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인간이었다고."
태리의 목소리가 계곡 벽에 부딪혀 되돌아왔다. 낮은 울림이 두 번, 세 번 겹쳐지며 사방에서 나를 에워쌌다.
나는 무릎을 꿇은 채로 그 목소리의 무게를 온몸으로 받아냈다.
'끝났다.'
인간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 모든 게 뒤바뀔 것 같았다. 영족도 아니고 귀병족도 아닌, 그냥 인간 새끼가 감히 저주를 걸었다는 사실을 알면 그는 계약을 파기할 게 뻔했다. 아니, 파기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목을 꺾어버릴지도 몰랐다. 지금까지 봐온 귀병족들의 성정을 생각하면 그게 더 자연스러운 결말이었다.
머릿속으로 이미 몇 가지 도망 경로를 그렸다. 왼쪽 능선으로 뛰면 몇 걸음이나 갈 수 있을까. 다섯 걸음? 세 걸음? 다리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는데 그게 무슨 소용인가.
그런데 태리는 파기하지 않았다.
대신 그가 나에게 성큼 다가와, 거대한 손으로 내 턱을 들어 올렸다. 검은 손가락이 내 피부를 스치는 순간 등줄기가 찌릿했다. 손끝 하나가 내 얼굴 절반보다 컸다. 그 손아귀에 힘이 조금만 더 들어가도 턱뼈가 그대로 부서질 것 같았다.
"인간의 몸으로 이런 노래를 짜낸다니."
그가 중얼거렸다. 흥미가 다시 눈에 돌아왔지만, 그 색이 아까와는 달랐다. 더 짙고, 더 집요했다. 마치 처음 보는 신기한 벌레를 발견한 아이의 눈빛 같았다. 나는 그 벌레였다.
"재밌군."
재밌긴 뭐가 재밌어. 나는 지금 죽기 직전인데.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도희를 쳐다봤다. 도희는 내 시선을 피하며 뒷걸음질 쳤다.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방금까지 나한테 매달리면서 살려달라고 하던 그 눈빛은 어디로 사라진 건지.
'네가 방금 뭘 한 거야.'
묻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목구멍이 텅 빈 느낌이었다. 노래를 종속시킨 대가였다. 마치 성대 안쪽을 누가 수건으로 틀어막은 것처럼, 소리를 내려고 해도 바람 새는 소리만 났다.
"거래는 끝났어."
나는 겨우 입을 뗐다. 목소리가 갈라져서 내가 듣기에도 낯설었다.
"도희는 자유고, 나는... 네 거야."
말하면서도 스스로가 어이없었다. 내 거야, 라니. 이게 무슇 계약서에 도장 찍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물건처럼 소유한다는 말을 이렇게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다니.
"그래."
태리가 손을 놓았다. 그의 손이 떠나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나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무릎이 돌바닥에 부딕히는데도 아픈지 잘 몰랐다. 몸의 감각이 전체적으로 멀어진 느낌이었다.
"넌 이제 내 거다."
그 말이 확정되는 순간, 나는 도희를 다시 쳐다봤다. 이번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희는 이미 등을 돌리고 산길로 뛰어가고 있었다. 뒤도 안 돌아보고.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없이.'
나무 사이로 사라지는 도희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 애가 신었던 운동화 밑창이 다 닳아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렸다. 어제 카페에서 봤을 때는 몰랐는데, 지금 저렇게 도망치는 걸 보니 유독 눈에 들어왔다. 죽을 위기 안에서도 그런 게 눈에 들어오는 나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
그러게 좀 잘 살지, 나도. 이 바보 같은 짓을 왜 했을까.
친구라고 부를 것도 없었던 사이였다. 그냥 옆자리에서 몇 마디 나눈, 그 정도의 인연이었을 뿐인데. 그런데 왜 몸이 먼저 움직였을까. 그 순간엔 생각이란 게 없었다. 그냥 저 애를 살려야 한다는 것 말고는.
'답이 없네, 진짜.'
귀병족 전사 하나가 나를 들어 어깨에 짊어졌다. 어깨뼈가 배에 닿는 감촉이 딱딱하고 차가웠다. 반항할 기력이 없었다. 눈앞이 흔들리고 위아래가 뒤섞였다. 세상이 통째로 뒤집힌 채로 움직였다.
