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산 중턱에 박아둔 돌무더기가 흔들렸다.
정확히 말하면 흔들린 게 아니라 울렸다. 내가 그 안에 심어둔 경계 주문이, 누군가의 발이 결계선을 밟는 순간 뇌 속에서 종을 치듯 울려 퍼졌다.
'또야.'
요 며칠 잠잠하던 게 이상하다 싶었다. 나는 화덕 앞에 앉아 마른 나물을 다듬다가 손을 멈췄다. 손에 쥐고 있던 칼끝이 도마 위에서 미끄러졌다. 하필 이럴 때.
울림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연속으로, 규칙적으로, 마치 여러 개의 발이 동시에 결계를 밟고 지나가는 듯한 파동이었다. 하나, 둘, 셋…… 세다가 그만뒤버렸다. 세는 게 무의미했다. 그만큼 많았다.
'혼자가 아니네.'
나는 나물 바구니를 던지듯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끝이 저릿했다. 심연력을 조금 끌어올린 탓이었다. 결계와 연결된 내 영력이 저편의 진동을 그대로 되돌려주고 있었고, 그 파동의 결이 낯설었다. 도희의 기척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누구지. 이 산에 결계를 뚫고 들어올 수 있는 존재가 몇이나 된다고.
어머니는 나를 인간 여자아이의 몸으로 만들어주고, 영족의 피를 섞어 이 산속에 숨겨 키웠다. 나는 인간이었다가, 인간이 아니게 됐다가, 결국은 무엇도 아닌 게 됐다. 이름도 없고, 족속도 없고, 그냥 이 산에 박혀 사는 뭔가였다. 그런 나를 유일하게 사람처럼 대해준 게 도희였다.
그래서 어제, 나는 실수를 저질렀다.
'좋아해.'
한밤중에, 아무 맥락도 없이, 나는 그 말을 뱉었다. 별을 보다가, 도희 옆에 나란히 앉아 있다가, 그냥 툭 튀어나왔다. 후회는 그 즉시 왔다. 도희는 그 자리에서 한참 나를 쳐다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혐오스러워."
짧고 단정한 그 한마디가 아직도 귓속에 박혀 있었다. 억양도 없었다. 화도 안 낸 얼굴이었다. 그냥 사실을 말하듯이, 오늘 날씨가 흐리다는 듣이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날 밤 결계 안에서 혼자 밤을 새웠다. 울지는 않았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 자존심이 상해서 웃었던 것 같기도 하다. 웃다가 나뭇가지를 몇 개 부러뜨렸던 것도 같고.
'그래, 혐오스러운 게 맞지. 나도 나 혐오스러운데.'
무엇도 아닌 게 사람을 좋아한다고 나댔으니. 그게 혐오스럽지 않으면 뭐가 혐오스러울까.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밤을 넘겼다. 다독여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지금, 결계가 울리고 있었다.
낯선 진동, 여러 명의 발. 그리고 그 파동 속에 섞여 있는 익숙한 떨림 — 도희였다. 도희의 영력 흔적이 그 무리 속에 있었다. 공포에 질린 흔적으로.
머릿속이 하얘졌다. 어제 일이니 오늘 일이니, 좋아한다느니 혐오스럽다느니 그런 건 다 지워졌다. 남은 건 하나였다.
'가야 해.'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산길을 내려갔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발밑에서 자갈이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나뭇가지가 팔을 긋고 지나갔다. 아팠는지도 몰랐다. 나중에 보니 팔뚝에 길게 긁힌 자국이 남아 있었지만, 그 순간엔 아무 감각도 없었다.
도희의 은신처는 결계 경계선에서 이 킬로쯖 떨어진 계곡 안쪽에 있었다. 뛰면 십 분, 지금 속도로는 칠 분.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것 같았다. 폐가 찢어지는 기분이었지만 속도를 줄일 수 없었다.
'제발 아니어야 하는데.'
제발 아니어야 한다고 빌면서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런 촉은 늘 맞았다. 세상이 나를 배려해준 적이 없었으니까. 최소한 이번만이라도 빗나가주면 안 되나. 그런 유치한 바람이 다리를 더 재게 움직이게 했다.
