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멈추라고?"
그 존재가 다시 물었다. 웃음기가 여전히 목소리 끝에 묻어 있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들어 내가 그은 결계선 위, 아직 남아 있던 영력 자락을 잡아당겼다.
'이거 하나 믿고 여기까지 왔지.'
마른침이 넘어갔다.
계곡의 공기는 이상했다. 습한데 차가웠고, 조용한데 귀가 울렸다. 태리라는 이름의 저 존재가 한 번 숨을 내쉴 때마다 주변의 나뭇잎들이 파르르 떨렸다.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일 리가 없었다. 영족 중에서도 격이 다른 무언가라는 건, 굳이 어머니의 경고를 떠올리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와, 나 진짜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속으로 실없는 웃음이 났다. 이런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다니, 나도 참 어지간하다 싶었다.
영족의 노래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치유의 음률과 속박의 음률. 치유는 상처를 아물게 하고 지친 것을 재우는 노래다. 흔히 쓰이고, 흔히 배우고, 흔히 자랑스러워하는 종류의 힘이었다. 반면 속박은 다르다. 대상을 영원히 얽어매는 저주이며, 어머니는 이걸 절대 쓰지 말라 했다. 한번 걸면 걸었던 자신도 그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여러 번 다짐을 받듯 말했다.
그때는 그냥 흘려들었다. 무슨 옛날이야기처럼, 늙은 어른들이 겁주려고 하는 잔소리처럼.
지금 그걸 쓰려는 거다, 나는.
'엄마, 미안한데 나 지금 그거 쓸게.'
마음속으로 사과 아닌 사과를 하며 나는 숨을 골랐다. 손끝이 저렸다. 두려움 때문인지, 이미 끌어올린 영력 때문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제안을 하나 하지."
나는 목소리가 갈라지지 않도록 애를 썼다.
"도희를 놔줘. 그러면 내가 대신 묶이겠다."
계곡 안의 웃음소리가 뚝 끊겼다.
정적이 얼마나 무거운지, 그 짧은 순간에도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나뭇가지 하나 흔들리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대신, 이라니."
거대한 존재가 한 걸음 다가왔다. 그 걸음 하나에 땅이 울리는 것 같았다. 발밑의 돌무더기가 미세하게 떨렸다.
"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함부로 뱉는지."
"속박 저주야. 지금 내가 걸면, 걸린 순간부터 넌 나를 놓을 수 없어."
나는 이미 노래의 첫 소절을 흥얼거리고 있었다. 손끝에서 은은한 빛이 피어올랐다.
'제발 통해라, 제발.'
이런 걸 실전에서 처음 써보는 게 정상인가 싶었지만, 지금 와서 딴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어머니가 남긴 몇 줄 안 되는 구전과 내가 어렴풋이 기억하는 음률의 조각들. 그게 내가 가진 전부였다.
그가 나를 응시했다. 흥미로운 걸 발견한 눈빛이었다. 저 눈빛이 뭘 의미하는지, 그때는 몰랐다. 지금은 안다. 그건 사냥꾼이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사냥감을 발견했을 때의 눈빛이었다.
"해봐."
그가 팔을 벌렸다. 도발이었다.
'이 새끼 지금 여유 부리는 거지.'
속으로 이를 갈면서도, 겉으로는 침착한 얼굴을 유지하려 애썼다. 어차피 지금 표정 관리해봐야 상황이 나아질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노래를 완성했다.
빛이 그의 발목을 타고 올라가 몸 전체를 휘감았다. 사슬 같은 형상으로, 은은하게, 그러나 절대 끊어지지 않을 강도로.
빛이 그의 몸을 타고 오르는 동안, 나는 내 안의 무언가가 함께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마치 실을 뽑아내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아프진 않았다. 다만 허전했다.
"됐어."
숨이 턱까지 찼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도희를 풀어줘."
그가 자신의 몸을 감싼 빛을 내려다보더니, 천천히 웃었다.
"흥미롭군."
그 말투에는 두려움이 조금도 없었다.
"이 저주, 걸어본 지 얼마나 됐지?"
"처음이야."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거짓말할 여유가 없었다.
"그럴 줄 알았다."
말투에 비웃음이 섞였다. 아니 대체 저건 뭘 보고 안다는 건지. 초짜 냄새가 그렇게 심하게 나나. 자존심이 상했지만 지금은 그것도 사치였다.
그가 사슬에 묶인 도희를 향해 손짓했다. 도희의 목을 조르던 사슬이 스르르 풀렸다. 도희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다행이다.'