계곡을 떠나는 동안 나는 몇 번이나 정신을 잃을 것 같았지만, 정작 정신을 놓을 수 없었다. 노래를 빼앗긴 몸이 계속 떨렸다. 마치 심장을 반쪼가리만 남기고 나머지를 도둑맞은 느낌이었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 안쪽이 허전했다. 뭔가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없는 그 공백감이 계속 신경을 긁었다.
나뭇가지가 스치는 소리, 발밑에서 자갈이 부서지는 소리, 저 앞쪽에서 누군가 낮게 웃는 소리. 전부 뒤죽박죽으로 귀에 들어왔다가 사라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소리도 잘 안 들리고, 그냥 진동만 느껴졌다.
얼마나 걸었는지 모른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거대한 석조 건물 안, 낯선 방바닥에 누워 있었다.
천장이 높았다. 벽에는 뼈로 짠 듯한 장식들이 걸려 있었고, 방 안 공기는 서늘하고 무거웠다. 결사의 본거지였다.
'여기가 어디야.'
방 안을 둘러봤다. 창문 하나 없었다. 벽 한쪽에는 알아볼 수 없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사람 뼈를 이어붙인 모양 같기도 했다.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몸을 일으키려다가 그대로 다시 쓰러졌다.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도 힘들었다. 노래를 빼앗긴 대가가 이렇게까지 클 줄은 몰랐다. 마치 몸속에 있던 배터리 하나를 통째로 뽑아간 느낌이었다.
문이 열리고 태리가 들어왔다. 방 안 조명이 그의 검은 피부를 더 짙게 비췄다. 그가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이름이 뭐지?"
"서은하."
목소리가 여전히 갈라졌다. 물이라도 좀 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런 말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은하."
그가 그 이름을 발음하듯 되뇌었다. 어색한 억양이었다. 한 음절씩 끊어서 발음하는 게, 마치 처음 접하는 외국어를 연습하는 것 같았다.
"기억해두지."
기억은 무슨. 어차피 노예 취급할 거면서 이름은 왜 물어보는 건데.
그는 내 앞에 웅크려 앉았다. 거대한 체구가 그렇게 낮춰지자 오히려 더 위압적이었다. 눈높이가 맞춰졌는데도 압도감이 줄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가까워진 만큼 그 눈동자 안의 색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검은색인데도 어딘가 붉은 기운이 도는 것 같은, 이상한 눈이었다.
"넌 이제 내 노래고, 내 소유물이다.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마. 네 영혼의 결을 내가 쥐고 있으니, 결계 밖으로 나가는 순간 내가 알게 돼."
"그럼 난... 뭘 하면 되는데."
"살아."
그가 간단하게 말했다.
"살아서 내 옆에 있어. 그거면 돼."
말은 단순했지만, 그 눈빛에 담긴 건 단순하지 않았다. 나는 그 눈빛을 정확히 해석할 수 없었지만, 뭔가 소유욕과 호기심이 뒤섞인 그 시선이 등골을 서늘하게 만든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살라는 말 한마디가 이렇게 무겁게 들릴 줄은 몰랐다. 보통은 힘내라거나, 잘 살라거나, 그런 인사말처럼 가볍게 던지는 말인데. 이 자는 그 말을 마치 명령처럼, 아니 판결처럼 내렸다.
'되돌릴 방법이 없어.'
계약은 완료됐다. 결계도 사라졌고, 도희도 떠났고, 노래도 넘어갔다. 이제 남은 건 이 낯선 자의 소유물로 사는 것뿐이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제 와서 되돌리자고 말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계약이라는 게 그런 거였다. 서명하고 나면 후회해도 소용없는, 그런 종류의 것.
목표가 바뀌었다.
저주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 이 안에서 살아남는 것으로.
머릿속으로 계획이랄 것도 없는 계획을 세워봤다. 일단 순종적으로 보이자. 반항하지 말자. 기회를 봐서 이 결의 정체를 알아내자. 그다음엔... 그다음은 아직 모른다. 지금은 그저 오늘 밤을 넘기는 게 먼저였다.
태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던졌다.
"내일 아침, 결사 전체에 너를 소개하겠다."
소개라니. 그게 무슨 신입사원 오리엔테이션 같은 건가.
가벼운 마음으로 넘기려 했지만, 그의 말투에서 느껴지는 어떤 무게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단순한 인사 자리는 아닐 것 같았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나는 그다음 날 아침에야 제대로 깨닫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