다. "그렇다." 태리가 대답했다. "앞으로 이곳에 머문다. 손대는 자는 각오해야 할 거다." 그 말에 홀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나는 그 침묵의 무게를 몸으로 느꼈다. 숨 쉬는 소리조차 조심스러워지는 그런 정적이었다. '저게 지금 나 보호해준다는 건가.' 뭔가 고마워야 할 상황 같은데, 소름이 더 크게 돋았다. 보호라는 말이, 소유라는 말과 얼마나 다른 건지 아직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냥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 전사들 사이에서 몇몇이 시선을 교환했다. 표정 변화는 거의 없었지만, 그 미묘한 눈짓 속에 담긴 뜻은 나도 읽을 수 있었다. '저것도 얼마 못 가겠네.' 대충 그런 뜻이었다. 소개가 끝나고 나는 서아를 따라 방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녀가 나를 안내하는 역할을 맡은 듯했다. 태리는 옥좌에서 몸을 일으키지도 않고 그냥 손짓 하나로 우리를 물렸다. 복도를 걷는 동안, 서아는 앞만 보고 걸었다. 걸음이 크고 일정해서 나는 반보 정도 빠르게 걸어야 겨우 뒤처지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꼸다. 벽에 걸린 무기들, 조각들, 알아볼 수 없는 문자들이 지나갔다. 전부 다 이곳이 인간의 공간이 아니라는 걸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물어봐도 돼요?" "뭘." "태리가... 왜 저를 데려온 거예요? 도희 대신에." 서아가 걸음을 잠깐 멈췄다. 나를 돌아보는 눈빛에 뭔가 복잡한 감정이 지나갔다. 동정 같기도 하고, 짜증 같기도 하고. "단장님은 원래 강한 것보다 특이한 걸 더 좋아해." 그녀가 말했다. "인간 출신이 스스로 저주를 걸어서 자기 노래를 팔아넘긴 사례가 없었어. 그게 재밌었던 거야." "재밌었다고 이 짓을..." "쉿." 서아가 낮게 경고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억양은 단호했다. "여기서 단장님 흉보다가 걸리면 그날로 끝이야." 나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이미 온갖 욕이 지나갔다. '미친놈. 재미로 사람 인생을...' 말은 못 해도 생각은 자유니까. 나는 그 생각만큼은 마음껏 굴렸다. 서아가 다시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조언 하나 해줄게. 단장님한테 관심을 받는 건 축복이 아니라 저주야. 지금까지 단장님 눈에 든 애들 중에 멀쩡하게 남은 애가 없었어." 그 말에 나는 걸음을 멈췄다.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어떻게 됐는데요." "미치거나, 도망치다 죽거나, 아니면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됐거나." 서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단장님은 부드럽게 다가와. 그게 제일 위험한 부분이야. 잡아먹기 전에 길들이는 거니까." 등에 소름이 쫙 돋았다. '길들인다고?' 그 말이 자꾸 머릿속에서 되풀이됐다. 길들인다. 마치 짐승 얘기하듯. 그런데 나는 지금 정확히 그 짐승 취급을 받고 있는 거였다. "부드럽게 다가온다는 게 정확히 뭔데요." 서아가 잠깐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판단하는 눈빛이었다. "먹을 걸 챙겨주거나, 필요한 걸 미리 알아서 대주거나. 그런 식이야. 처음엔 다들 그게 고맙다고 느껴. 그리고 그 다음엔..." 그녀가 말을 끊었다. "됐어. 겪어보면 알아." "그러니까 조심해. 관심을 받으면 받을수록, 도망칠 여지가 줄어들어." 서아는 그 말을 남기고 방문 앞에서 멈췄다. "여기가 네 방이야. 필요한 게 있으면 문 앞에서 얘기해. 밤에는 절대 밖으로 나오지 마." "왜요?" "밤에 돌아다니는 것들이 인간 냄새를 좋아해." 그녀는 그 말만 남기고 등을 돌려 복도를 걸어갔다. 발소리가 규칙적으로 멀어졌다. 나는 그 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방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등에 대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낯선 침대, 낯선 벽, 낯선 공기. 방 안 어디에도 익숙한 게 하나도 없었다. 침대는 인간용으로 준비해준 건지 크기가 정상이었는데,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나만을 위해 맞춰진 물건이라는 게. '인간 냄새를 좋아한다니.' 내 몸에서 정말 그런 냄새가 나는지, 나는 스스로 팔을 들어 냄새를 맡아봤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더 무서웠다. 내가 못 느끼는 냄새를 저것들은 맡을 수 있다는 뜻이니까. 서아가 알려준 정보들이 머릿속에서 뱅뱅 돌았다. 관심은 저주다. 길들여진다. 멀쩡하게 남은 애가 없다. '그럼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데.' 이미 관심을 받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미 선택당했다. 도희라는 이름을 가진 누군가 대신에. 그 사람은 지금 어디 있을까. 그 생각을 하다가, 나는 곧바로 생각을 접었다. 지금 남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다. 방 안 어딘가에서 벌레 우는 소리 같은 게 들렸다. 아니, 어쩌면 벌레가 아닐 수도 있었다. 이곳에서는 뭐가 뭔지 구분하는 게 의미 없다는 걸 나는 벌써 배우고 있었다. 답을 찾을 새도 없이, 문밖에서 무거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 발소리의 리듬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태리였다.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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