안도감이 잠깐 스쳤다. 도희의 가슴이 오르내리는 걸 확인하고서야 겨우 숨이 쉬어졌다. 살았다. 적어도 저 애는 살았다.
하지만 곧이어 뭔가 잘못됐다는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태리의 표정이 너무 여유로웠다. 협상이 끝났으면 이제 물러나야 할 존재가, 오히려 더 즐거워 보였다.
'설마.'
"거래는 성립했다."
그가 말했다.
"하지만 하나가 더 필요해."
"뭐?"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떨렸다.
"네가 방금 쓴 그 노래. 그게 네 본체지."
그의 자줏빛 눈이 나를 뜯어보듯 훑었다. 위에서 아래로, 발끝까지, 마치 상품을 감정하는 눈빛이었다.
"몸을 묶는 것으로는 부족해. 네 노래 자체를, 영원히 나에게 종속시켜."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건 다른 얘기잖아.'
노래를 종속시킨다는 건, 내 영혼의 근원을 넘기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어머니가 가장 두려워했던 시나리오였다. 몸을 묶는 저주는 그래도 어떻게든 버텨볼 수 있는 종류였다. 하지만 노래를, 존재의 근원을 넘긴다는 건.
'그거 넘기면 나 그냥... 저 새끼 손바닥 위에서 노는 인형 되는 거잖아.'
"그건..."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입술이 떨렸다.
"거부하면 저 아이를 다시 데려간다."
그가 도희를 가리켰다. 여전히 바닥에 널브러진 도희의 몸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눈은 감겨 있었지만, 손끝이 미세하게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아직 정신을 잃지 않은 걸까, 아니면 그냥 몸이 저항하는 걸까.
선택지가 없었다.
애초에 나한테 선택지 같은 게 있었던 적이 있나?
돌이켜보면 이 계곡에 들어올 때부터, 아니 그보다 훨씬 전부터. 내가 뭔가를 스스로 선택해본 기억이 있었나 싶었다. 늘 상황에 몰려서, 어쩔 수 없어서, 그래서 하는 것들뿐이었다.
'그래, 뭐.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으면.'
"할게."
나는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단호하게 나왔다는 게 스스로도 신기했다.
그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 웃음이 소름 끼치게 아름다웠다는 걸,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런 얼굴로 저런 말을 하니 더 얄궂었다.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건 이럴 때 느끼는 거구나 싶었다.
노래가 두 번째로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나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첫 소절을 뗄 때부터 목이 잠겼다. 마치 내가 나를 결박하는 기분이었다. 내 영혼의 결이, 실처럼 풀려나가 그의 손끝으로 흘러 들어갔다.
노래가 이어질수록 세상이 멀어지는 것 같았다. 계곡의 냄새, 흙냄새, 도희의 숨소리, 바람 소리. 모든 게 한 겹씩 뒤로 물러나는 느낌이었다.
끝났을 때, 나는 무릎을 꿇고 있었다. 뭔가 빠져나간 자리가 텅 빈 느낌이었다. 배 속 어딘가가 통째로 비어버린 것 같은, 이상한 허기 같은 감각.
'이게 대가구나.'
숨을 쉬는 것조차 낯설었다.
"고마워, 은하야."
도희가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손끝이 차가웠다. 그래도 살아있는 온기가 느껴졌다. 나는 그 손길에 잠깐 안심했다.
'그래, 살았으면 됐지. 살았으면.'
그런데 도희의 다음 말이 모든 걸 무너뜨렸다.
"저 애 원래 인간이었어. 저 사람 산속 여자가 인간 아이 데려다가 영족으로 만든 거라고요. 반쪽짜리예요."
도희는 나를 향해 말한 게 아니었다. 태리를 향해, 나를 팔아넘기듯 뱉은 말이었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됐다. 방금 내가 목숨을 걸고, 내 노래까지 넘기면서 구해준 애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뭐라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도희의 손을 잡고 있던 내 손이 저절로 굳었다.
계곡이 조용해졌다.
태리의 자줏빛 눈이 다시 나를 향했다. 이번엔 흥미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로 번뜩였다.
"인간이었다고."
그가 낮게 되물었다.
그 목소리에는 웃음이 없었다.
공기가 다시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방금까지의 여유로운 웃음이 사라진 그 얼굴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아, 이거 진짜 잘못됐다.'
도희의 손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노래를 두 번이나 쏟아낸 대가인지, 아니면 지금 이 상황이 주는 충격 때문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태리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나를 향해 다시 걸어오기 시작했다.