계곡 입구에 도착했을 때, 나는 그대로 멈춰 섰다.
달빛 아래 아홉 명의 형체가 도희를 둘러싸고 있었다. 하나같이 사람의 크기를 넘어서는 체구였다. 검은 갑주, 뼈로 짠 듯한 장신구들이 달빛을 받아 희끄무레하게 빛났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하나가 도희의 목덜미를 사슬로 휘감아 끌고 있었다.
도희는 저항하고 있었다. 발톱을 세우고, 이를 드러내고, 몸을 뒤틀며 사슬을 뜯어내려 했다. 그러나 사슬이 목을 조를수록 그 저항은 점점 줄어들었다. 숨소리가 거칠어지다 갈라지는 게 여기까지 들렸다.
'귀병족.'
소문으로만 들었던 존재들이었다. 인간도, 영족도 아닌, 오로지 폭력을 위해 태어난 것 같은 전사족. 몸집도, 힘도, 인간의 기준으로는 계산이 안 되는 것들. 그리고 그들을 부린다는 결사, 13인회. 그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만으로도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은 목소리를 낮췄다.
'저 소문이 진짜였구나.'
지금 이 순간까지도 반신반의했던 게 우스울 정도였다. 소문이 아니라 눈앞의 현실이었다.
무리의 맨 앞, 다른 이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형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검은 피부가 달빛을 흡수하듯 빛을 삼켰고, 복잡하게 땋아 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자줏빛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 눈이 나와 마주치는 순간, 나는 숨을 쉬는 법을 잊었다.
'저게 뭐야.'
압도적이라는 말로도 부족했다. 존재 자체가 위압이었다. 8피트는 족히 넘어 보이는 체구, 날카롭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드러난 이빨은 사냥감을 씹기 위해 만들어진 모양이었다. 손가락 하나가 내 팔뚝만 했다. 저게 사람을 때리면 어떻게 되는 건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 존재가, 나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 산에 또 다른 것이 숨어 있었군."
낮고 울리는 목소리가 계곡 전체를 눌렀다. 공기가 진짜로 무거워지는 느낌이었다. 발밑의 돌멩이가 그 목소리에 미세하게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 착각이었을까. 착각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착각이 아닌 것 같아서 더 무서웠다.
도희가 사슬에 목이 졸린 채로 나를 향해 눈을 크게 떴다. 입술이 뭐라고 움직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나는 그 입 모양을 읽을 수 있었다.
'도망가.'
그럴 리가.
나는 이미 결계 밖으로 나온 몸이었고, 도희를 두고 돌아설 다리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손끝이 떨렸다. 등에서는 이미 식은땀이 흘렀다. 다리도 후들거렸다. 무섭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지금 당장 뒤돌아 산으로 뛰어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절반은 있었다. 나머지 절반이 그걸 막고 있었다.
'뭐라도 해야 해.'
혐오스럽다고 했던 그 말이, 지금 이 순간에도 머릿속 한구석에서 맴돌았다. 그런데도 도망칠 수 없었다. 이게 사랑인지 미련인지, 아니면 그냥 인간으로도 못 자란 내가 마지막으로 붙잡을 수 있는 관계인지 나도 몰랐다. 몰라도 상관없었다.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나는 목구멍을 열었다. 영족의 피가 내 안에서 처음으로 소리를 내려 했다. 노래였다. 어머니가 가르쳐준, 오로지 위급할 때만 쓰라던 그 음률이었다. 목이 갈라지는 것 같았지만 참았다.
"거기서 멈춰."
내 목소리가 계곡을 울렸다. 아홉 명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그리고 그 거대한 존재가, 자줏빛 눈을 가늘게 좁히며 나를 응시했다.
"멈추라고?"
그가 웃었다. 이빨 사이로 새어 나오는 그 웃음소리가,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계곡 전체가 그 웃음소리에 눌려 잠깐 조용해졌다. 도희의 숨소리도, 자갈 구르는 소리도, 바람 소리도 전부 그 웃음 하나에 삼켜졌다.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